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14] 화장을 고치고

2021.09.19 | 조회 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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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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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언제나 이별노래와 잘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이별하지 않았지만 괜히 오래전 이별의 기억들을 꺼내 말려야만 할 것 같은 계절. 밤낮으로 선선해진 날씨처럼 마음도 어느 구석에선가 서늘해지는, 9월입니다. 여러분의 이별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갑자기 궁금해 집니다. 사랑을 끝맺을 때 남긴 상처들을 보듬으며 우리는 긴 세월을 살아갈테죠. 그래서 오늘은 그 흔한 이별노래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글을 읽기 전 아래 링크에 있는 영상을 한 번 봐 주세요! https://youtu.be/kpq1K2vzkl8

 

출처 KBS 유튜브
출처 KBS 유튜브


 

얼마 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가수 왁스가 출연했다. 그 날은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 특집으로 진행됐는데, 2000년대 초반 인기가수들이 그 시절의 모습으로 변신한 채 다시 무대에 서는 콘셉트였다. 채연, 이기찬, BMK 등 쟁쟁한 '그시절 가수들' 사이에서, 왁스는 유독 수줍은 듯 했지만 가장 확실하게 그시절의 모습으로 변신한 채 앉아 있었다. 2000년대 초 유행했던 펄 화장, 금빛 번개머리 가발, 그리고 새하얀 깔맞춤 무대의상까지 장착한 채 말이다. 그리하여 그 시절 화면에서 튀어나온 듯 한 그녀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길 때마다 웃음이 터졌고, 세월이 흐른 만큼 유연해진 그녀 역시 진행자 유희열의 농담을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척척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그녀의 무대. 아마 우리 또래라면 모두가 알 만 한 첫소절, '우연히~ 날 찾아와~ 사랑만 남기고 간 너~'가 시작됐고, 첫 소절이 시작되자 마자 나는 더이상 그녀를 보고 웃을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수천번도 더 불렀을 그녀의 히트곡 '화장을 고치고'지만, 오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첫소절이 마치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즈막히 속삭이듯 지난 사랑의 추억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얼굴에선 2000년대 초반, 이 노래가 가장 많이 불리던 시절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읽혔다.

생각하보면 그 시절 그녀의 노래에선 늘 한국인의 기본 정서라 불리는 '한'이 짙게 느껴졌다.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짖고, 돌아와달라고 애원하며, 내가 잘못했다고 소리치는 그녀의 노래는, 그리하여 그 시절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마음 한 구석에 뜨겁게 데인 이별의 기억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20년 전 '화장을 고치고'에선 그 모든 노래 가사들이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위한 포석으로만 읽혔던 것 같다. 이대로 헤어질 순 없으니,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다시 나를 사랑해 줄 순 없냐고 부르짖는 간절한 외침처럼 말이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 부르는 그녀의 '화장을 고치고'에서는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라는 후렴 클라이막스에 방점이 찍히지 않았다. 외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에선 이제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떠난 너'를 온전히 수용하는 마음이 읽힌다. 그래서일까. <화장을 고치고>를 들으며 처음으로 '아무것도 난 해준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라는 가사에 더 온전히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년 전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선 '미안함'이 상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꺼내드는 카드처럼 느껴졌다면, 20년 후 그녀가 부른 노래 속 '미안함'은 사랑의 이면을 알게 될만큼 성숙한 자신이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내어놓는 정갈한 진심처럼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먼 길을 지나온 후에야 떠난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내가 받았던 사랑의 온기에 더 감사할 수 있게 되는 일. 그 오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성숙한 마음은 결국 두 번의 후렴을 지나 그녀가 부르는 '그땐 너무 어려서 몰랐던 사랑을 이제야 알겠어'라는 가사에서 폭발한다. 이젠 지난 연인을 붙잡고싶은 마음보단 누군가가 선물해 준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절실한 외침. 흐른 세월만큼 성숙해진 그 마음이, 결국 20년만에 다시 듣는 '화장을 고치고'가 내게 주는 여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화장을 고치고'라는 곡은 처음부터 지난 사랑을 붙잡고 싶은 절규에서 끝나는 노래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단지 사랑이란 그저 떠다니는 뭉게구름 같았던 20년 전의 나와 달리, 서른 다섯해 째의 삶 앞에 서니 다시 보이는 '지난 사랑'들이 이 노래에 투사되어 내게 더 큰 울림을 준지도 모를 일이다. 가수도 듣는이도 세월과 함께 성숙해, 똑같은 노래에 위에서도 새로운 감정을 맺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노래가 가진 힘이 아닐까.

 

그리하여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건너온 시간이, 결국 오늘의 이 노래를 새롭게 완성했다. 지나간 옛 노래가 명곡이어서, 또한 부르는 이의 기량이 여전히 심금을 울릴만큼 월등해서 였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랬다면 결국 이 노래도 언젠가처럼 내 마음에 어떤 흔들림도 남기지 못한 채 흘러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2021년 가을, 이 노래는 새롭게 불리고, 새롭게 쓰여, 결국 20년 만에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것들의 의미는 세월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깊고 불타는 감정 대신, 지난 시절을 보듬고 관조할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가지게 된 채 부르는 노래는, 그리하여 누군가의 마음에 새로운 일렁임을 만든다. 자꾸 세월 운운하는 게 어쩐지 한 살 더 먹은 나를 위한 억지스런 위로일지 모르겠으나, 기왕 돌이킬 수 없이 나이를 먹어가는 김에 관조하는 시선으로 여유롭게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괜스레 감상에 젖은 채 오늘 다시 20년 전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꺼내어 들어본다. 여전히 추억 속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친숙하게 들려오는 건 괜한 기분탓일까. 세월이 묻은 그녀의 목소리 덕분에, 아무것도 해준게 없지만 받는 것 만으로도 행복 할 수 있었던, 언젠가의 사랑을 고맙게 추억할 수 있는 밤. 아무래도 센치한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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