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10] 불안과 살아가는 법

2021.09.14 | 조회 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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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위기탈출 넘버원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시나요? 세상 모든 위험요소들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져 '이승탈출 넘버원'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요. 불안장애를 겪고 난 후 제게 세상은 딱 그 모양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상처들도, 아주 작은 위험한 요소들도 모두 제겐 산처럼 크게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약으로 불안을 줄여봐도,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해봐도 또 불안은 언제나 제 존재를 향해 예고없이 강하게 돌진해오곤 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 불안과 살아가는 법. 오늘은 그 '끝나지 않을 공생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아야! 아... 피난다 ㅠㅠ”

 

오늘도 기어이 사단이 났다. 오래된 옷가지와 신발을 버리겠다고 나선 길, 나는 또다시 의류수거함에 손을 긁히고야 말았다. 옆에서 분리수거를 하던 애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괜찮어, 별거 아냐 라며 나를 다독이지만, 내 안에서 한 번 눌린 ‘불안 발작 버튼’은 또다시 나를 끝없는 가능성의 세계로 이끈다. 결국 내 마음 속 불안 화로에 불을 장작이 되어준 건 다름 아닌 ‘파상풍’이란 세글자.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모든 가능성은 그 작은 상처에서부터 기인한 ‘죽음’이란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또다시 숨이 가빠지고, 씻고 또 씻어도 흐르는 피와 함께 내 마음도 아득해진다.

 

약을 끊은 지 3년 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는 습관처럼 불안이 자주 고개를 든다. 약을 먹을 때는 외려 너무 많은 일에 태연하고 느슨해져 문제였는데, 약을 그만두고 나니 예전처럼 더 자주 죽음이란 단어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두곤 한다. 물론 이전처럼 작은 단서들로 촉발된 불안이 과호흡이란 ‘파국’으로 즉각 이어지진 않는다. 불안이 떠오를 때 반대 증거를 수집하고, 호흡을 여러 번 고르고, 또 가까운 지인들에게 합리적인 수준의 판단에 대해 묻는 내 나름의 ‘안전핀’들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땐 항상 불안은 죽음에 이르는 급행열차에 나를 태우고 강제로 출발해 버리곤 한다.

이처럼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하는 과정은 어쩌면 끝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몸에 남은 상처들과 달리, 마음에 새겨진 무언가는, 어딘가에 잠잠히 숨어있다 내가 약해지길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곤 하니 말이다. 약을 먹는다고, 단기 상담을 받는다고 마음의 병들이 씻은 듯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 모든 건 증상으로 인해 불가능해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결국 이 모든 것들과 마주해야 하는 것도,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황금비율’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언제든 떠오를 수 있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 어쩌면 불안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삶의 가르침일 매번 되새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불안은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바꿔놨다. 더 많이 움직일수록 더 자주 내 안에 불안들이 고개를 들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삶의 반경을 더 좁게 설정해 둘 수밖에 없었다. 또, 예기된 불안 때문에 더 많은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는 것도 어려워 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 혼자 안전한 공간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불안에서 자유로웠던 시절처럼 걱정 없이 새롭게 도전하는 일을 하긴 어려워 진게 현실이다. 그러나 불안은 또한 더 많은 불확실한 것들을 포용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예전처럼 완벽하게 컨트롤 되지 않는 내 자신을 인정하는 법도, 또한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일들을 천천히 다시 해보게 만드는 것도 결국 불안이 내가 가르쳐 준 ‘불완전한 삶’이란 ‘참명제’ 덕분이었다.

 

그래서 불안을 시한폭탄처럼 달고 사는 이 삶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내 삶에 거추장스럽게 매달려 있단 수많은 ‘부가물’들을 다 떼어낸 채, 이제야 나는 본래의 나에 더욱 깊이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세상 풍파와 뉴스들, 남들 사는 얘기에서 좀 더 멀어지고 나니 외려 나 홀로 진리를 탐구하는 공부의 시간이 더 즐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더 자주 불편하고, 더 많은 일들에 예민해지곤 하지만, 이 예민한 감각들 덕에 스쳐가는 하루들을 더 자주 붙잡고 곱씹을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즐거움들 덕에, 수많은 불편함들 속에도 나는 이 불안들이 영 밉게 느껴지지많은 않는다. 결국 자주 흔들리더라도, 내 안의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불안도 내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이 생겼으니 말이다.

이렇게 한참 불안의 긍정적 면모에 대해 역설하는 와중에, 새우튀김 김밥의 새우꼬리가 내 입천장을 찔렀다. 으악! 하는 단발비명과 함께 내 머릿속은 또.... 다시 새우꼬리에 찔려 난 상처로 파고드는 각종 바이러스들에 고민하기 시작한다. 멈춰!! 아무리 외쳐도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아 애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생새우는 아니니 괜찮겠지? 하고 묻는 내 질문에 애인은 또 대수롭지 않은 듯 ‘프링글스에 찔리면 피가 철철 나. 괜찮아 프링글스보다 덜 위험해’라고 대꾸한다. 작은 불안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내는 그 덕분에, 잠시 후 진정된 마음과 함께 나는 다시 나의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됐다.

 

결국 이 불안은 혼자 해결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불안을 겪어본, 혹은 그 불안의 크기를 아는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수용받을 때, 그제서야 이 불안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을 스스로 온전히 받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지금 불안하다면, 또한 이 불안이 너무 작고 형편없어 털어놓기 두렵게 느껴진다면, 아무렇지 은 듯 누군가에게 솔직한 나의 불안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길 추천한다. 그렇게 내 마음을 떠난 말들이, 결국 누군가의 품에서 조금은 둥글게 깎여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무게로 돌아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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