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헤드폰을 쓴 여인

Story. ⟪앨리스 B 토클라스 자서전⟫ 거트루드 스타인

2023.05.29 | 조회 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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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어줍짢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조금 있었다. 이것은 엄마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니다. 엄마는 학교 과제도 도와주지 못할 정도로 금손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어렴풋이, 이 재주는 아빠에게서 왔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런 재주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갈 일이 많았다. 학교 벽을 장식하는 일이라든지, 연극 무대를 만든다든지 하는. 그런 소소하고 품이 드는 일. 엄마는 내가 그런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다느니 하는 모범생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또 재능 기부?" 

 엄마는 물감 묻은 앞치마를 세탁기에 넣을 때면 귀신같이 달려와 물었다. "당연한 걸 뭘 물어." 라며 세탁실을 나서면 엄마는 뒤에서 혀를 찼다. 

 "자기 값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거야." 

 고작 학교 학예 일에 값은 무슨... 이란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내 그림이 값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해봤자 학생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너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발전이 없는 거야." 

 저녁을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때면 엄마는 사뭇 진지해졌다. 어떤 창작이든, 어떤 예술이든. 그것의 수준 여하를 떠나서 값을 제대로 매기고,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뭐 나한테는 기회를 주는 거기도 하고, 내 그림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 있으면... 그정도도 괜찮은 가격 아니야?"

 엄마는 손가락을 까딱. 고개를 절래. 인상은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네가 싸운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이야. 일종의 부가 수익이지. 있으면 좋지만 최우선은 아닌. 그런 거."

 엄마의 말이 틀렸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반항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놓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 말도 엄마한테는 부가 수익이야? 없어도 무방한?" 

 엄마는 날보며 제법이라는 듯 웃음짓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양볼을 꼬집었다. 

 "일촌 까지는 수익이니 뭐니 따지는 거 아니네요." 

 언제나 그랬듯 엄마의 셈은 정확했다.  


 

 웬일로 '알렉산드리아'에 정시 출근한 D. 그의 손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그만둔 지 오래지만, 액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였기에 D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 잘못한 거 있나요?" 

 내 시선이 이상했는지 D는 짐을 풀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아니라며 눈을 돌리곤 액자에 대해 물었다.

 "아~ 이거요? 샀죠. 샀어. 돈 좀 썼습니다." 

 얼마를 썼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액자 안의 그림은 궁금했기에 상자 푸는 것을 도왔다. 

 "아침에 미술관에 다녀왔는데요." 

 "미술관? D가?"

 "뭐예요? 그 억양은?"

 "억양? 왜에~?" 

 "그렇잖아요. 미술관을? D? 니가? 딱 이런 억양이었잖아요." 

 "곡해하지 말아요. 나 막 겉모습만 보고 교양의 척도를 가늠하거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됐고요. 이거나 봐봐요." 

 D는 박스에서 꽤 큼직한 액자를 꺼냈다. 액자 안에는 분류하자면 현대예술에 속할 것만 같은 작품이 있었다. 

 "어때요? 어마어마하죠?"  

 D는 뿌듯한 표정으로 가까이서, 또 멀리서 그림을 감상했다. 그리고 이걸 어디에 걸면 좋을까 고민하며 알렉산드리아의 벽을 훑기 시작했다. 걸어도 된다 허락한적도 없는데. 

 "그림은 어디서 산거에요?" 

 "기억나요? 저기 길 건너편에 커다란 한옥 하나 있잖아요. 왜 그 고약한 표정으로 문 앞에 앉은 노인분의 집 말이에요." 

 기억한다. 주변의 많은 집들이 빌라나 아파트로 바뀌는 중에도 그 집 만은 옛 한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주인분은 D의 말처럼 언제나 고약한 표정을 지으며 한옥의 수문장 처럼 문 앞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수첩처럼 보이는 작은 노트와 굵은 연필이 들려 있었다. 무언가를 쓰는 듯, 또 그리는 듯. 

 그는 그 앞에서 한낮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기서 이번에 살롱전을 하더라고요. 제목이 <출사표>라나 뭐라나. 미술 애호가인 제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들어가봤죠. 거기서 산 거에요. 잘은 몰라도 왠지 마음에 들더라고요." 

