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를 맞아 또다시 감기에 걸렸다. 며칠 전 오랜만에 외출을 했더니 몸이 바깥 세상에 나온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사실 환절기만 되면 나는 애써 무언가 해내고자 노력하다 꼭 병이 나곤 한다. 그 무리의 범위는 참으로 다양하다. 아직 다 지나지 않은 계절의 옷들을 전부 꺼내 세탁하고 건조하길 반복하기도 하고, 갑자기 하루종일 밖을 걸어 다니며 온 몸으로 일교차를 만끽하기도 한다. 그러니 탈이 안 나는게 더 이상한 일이지. 준비되지 않은 거대한 일들과 만나면,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 구석은 고장나기 마련이니까.
돌이켜보면 이번 여름도 꽤나 치열했다. 5년 만에 돌아온 올림픽 때문에 매일 밥 먹듯이 야근을 했고, 그러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종종 억눌려있던 불안이 샘솟았다. 쉬는 날 없이 달리다보니 모든 일이 끝난 뒤 내 삶이 갑자기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나는 또다시 무언가를 허겁지겁 해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글들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허망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에 가속도가 붙은 이상, 무엇이든 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기분. 바로 그 기분들이 나를 때로 나아가게도, 또 이렇게 멈추게도 하는 듯 싶었다.
그래서 환절기만 되면 내 세상은 종종 거꾸로 흐른다. 사람들은 선선해진 날씨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차차 자신이 맞이할 새 계절을 준비하지만, 나는 외려 더 자주 이 찬란한 시절들을 홀로 보내곤 한다. 새 계절을 맞아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더이상 스스로를 혹사하지 않도록 침대맡 안온한 곳에 몸을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침대맡에서 보는 하늘은 유독 더 시리고, 오랜만에 나를 찾아주는 많은 이들에게 ‘미안하지만...’이란 답을 더 자주 하게 될 때마다 무언가 정말로 잘못됐다 느끼기도 하는 계절. 내게 환절기란 늘 그런 시기이곤 했다.
쉬어야 된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이 시기를 흘려보내는 일은 늘 어렵다. 계절이 변하면 마치 지난 계절들의 나와도 작별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침대맡에 누워서도 늘 걱정은 한가득이다. 내가 뭔가 더 해내야 하는데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지금 이렇게 보낸 시간들을 언젠간 후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누워서라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언젠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더 강하게 혹사시켰던 적도 있었다. 20대의 나에겐 그럴 시간도 능력도 충분했기에 감기에 걸린 채 운동을 하기도 하고, 또 기침을 참아가며 시험공부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나니 그 모든 치기 어린 행동들의 결과도 고스란히 내가 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결국 지금 조금 멈추지 않으면, 더 큰 시간들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 작은 실패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더 큰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은 수없이 들어도 결국 삶으로 경험해 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종류의 깨달음인 것 같다.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하듯, 이 모든 시간이 주는 교훈들도 결국 내 몸으로 체화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몇 계절의 큰 실패 끝에 나는 이제야 조금은 멈추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극기 대신 자기를 수용하는 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쩌면 서른 다섯 해 정도의 넉넉한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아꼈던 휴가를 내고, 며칠간 나는 스스로를 좀 더 잘 돌봐주기로 했다. 한겨울에나 사먹던 귤을 한 박스 샀고, 좋아하는 향의 차를 우려 머리맡에 두었다. 또,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에는 관심을 일절 두지 않았고, 시답잖은 유머로 피식거리게 만드는 페이지나 우주는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 주장하는 과학 유튜버들의 영상을 돌려보며, 현생의 걱정들과는 잠시 이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침마다 강박적으로 하는 사이클 1시간 운동도 사흘 간 쉬었고, 샐러드만 먹던 저녁식사 대신 전복 누룽지탕을 내게 대접했다. 그렇게 꼬박꼬박 약을 먹고 자기를 며칠간 반복하고 나니, 결국 생각보다 빨리 환절기와 함께 목의 통증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올해도 역시나 감기는 비켜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만큼 조금 더 나를 잘 알게 된 것 같다. 이맘 때 즈음이면 내가 아플테지, 그리고 아플 때 내게 필요한 휴식은 아마도 이런 걸테지 하고 자연스레 스스로를 예상하고 돌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 안 되는 ‘나이듦’이 주는 축복이 아닐까? 20대 때보다 조금 덜 생생하지만, 조금 더 확실히 자신다울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인 듯 싶다. 스스로에게 자신에 대해 묻는 시간은 젊음만큼 생생하게 고통스럽기도 하니 말이다. 나를 조각해내는 고통 대신 자신을 안아 줄 스스로의 안온한 품을 갖게 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서른 다섯 해 째의 환절기가 내게 주는 작은 위로인 듯 싶다.
그리하여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지만, 곧이어 다가올 인생의 가을만큼 더 깊이 스스로다울 수 있기 위한 성장통이었다 생각하면서 침대 위에서 맞이하는 인생의 환절기에도 그렇게 작별을 고한다.
수고했다, 짤막하지만 가장 자기다운 악수를 건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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