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16] 올림픽과 스트릿우먼파이터

2021.09.21 | 조회 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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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아! 이거야!! 아주 오랜만에 '탁'하고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꽂혀버렸습니다. 워낙 많은 프로그램을 보는 관계로 웬만해선 어떤 프로그램에 잘 몰입하지 않는 편인데 일로하는 모니터라는 한계를 내려 놓고 즐길 만 한 콘텐츠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로도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들의 멋진 패배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화면속 멋진 그녀들처럼 더 많이 승리하려고 하기보다, 더 자주 멋지게 패배할 수 있는 삶을 꿈꿔봅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 한발이 되길 빌며.
출처: 스트릿우먼파이터 홈페이지
출처: 스트릿우먼파이터 홈페이지


최근 주변에서 가장 ‘핫’한 반응을 얻고 있는 프로그램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팀의 여성 스트릿 댄스 크루 중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서바이벌인 이 프로그램은, 개성 넘치는 리더들과 팀원들의 매력 덕분에 매 회 새로운 밈들을 탄생시키며 온라인 화제성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 이전에도 ‘댄스배틀’을 주제로 한 경연 프로그램들이 없진 않았으나, <스우파>는 기존 프로그램들과 조금 다른 궤를 보여준다. 바로 ‘승리’보다 더 멋진 ‘패배’의 서사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점이다.

 

물론 <스우파>에 출연한 댄서들 모두 누구보다 더욱 간절하게 승리를 바란다. 자신의 승패가 팀의 탈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하고, 감정이 앞서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과 의미 있는 도전인 것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실수를 이용하지 않고 외려 상대가 제대로 퍼포먼스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거나(아이키vs가비), 배틀에서 이기지 못했던 상대에게 도전장을 내밀며 경연 자체의 퀄리티를 더 높이고(립제이vs피넛), 배틀에서 진 이후에도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허니제이vs리헤이) 모습들에 프로그램의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출처; 엠넷 유튜브
출처; 엠넷 유튜브


이렇게 쌓인 ‘멋진 패배’의 서사는 이들을 ‘진흙탕 싸움’에만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그 누구도 패배자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한다. 결국 누군가는 경쟁에서 패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어떤 수준 이상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최선을 다했다면, 승리도 패배도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적 특성으로 인해 <스우파>는 각 팀을 응원하는 팬덤의 싸움을 조장하는 대신, 이 경연 자체를 즐기는 ‘언더씬 댄서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패배의 서사는 달라진 시대정신에 발맞춘 경연의 새로운 진화과정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열광을 낳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대상의 변화는 이미 지난 올림픽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오직 ‘금메달’에만 목숨 걸지 않았으며, 같은 결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한 패배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모든 경기 내내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여자 배구 대표팀, 마찬가지로 메달 획득엔 실패했으나 끝까지 웃으며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높이뛰기 우상혁 선수 등 결과로는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많은 이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반면 이러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경기에 집중하지 않고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선수나 경쟁 상대국 혹은 경기를 포기한 선수들을 비난하는 중계진들에겐 비난이 쏟아졌다. 사실 그간 올림픽 중계에서는 늘 상대를 무조건 제압하고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이 ‘국룰’에 해당했다. 애국심을 극도로 자극해 무조건 ‘우리 선수’만이 최고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인하는 장이 올림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더이상 올림픽은 ‘나’라는 작은 자아 대신 ‘잘 나가는 우리나라’에 나를 이입할 수 있는 ‘국뽕 전시장’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마음은 같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로서 자신을 증명하라 무조건 요구하는 대신,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스스로 당당하길 바라게 된 것이다.

 

출처: 엠넷 유튜브
출처: 엠넷 유튜브


이러한 ‘서사구조적 변화’로 인해 기존의 서사들은 힘을 잃었다. 사실 예전이라면 <스우파>의 주인공은 유명 아이돌이지만 ‘댄서 세계’에 도전장을 내민 이채연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영웅 서사 속 주인공은 ‘구박과 핍박을 이겨내고 우뚝 설’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나머지는 ‘잘난 병풍’이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상으로 인해 <스우파> 속 승리자는 외려 이전의 ‘병풍들’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이채연의 서사가 올림픽 럭비 대표팀처럼 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진심으로 행복한 도전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틀어졌다면 더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서사와 갈등구조에 함몰된 듯 한 눈물과 토닥임의 연속은 오히려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달라진 세계에 발맞춰 앞으로 ‘경쟁’을 그리는 서사들도 조금씩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무조건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모든걸 다 하는 ‘악바리’를 찾기보다, 내 색깔로 나답게 도전하는 모습 자체를 부각할 수 있도록 게임의 룰과 편집의 서사가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각자를 존중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최선을 다한 패배는 비겁한 승리보다 낫고, 또한 함께 멋진 경기를 만들어 냈다면 패자도 함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잊지 않았을 때에야만 방송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영웅들’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를 압도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즐겁게 경쟁하고, ‘누구보다 잘’하기 보다 ‘내식대로 잘’ 해내기를 바라는 세상. 늘 피곤하기만 한 세상의 변화들에서, 오랜만에 미소지을 만 한 새로운 흐름을 만난 기분이다. 다음 주 <스우파>에선 또 어떤 멋진 패배들이 탄생할까? 부디 끝까지 그녀들의 경쟁이 ‘모두의 승리’로 끝날 수 있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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