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12] 덜 느끼한 사랑 이야기

2021.09.16 | 조회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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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사랑이란 말을 참 자주 입에 올리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뜨거운 여름이 가고 조금씩 가을의 틈새가 보일 즈음이면 뜨겁게 지나간 사랑의 열병을 돌아보는 일이 더 자연스러워 지는지도 모를 일이죠. 사랑이란 말은 늘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사랑이란게 구체성을 띄는 순간 마치 사랑의 신비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굴기도 하죠. 그래서 오늘은 조금 덜 느끼한 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금 더 가까이, 내 삶에 찰싹 붙어있는 사랑의 흔적들을 쫓으며 말이죠.

 

남궁인 작가와 이슬아 작가가 나눈 서간문들을 모아 만든 책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들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이슬아 작가의 솔직한 '남궁인 평가'와 이에 대처하는 남궁인 작가의 능청스러움(?)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대목은 '사랑을 노래하는 그의 느끼함'을 지적하는 이슬아 작가의 항변이었다. 남궁인 작가의 전작 <제법 안온한 날들>을 읽고 난 소회를 밝히며, 이슬아 작가는 '그렇게 느끼한 이인 줄은 몰랐다'며 질색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남궁인 작가마저도 뻔뻔하게(!) 자신의 자아 한켠의 '느궁인'을 인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일이 여기까지 벌어진 이상, 남궁인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슬아 작가의 예방주사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이 느끼한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언어들은 마치 세상에서 처음 발견한 맛을 설명하듯 오묘하고 서툴렀다. 늘 명징하게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 대해 논하는 '응급실 의사'로서의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눈 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달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이슬아 작가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저 분은 정말 신사적인 작가님이로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 사랑노래 다음 파트에 다시 '의궁인'의 정체성을 토대로 쓴 글들이 배치되어 있어 앞선 '느궁인'의 느끼함이 배가되어 돌아왔다는 점이다.

사실 이렇게 웃고 끝내도 될 일이었는데, 돌아보니 나 역시 사랑에 대해 쓸 때마다 한없이 느끼해졌던 것 같다. 세상의 이치와 존재의 허무에 대해 고민하는 'INTJ'로서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느람이'의 모습이 꼭 사랑 이야기를 할 때만 나타난다고 해야할까(이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세 번째 일희일비인 <수박과 당신사이>를 참고하시면 된다). 그리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쓴 지난 사랑이야기들을 들춰보니... 세상에 거기엔 '느궁인'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는 (극혐인) 내가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느끼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대단히 운명적이라거나, 대단히 시적으로 아름답지 않아도 충분히 좋을, 날것의 사랑이야기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느람이 버전으로 얘기하자면 그의 눈빛에 어린 빛이 어쩌구 저쩌구...라고 써야 겠지만, 글쎄 오늘의 내가 애인을 가장 사랑한 순간은 뱃살을 만질 때였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의 뱃살을 만지고 있으면 평온한 마음이 드는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게 그 사람과 내가 지나온 추억거리처럼 느껴진다. 4년 정도 연애를 하고 나니, 뭐 보면 설레는 건 모르겠고(계속 설렌다면 심장내과에 가서 심장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 그냥 별 말 안해도 알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다. 그에게 날것의 나를 다 보여준다거나 막 대하고 싶어진다는 게 아니라, 그저 같이 있으면 별 고민 걱정이 안드는 '평화로운 공존'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요즈음의 사랑은 뭐랄까, 애틋함 쪽으로 점점 기우는 것 같다. 그 애틋하다는 말이 연애 초반처럼 오래 안보면 보고싶어 죽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내는 그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생겼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면 할수록 뭔가 미안한 감정이 드는 법인데(ex. 세상 모든 엄마들), 언젠가부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마음보다 나와 함께 해서 안그래도 힘든 상대의 삶이 더 괴로울까봐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함께 살 집을 찾아보다 문득 '너무 비싸네...'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가 유독 더 짠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불쌍하지만 뭐 어째, 현실은 현실이지. 팩트로 몇대 쥐어 박고는 또 돌아서서 후회한다. 유독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애틋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뱃살과 애틋함 외에도 사랑의 순간들은 여전히 많다. 쇼핑좀 그만 하라고 하는 잔소리가 귓등을 스치는 대신 '내가 정말 그런가?'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 때, 대충 개던 수건을 알려준 대로 정성스럽게 착착 개는 나를 발견할 때, 그리고 몰래 엄마에게 애인이 보낸 거라며 과일바구니 세트를 진상할 때. 어쩌면 '자기 자신'으로 가득차 있는 댐이 붕괴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해 줄 수 있는 '안전핀'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대단히 느끼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도 당신의 뱃살을 만지작대며 <나혼자산다>를 보고 떡볶이를 먹고싶다. 글쎄, 2021년 나의 사랑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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