 왠지 모르는 마음. 그것은 예술의 값을 매기는데 중요한 요소다. 어떠한 해석이나 진지한 분석. 그보다 먼저 예술은 '왠지 모르지만 좋아!'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나머지는 그 다음 일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치면 매력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매력이란 것은 취향과도 이어지는 부분이어서 예술의 답은, 또 값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에 샀는데요?" 

 "그게 말이죠... 아... 말해줘도 되나 몰라~" 

 "또, 또! 시간 끈다. 빨리 말해봐요. 얼마에 샀는데요?"

 "들어봐요. 자그마치..."

 "어? 손님 왔다." 

 D는 이번에도 수수께끼를 남기고 손님을 맞으러 갔다. 얼마나 길렀을까. 긴 머리의 손님은 새하얀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헤드폰의 버튼이 있는 자리. 그 버튼을 누르는 손의 자리. 그곳에 채 지우지 못한 물감자국이 선명했다. 아마도 예술가일 것이다. 아직 '출사표'를 던지지 못한.

 


 

- 이름 : 고 가인   

- 기분 : 안절부절.    

- 잃어버린 것 :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렇게 저를 소개하며 다닌지도 십 년이 넘었네요. 처음 예술고를 들어갔을 때. 그 소개가 퍽 마음에 들었어요. 내 이름 앞에 '그림'을 붙일 수 있다는 것에 우쭐한 마음 같은 것도 없지 않았죠. 아니, 그게 전부였어요. 우쭐하고 싶은 마음. 난 평범하지 않아, 난 너희들과 달라. 그런 치기어린 마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년이 지나고, 또 일년이 지날때마다 허영의 공기는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부끄러움이 자리 잡았어요. 주변에 그림 모르는 지인들은 "가인이 아직 그림 하지? 개인전 같은 것도 하는 거아냐?" 라며 천진난만하게 물었고, 그럴 때마다 저는 개인전 티켓이 아닌, "응. 그리고 있지."라는 쓸모없는 말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공모전이며 살롱, 아트 페어, 심지어 블로그나 개인홈페이지까지. 내 그림을 알릴 수 있다면, 그림 그리고 있는 저를 알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박수도, 환호도. 그렇다고 혹평 한 줄도 담지 못한... 텅 빈 액자가 전부였죠. 

 그 사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직업을 구하긴 했지만, 그것을 명함에 적거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어요.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 또한 허영이라며 저를 나무랐지만... 저는 자존심이라며 그 말을 지켰습니다. 다행히 함께 사는 연인만은 저를 이해해주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수식하는 말도, 자신의 값을 매기는 것도. 본인만 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 주변 사람들 말은 신경쓰지 말라고 말이에요. 

 그의 그 말이 어찌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는  "응원해."라는 말과 함께 저를 꼭 안아주곤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그 힘으로 저는 다시 작업실에 들어서곤 했었죠. 

 다행히 그런 그에게, 그의 응원에 보답할만한 일이 생겼어요.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열린 미술전에 저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출사표>라는 누군가의 눈에는 다소 과해보이는 제목의 전시였죠. 하지만 저를 비롯한 아직 세상에 자신을 선보이지 못한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 제목은 가슴 속에서 벼르고 있던 한 장의 카드 같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꼭 참여하고 싶다. 이번에 진짜 나의 출사표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기존의 작품을 다시 낼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죠. 이곳에 걸릴 나의 그림은 지금까지의 나. 그림 그리는 나의 삶을 모두 담아낸 것이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생을 모두 포기한 사람처럼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나랑도 좀 놀아주지..." 라는 그의 애교어린 핀잔도 애써 무시했죠.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고, 전시는 시작되었어요. 크지 않은 장소인데다 주최자 어르신께서 가능하면 많은 이의 출사표를 받고 싶다는 생각에 작가마다 한 작품만 걸 수 있었어요. 그렇게 저와 다르지 않은 명함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 전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총알을 장전해 한 발! 신중히 방아쇠를 당겼죠.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내가 쏜 총알이 어디에 박힐지. 무엇을 폭파시킬지. 저와 그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어요. 

 제발 내 작품을 알아봐주세요. 당신들은 예술 좀 한다는 사람들이잖아요? 제발. 내 작품을 봐주세요. 물감 묻은 손가락을 모아 기도하 듯. 결과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아, 어렵네요. 어려워."

