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3 수박과 당신사이

2021.09.08 | 조회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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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여름의 행복은 수박에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늘 산더미처럼 쌓인 수박껍질과, 여물지 못한 손 사이를 빠져나간 껍질에 붙은 흔적들 때문에 수박은 늘 저에게 달콤한 죄책감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여름이 두렵지 않아진 것 같습니다. 각자가 잘하는 일을 각자답게 할 수 있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 여름을 다 끝맺기 전, 제가 좋아하는 여름의 순간들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말을 덜어내다보니, 어쩐지 조금은 누군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여름의 끝도 달콤하기를.

 

지난 여름, 함께 여행한 고성의 바다풍경
지난 여름, 함께 여행한 고성의 바다풍경

 

 

슥삭 슥삭. 


두꺼운 수박 껍질이 썰려 거짓말처럼 싱크대 한 구석으로 밀려나는 것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 손과 수박 사이엔 항상 껍질만큼 단단한 벽이 있어 수많은 속살들이 무심히 떨어져나가곤 했는데, 당신과 수박 사이엔 어쩐지 부드럽고 매끄러운 이별만이 툭,툭,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언제나 부러지기 직전까지 버티는 나와, 물 흐르듯 사는 당신 사이의 간극처럼, 썰어놓은 수박의 모양 사이에도 역시 서로 다른 답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껍질에 붙은 살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당신이 샴푸를 다 쓰고 난 뒤에도 통에 붙은 한방울의 흔적까지 희석해 쓰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늘 그 잔여물들 대신 ‘새것’이 주는 향취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더 나은 무언가를 기대했고, 당신은 그렇게 애써 새롭고자 하기 보다 이시간 자신의 삶에 천착했다. 당신에게 이 작은 껍질 속 세계가 결국 꼭 필요한 인고의 시간이었다면, 반대로 내게 수박을 써는 일은 한시바삐 달큼한 속살을 맛보기위한 ‘불필요한 노동’에 불과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과, 거추장스러워하는 사람의 결과물은, 결국 그 마음의 결 만큼이나 달랐다. 


달큰하게 썰린 수박을 한 입 베어물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이토록 다른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가 되었을까? 

 

함께한 고성 여행 사진
함께한 고성 여행 사진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다름을 동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마음에선 ‘오만가지 반짝임들’ 대신 언젠가 거적데기만 걸친 채 고요 속을 거닐고 싶다는 충동이, 반대로 당신의 마음에선 ‘오만 쿨한 것들’을 걸쳤을 지도 모르는, 과거의 다른 내가 만들어냈을 미래의 가능성들이 자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서른 몇해를 살아온 결과물을 깔고 앉아 ‘그냥 이렇게 사는거지’라고 체념하면서도, 짐짓 모른체 하는 곁눈질처럼 서로답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슬며시 숨겨뒀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지런히 썰린 수박들을 멍하니 한참 집어먹다가, 문득 나는 당신에게 통일전망대에 가고싶다고 말했다. 이런 뜬금없는 자기주장은 이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신은 몇 번 지도앱을 휙휙 둘러보다 조용히 내 앞으로 수박 한 알을 밀어놓는다. 평소의 나라면 상대의 결론은 듣기도 전에 차키를 들고 밖을 나섰을 테지만, 당신과 함께 아무 생각없이 스윽, 놓여진 달큼한 과일들을 입에 넣다보면, 어느새 나도 조급할 것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들 어떠하리’라는 블랙홀은 지나치게 힘이 세서, “이럴까?”, “저럴까?” 를 몇 번 주고받다 결국 나는 중력처럼 매트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해야하는 것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해야한다는 그 집착이 존재의 허무일 뿐이라 말하는 당신 속에서 결국 흐릿해지는 순간. 결국 흐느적 대던 나는 ‘공(空)’대신 수박을 우걱거리며, 오늘의 순간을 사는 쪽을 택했다. 


잘려진 수박껍질을 보며 초파리를 걱정하는 당신과, 당신의 등 뒤에서 수박껍질의 그 매끈한 결에 감탄하는 나는, 그리하여 오늘도 이렇게 각자의 우리를 산다. 왜인지 모르지만 여전히 서로가 신기하고, 신기한만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동시에 서로의 중간 어딘가에서 우리가 바삐 만나기를 희망하면서. 아마도 나는 영원히 당신처럼 매끈하게 수박을 자르지 못하겠지만, 당신은 나만큼 빠르고 강렬하게 ‘수박의 존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테지. 그러면 우리는 허허허, 서로의 얼굴에 그려진 감정들 사이를 상상하며 서로의 외연을 넓혀가려 부단히 애쓸것이다. 


부디 10년 뒤 즈음에도 우리가 우리이면서 또 서로일 수 있기를. 그리고 덩달아 꼭 오늘처럼 당신과 수박도 여전히 달콤하게 허무하기를.


우리는 언제 다시 우리의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다시 우리의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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