[NO.080] 운 좋게 느꼈던 자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야기

2023.11.04 | 조회 512 |
0
|
원데이 원무비의 프로필 이미지

원데이 원무비

이상한 영화평론가 김철홍이 보내는 영화 뉴스레터 @1day1mov

첨부 이미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뭔가 통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짜릿한 경험을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겪는다. 당연히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가 아닌가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반전은 그건 바로 축구를 할 때라는 거다. 잔디 위에서 골을 넣기 위해 뛰어다니며 공 몇 번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끝나고 나면 호흡을 맞춘 사람들과 나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연결고리 같은 게 생겼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건 경기 내용이 좋았을 때 한정이긴 하다. 별로면 통하는 뭔가가 생기기 힘들다. 일단 내용이 좋아야, 뭔가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첨부 이미지

 

또 한 번의 반전.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영화 얘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야기다. 나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총 두 번 보았는데, 첫 관람은 일본 극장에서 보았고, 다음 차례엔 한국 극장에서 보았다. 다시 말해 처음엔 자막이 없어서 대사를 알아듣지 못한 채 관람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자막과 함께 봤다는 것이다. 과연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글 초반에 이미 복선을 깔아뒀기는 하다. 신기하게도 대화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첫 관람 때 다 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부 디테일한 대사들을 제외하고는, 극을 이해하는 데엔 큰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건, 자막과 함께 볼 때 오히려 아쉬웠다는 것이었다. 물론 두 번째 관람이라 어느 정도 감흥이 떨어졌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확실히 텍스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움직이는 이미지에만 집중했을 때 전달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오로지 움직이는 공에만 집중할 때, 그라운드 위의 너와 나 사이에 무언가 발생하는 것처럼.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의 하루>를 보다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의 하루>는 ‘씬’의 ‘모음집’ 같은 영화이다. 무슨 말이냐면, 극 중간중간에 앞으로 진행될 씬의 대략적인 진행 방향이 ‘텍스트’로 제시된 다음(마치 시놉시스처럼), 그 시놉시스가 극화된 영상이 이어지는 형태라는 거다. 예를 들어 갑자기 이런 식의 텍스트가 나온다. ‘시인은 술을 좋아하지만 건강 때문에 금주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찾아온 손님이 하필 술 선물을 가져오자, 시인은 술이 몹시 마시고 싶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 설명에 해당되는 씬이 이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씬 모음집을 보면서 든 생각이 이거였다. 텍스트는 이미지 감상을 너무 방해한다. 이미지가 그 자체로 아무리 다양한 해석을 낳으려 해도, 텍스트가 나에게 주입한 선입견이 그 가능성을 자꾸 차단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림으로만 봤을 때의 나는 분명히 자유로웠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움직이는 이미지의 빈칸을 내 멋대로 채울 수 있었다. 이걸 느끼고 나니 나이 든(혹은 세상을 떠난) 여러 영화 평론가들이 무성 영화를 왜 그렇게 예찬했는지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 뇌는 이미 텍스트에 절여진 상태라 막상 또 대사 없는 영화는 잘 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 요즘 더 걱정하고 있는 건, 나 역시 점점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거다. 길고 느린 호흡의 영화를 오랜 시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보는 게,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럴수록 나는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축구를 열심히 해서 체력을 기른 다음, 그 기른 체력으로 더 많이 축구하고 더 많이 좋은 영화를 보고 싶다. 아무리 한탄해도 세상은 계속 바뀔 것이고, 그에 따라 나 또한 계속해서 병들고 늙고 뒤처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짧은 자유로움을 극장에서 운 좋게 느꼈다는 것을 위안 삼아,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열심히 뛰어 봐야겠다.

첨부 이미지

그래서 <그어살> 감상평. 내가 느낀 건 일단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직도 할 말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어살>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변명 같은 영화다. 자신이 지금까지 왜 이렇게 살았는지, 그동안 무슨 이유에서 13편의 이야기를 창조했는지에 대한 변명. 자신이 쓴 13편의 이야기를 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어살>은 그 에필로그 혹은 끝인사인 거다. 그 변명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감독은 관객들을 데리고 자신의 유년기로 향한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실제로 목격했다고 믿는 이미지들을 스크린에 펼쳐낸다. 몇 십 년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수히 상영됐을 그 영상들을.

그는 이 영상을 통해 자신이 왜 이런 인생을 살았는지 고백한다. 어릴 적 왜가리를 따라 엄마를 찾으러 탑에 들어갔다가 창조주를 만나고 왔다. 그때 그 창조주는 내게 세상을 부탁했지만, 나는 이를 거절하고 원래 나의 세상을 그대로 사는 선택을 내렸다. 그게 마음에 걸린 나는, 내 세상에서 내 방식대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해 온 것이다. 이런 삶을 산 게 나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이 영화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다.

이 이야기를 믿을지 말지는 물론 관객 개인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정말로 창조주 할아버지의 지령을 받았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건지 그 진위 여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니까. 다만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건 그가 일평생을 바쳐 계속해서 세상을 향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오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과 작업물이 곧 증거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지난 뉴스레터(1-79호) 보기
(80호부터는 최하단에서 확인 가능하십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이번 원데이 원무비가 재밌으셨다면 평생 무료로 원데이 원무비를 운영하고 있는 연재자 김철홍에게 좀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커피 한 잔을 사주시면 어떨까요?

후원하기

또는
[ 계좌번호 : 신한 110 - 253 - 914902 ]
감사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원데이 원무비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원데이 원무비

이상한 영화평론가 김철홍이 보내는 영화 뉴스레터 @1day1mov

뉴스레터 문의1day1mov@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