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9] 결국 순수함이 승리한다

2021.09.14 | 조회 301 |
0
|

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결국 저의 '부서탈출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영 마음이 불편하지많은 않은 건, 결국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겠죠. 어쩐지 햇님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두고 했던 내기가 생각나는 하루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숨겨진 그 어떤 순수함 덕분에 오늘도 제가 흘러가듯 살아내는 이 하루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승리할 수 있는 여러분의 그 순수한 마음을 그리며,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오늘은 기필코 이 부서를 나가고야 말겠어!’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4년 만에 돌아오는 업무 대목인 올림픽 중계가 끝나고 나에게도 번아웃이 찾아왔다. 대다수의 번아웃 환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우주의 분노가 응집돼 폭발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사실 올림픽 기간 내내 꽤 많은 위기가 찾아왔다. 부서끼리 정한 마지노선을 넘나드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 무리한 요구들과 예의는 쌈싸먹은 언행들 때문에 나는 숨쉬듯 화가 났었다. 태생이 라띠노인 나는, 그리하여 올림픽 기간 내내 앵그리버드같은 얼굴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작은 폭발에 그친 건, 그나마 무너져가는 감정의 댐을 손가락 하나로 틀어막으며 ‘일은 해야지...’하고 버텨낸 탓이었다.

그러나 압력이 지속되면 언젠간 터지는 법. 올림픽 폐막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나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열을 내면서까지 원칙을 고수하고 싫은 소릴 해야 되지?’ 물론 영혼 빼고, 시키는 대로 하면 화가 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직함에 ‘PD’라는 두 글자가 매달려 있다는 건, 온에어되는 아주 작은 일부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통제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나는 배워왔다. 그래서 매번 화가 났고,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며 쟤는 참 예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이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내겐 너무 컸으나, 남들에겐 정말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소한 일로 비쳐졌을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출근길, 나는 부장님과 면담을 신청했다. 부장님은 ‘얘는 또 왜 이러지?’ 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왔고, 나는 더이상 그의 측은한 눈빛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애써 사무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건 쉬웠다. 저 혼자 이렇게 원칙과 업무 방향, 책임, 혹은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화내고 열변을 토하는 건 더는 못하겠다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미움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더 이상 시키는 게 맞는 거라는 태도로 일할 수 없노라고. 부서의 화합을 위해, 업무 지시에 충실이 따르는 후배들이 제 자리에 와서 일하는게 맞는 것 같다고.

흔들리는 부장님의 동공을 최대한 멀리하며,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마쳤다. 이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테니, 이제 저를 이 부서에서 내보내 달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이 정도 했으면 더 할 말 없겠지?’ 하며 내심 성공적 의사 표현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부장님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자신이 문제임을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네가 그렇게 명확한 논리로 업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게 자신에겐 꼭 필요하다고. 그래야 자신이 하는 판단들이 더욱 좋아질 수 있다고.

어르고 달래 어떻게든 자리에 앉혀놓고 싶어 할 줄 알았던 부장님의 입에서 책임감이나 미안함 같은 단어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원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한숨을 내쉬며 순수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나의 마음을 걱정해주는 부장님의 모습에서 나는 또 이번 작전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재발 방지 약속’ 정도의 작은 성과에 만족하며 회의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부장님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약하다. 오히려 악에 받쳐 자기 멋대로 주무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덤빌 수 있겠는데, 이렇게 자신의 무른 구석을 내보이며 ‘네가 힘들다면 내 마음을 찔러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어찌할 도리가 없을만큼 무력해진다. 물론 듣기 좋은 말을 술술 풀어내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은, 또한 행동으로 사익 대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 부장님이 보기 드물게 그런 사람이란 것이다.

화내고 악쓰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언제나 승리할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이렇게 자기대로 순수한 중심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것 같다. 물론 빌런들은 사사건건 순수한 이들을 등쳐먹을 궁리를 하며 살겠지만, 결국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한 라띠노들이 목을 걸고 대신 맞서싸우게 하는 것도 순수한 자들이 지닌 능력이 아닐까. 그리하여 결국 나는 유비를 위해 목을 내놓는 관우의 심경으로 또다시 자리에 앉아 부장님 대신 전화통에 불을 뿜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다시 누군가를 움직이게 만드는구나 생각하면서.

물론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학부 4년, 대학원 3년, 도합 7년 간 심리학을 배우면서 깨달은 건, 생각보다 ‘태생’과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의 힘이 세다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면, 내 성격의 큰 줄기는 아마도 바뀌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이익보다 좀 더 큰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말끔한 존경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완벽할 순 없겠지만, 어떤 순수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만큼만이라도 놓치지 않는다면, 결국 나의 이 하루하루의 전투들도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이익들에 묻히지 않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게 다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힘. 이 균형점을 잘 찾아내, 결국엔 나도 좋은 선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직 자기 하나로 가득 찬 사람이 되지 않기를 빌며.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람곰의 일희일비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