 의뢰를 정리하며 D가 말했다. 손님은 정말이지 어려운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었다. 

 "D라면 어떻게 할거에요?"

 "저요? 저라면 판다." 

 "어떤 가격에?"

  "아... 그게 문제네요. 팔긴 팔건데... " 

 D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답을 피해갔다. 손님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가는 시점에 작품의 구매를 의뢰한 사람이 있었다. 단 한 명에 불과했지만. 게다가 구매자는 작품의 가격을 3분의 1로 낮춰줄 수 없냐 문의했다고 한다. 손님은 처음엔 무조건 오케이를 외쳤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동반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인아. 네 작품의 가격은 네가 스스로 매긴 것이잖아. 그 값을 흥정하는 건 말도 안되는 거야. 네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이를 기다리자. 그래야만 해." 

 "손님의 남친이 그렇게 느끼하게 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느끼... 했어요? 아무튼. 전 남친의 말도 일리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의 가격이란 거는 종이나 액자값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간에 어느정도 조율을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손님의 경우에는 너무 차이가 많으니까. 그 작품이 팔려도 그만큼의 가치 밖에 쓰이지 못할 것 같아요." 

 D와 손님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 일리가 있어서 손님의 고민이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손님에게 필요한 완벽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것이면 손님도 만족하지 않을까?  마티스와 거트루드 스타인의 이야기 정도면 말이다. 

 "이번엔 또 어디에요?"

 D는 자연스레 캐리어를 건네며 물었다. 

 "뭐 가볍게 파리 정도~? 이번엔 같이 갈래요?"

 "저도 데리고 가주시는 거예요? 황송하기 그지없게!?" 

 "자꾸 그렇게 느끼하게 오버하면 맘 변합니다?" 

 "어서 출발하시죠. 낭만의 도시, 파리로~"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 이 길은 일찍이 실비아 비치가 서점을 낸 길이고, 가난뱅이 헤밍웨이가 아내와 함께 전 재산을 쏟아 저녁에 마실 와인을 사서 돌아간 길이다. 피츠제럴드도, 콜 포터도, 장 콕토도, 피카소를 필두로한 젊은 화가들도 이 길을 걸었다. 그들의 발길은 저마다 달랐지만 공통으로 들르던 거점이 있었다. 자정을 넘은 시간에는 무도회장이 그곳이었고, 아직 정신이 멀쩡한 시간에는 파리 예술계의 대모. 스타인 여사가 살던 집과 살롱, 플로뢰스가 27번지가 그곳이었다. 나도 그 길을 걷는다. 무수히 교차했던 예술의 걸음들. 그 걸음의 종점이었던 그곳을 향해 걷는다.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었던 앨리스의 자서전을 쓴다는 핑계로 자신의 자서전을 썼던 책. <거트루드 스타인이 쓴 앨리스 B.토클라스 자서전>을 들고서.

거트루드 스타인. 그에게는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사는 삶이 예고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업을 들어도 의학에서는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건 직업일뿐이라며. 아름다움이고 예술이고 하는 것은 취미생활에서 즐기면 그만이라고. 거트루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길 바랐다.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예술이 놓여 있길 바랐다. 그래서 거트루드는 그보다 먼저 같은 결심을 한 오빠를 따라 파리로 향했다. 세상 모든 예술가들이 모이던 그곳에 도착했다.

스타인 남매는 그림을 사랑했지만 직접 작품을 완성할만한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화랑보다도 뛰어난 감식안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매일 미술관과 전시회를 찾았다. 그리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그건 그들의 수중에 돈이 많지 않은 원인도 있었지만, 가장 현대의 예술. 동시대의 아름다움을 찾고 싶었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살롱도톤전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모인 그 전시에는 그림 좀 본다는 이들의 눈도 잔뜩이었다. 거트루드는 이 전시에서 다른 어떤 작품보다 뛰어난 한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데. <모자를 쓴 여인>이라는 제목의 초상화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거트루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작품에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과격한 이는 그림을 찢어버리라며 소리를 지르기 까지 했다. 거트루드는 그들이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그 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것은 기다란 얼굴에 부채를 든 여인의 초상화였다. 그것은 해부학적으로나 색채적으로는 매우 이상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오빠는 초록 잔디밭 위의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초상화를 사고 싶어 했다. 평소처럼 그 둘은 한꺼번에 두 점을 사고자 결정했고 가격을 문의하기 위해서 살롱전 사무국으로 갔다."

