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4 갈치와 복숭아

2021.09.09 | 조회 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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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엄마와의 긴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영영 서로 보지 않겠다던 우리는, 그러나 부모와 자식이란 끊을 수 없는 선 위에서 결국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습니다. 엄마와 울고 웃고 싸우고 또 화해하면서, 엄마라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엄마의 삶과 저의 삶은 온전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참 공평해 보였습니다.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았고, 누구의 말만 잘못이지도 않은 채, 우리는 그저 각자 살아온 삶에 비춰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또 마음아파 했지요. 생각해보면 저는 늘 참는게 좋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엄마의 지친 삶에 조금의 무게도 더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건, 돌이킬 수 있을 만큼 아주 먼 어린시절부터였으니까요. 그래서 억울했고, 그래서 서운했던 마음은, 그리하여 참았던 나에 대한 원망에 섞여 터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지만 후련합니다. 마음에 박힌 많은 것들을 빼내고 서른 다섯의 나이가 되어서야 이제 진정 나대로 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조금 부끄럽지만 이 곳에 우리의 '전쟁(?)'을 기록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엔 저처럼 깊고 짙은 앙금의 흔적이 남지 않길 바라면서.

생각을 정리할 때 자주 걷는 집 근처 공원 거리에서
생각을 정리할 때 자주 걷는 집 근처 공원 거리에서

 


“이것좀 먹어봐. 아빠가 얼마 전에 사왔는데….”
“엄마, 나 복숭아 알러지 있어.”
“그래? 왜 엄마 몰랐지…?”
“음… 엄마는 날 정말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석 달 만에 엄마를 만났다. 두어달 전, 나는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단절’을 선언했고, 실제로 한동안 엄마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연락수단을 차단했었다. 내가 굳이 열어둔 작은 퇴로가 있다면, 그건 아빠와의 (전화를 제외한) 카톡 연락 정도. 그러나 엄마와 내가 설정한 아빠라는 휴전선도 이내 먹통이 되었고, 엄마와 아빠에게 비난받는 악몽에 삼 주 정도 시달리다 마지못해 엄마에게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나는 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엄마때문에 힘들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행동이 올바르진 않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제 집을 떠나겠다고. 


그러나 구구절절 구만리의 사연위에 깊은 빡침이 올라오는 자리마다 참을 인을 새기고 또 새기며 눌러 쓴 장문의 답장에, 엄마는 엄마답게 ‘만나서 얘기하자’는 단답을 보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고 또 비벼봐도, 1이 사라진 그 자리엔 어떤 사과의 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 후회했다. 역시 엄마는 엄마였지. 마음의 짐을 덜고자 시작했던 휴전협정의 끝은, 또 다른 상처들로 범벅된 채 다시 악몽에 시달리는 나날들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엄마와 나는 마주앉았다. 우리에겐 극적 화해의 시간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게 엄마는 “밥부터 먹고 얘기해”라며 내 앞에 콩나물 무침이며, 갈치 따위의 ‘엄마가 생각하는 내’가 좋아할 반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폭풍의 눈 앞에 선 고요처럼, 나는 우걱우걱 (심지어는 맛있게) 갈치를 씹었고, 이 상황에서도 밥을 잘 먹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며 엉거주춤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드디어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엄마와 나는 마주앉아 서로의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자신이 한 행동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정도 말은 할 수 있고, 네 반응이 말의 무게에 비해 너무 심했다는게 엄마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은 달랐다. 그간 엄마에게 달라질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었으나, 엄마는 여전히 내게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나를 그저 엄마의 자랑스러운 트로피 정도로 여긴다는게 불쾌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번의 합과 함께 우리의 감정은 고조될대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는 각자의 10살, 20살로 돌아가 서로의 상처가 더 컸다며 언성을 높이며 울어대고야 말았다. 마치,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서로에게 이해해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하지만 놀랍게도 오히려 이 모든 울부짖음 이후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엄마가, 엄마는 내가,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은 완만해진 감정의 능선을 따라, 우리는 우리가 해왔던 오해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엄마의 냉정한 현실인식이 늘 두려웠다. 엄마는 공부를 조금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내가 공부를 못했을 때 살아갈 벼랑끝 삶에 대한 공포를 주입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도, 내가 공황장애 때문에 아프다고 말했을 때도, 엄마의 입에선 걱정 대신 보험료와 연봉이란 단어가 먼저 나왔다. 나는 그게 내내 몹시 서운했다. 어차피 내가 알아서 살아내야 할 현실이지만, 말과 눈빛으로라도 엄마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몰랐다. 그 말을 나눴던 순간 내게 조금의 분노도 비치지 않아서, 심지어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말들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그냥 다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대신 엄마는 그 많은 아픈 말들을 나누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에 어린 무게감 때문에 더 아팠다고 했다. 세상 여느 부모처럼, 내가 늘 끝까지 주장하고 싸우는 대신 포기하고 이해하며 뒤돌아서는 어른으로 커버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고. 



이렇게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살았지만 서로를 너무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한 쪽은 걱정을 끼치지 않게 괜찮은 척 하면서도 마음으로 몰래 피를 흘렸고, 다른 한 쪽은 모질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서로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선처럼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등 뒤에 감춘 채, 우리는 늘 꺼낼 수 있는 자신만 꺼내 서로 앞에 내어놓았다. 가족이라서, 서로라서, 배려하고 도움이 되고 싶어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받고 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리는 서로 앞에 쌓여왔던 얽힌 행간을 푸느라 흘려보냈다. 눈물과 분노가 지나간 자리엔 따뜻한 마음이 어렸고, 그래 너도, 엄마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고 드디어 서로의 삶을 더듬거리며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잔잔해진 마음 위로 어렵사리 평화가 흘러온 뒤, 엄마는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온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건 예쁘게 썰린 복숭아들이었다. 아빠가 시골에 다녀오며 사온 복숭아인데, 너무 맛있어 너 주려고 남겨놨다 오늘 싸왔다고 엄마는 말했다. 해맑게 너를 위해 맛있는 걸 주고 싶었다는 엄마에게, 그러나 나는 복숭아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복숭아를 먹고 난 뒤 몸이 간지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었다고. 그러나 작년 여름 즈음 입술이 부풀고 목이 막히는 알러지 증상이 나타났다고. 그리하여 나는 이제 더이상 복숭아를 참고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엄마는 아이고, 몰랐네, 하며 뒤돌아 다시 복숭아를 꽁꽁 싸 가방에 넣었고, 나는 복숭아를 내온 엄마를 원망하는 대신, 무엇이든 참고 버티려 했던, 복숭아를 삼키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 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무엇이든 알아주길 바라는 대신 조금은 더 말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널 사랑해주진 않는다고. 오히려 사랑한다고, 혹은 미워한다고 말할 줄 알아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거라고. 


엄마가 떠난 뒤 애인이 집에 왔다. 한껏 울어 부푼 내 눈을 안아주고, 지친 하루를 보낸 자신을 위로하듯 잠든 애인을 뒤로한 채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조용히 잠든 애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는 또 우리 위에 복숭아처럼 얽힌 오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엄마처럼 당신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서 더 나다울 수 있는 나여서 고맙다고. 전하지 못한 말들을 이렇게나마 나즈막히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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