<모자를 쓴 여인>의 주인 마티스는 이 소식을 바로 알지 못했다. 다른 화가들이 전시회에 오래 머물던 것과 달리, 마티스는 개막날을 제외하곤 그곳을 찾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이 손가락질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에 그는 너무 여린 예술가였다. 그래서 사무국은 마티스의 그림을 사고자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편으로 알릴 수 밖에 없었다. 예술가들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가난한 마티스가 사는 언덕의 아파트까지, 우체부는 힘겹게 편지를 안고 올라갔다.

"앙리, 당신의 그림을 사고자 하는 이가 나타났소! 그런데 당신이 제시한 5백 프랑에서 가격을 조금 낮춰야 할 것 같소만. 어떻습니까?"

마티스는 사무국에서 보낸 우편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살롱도톤 개막전에 갔을 때, 보지 않았던가. 자신의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수없이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그런데 그 작품을 사고자 하는 이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물론 더 믿기지 않는 것은 서른 다섯이 되고도 아직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리지 못한 자신의 처지 였지만 말이다.

마티스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곧장 작품을 팔겠다는 의사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막는 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모자를 쓴 여인>의 모델이자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였다. 아멜리는 '기타를 들고 있는 집시풍의 부인'의 모델을 하려 들고 있던 기타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어림없어요. 그 그림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당신이 매긴 가격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을 거예요. 작품의 가치를 내리면 안돼요, 앙리."

마티스는 번민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온 손님처럼 번민했다. 화가의 명함에 작품 판매 목록을 적어 넣고 싶었다. 가격은 그 목록에 아주 작게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반절의 진심이었다. 그림의 가격. 앙리가 매긴 그 값은 자신이 생각한 최소한의 가치였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 그림은 더 높은 값을 받아도 충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활인으로서,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자아는 예술가의 자아와 언제나 충돌하는 법이었다. 지금도 이미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바엔 자존심을 조금 놓는 편이 나아보였다. 물론 아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생미셸에서 약간 떨어진 강둑 위 아파트. 마티스는 그곳의 꼭대기 층에 거주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망은 좋았다. 노트르담 성당과 센강이 내려다보이는 곳. 현실 생활을 하기엔 너무 높아 고생스러운 곳이었지만 에술가의 눈을 즐겁게 하기엔 좋은. 말하자면 마티스의 생과 비슷한 곳이었다. 그림의 값을 낮출 수 없다고 알린 뒤, 마티스는 그곳에서 초조한 손길로 붓을 들었다.

'이대로 구입을 포기하면 어떡하지... 혹평 일색이던 그림을 또 찾는 이는 없을텐데... 그러면 이번 달 생활비는, 아이들의 낡은 옷은 어떡하지.'

마티스의 초조한 모습과 달리 그림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내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팔리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듯. 혹은 팔리지 않을리 없다는 듯. 그녀는 평온했다. 그런 상반된 작업실의 공기를 바꾼 것은 우편배달부가 누른 벨소리였다. 여전히 마티스의 집은 외진 곳이었기에 우편배달부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우편 왔습니다."

마티스는 급히 속달 우편을 뜯었다. 지금 그에게 오는 우편이라면 밀린 공과금에 관련된 것이거나 전시회 사무국으로부터의 소식일 것이다. 마티스는 우편 속 편지를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 언제나 당당하던 아멜리 역시 최악의 사태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물었다.

 


 

가인 님에게.

 

아내의 물음에 대해 마티스는 어떤 대답을 전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 작품을 샀다는군."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한 아멜리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고 하죠.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인상을 써요. 날 겁주려고 하는 거예요?"

사실 그건 아멜리의 오해였습니다. 마티스는 그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목이 메었고, 아내에게 이 기쁜 소식을 말로 전할길이 없자 윙크한 것이었으니까요. 마티스는 그림 실력에 비해 윙크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마티스와 그의 그림의 첫 구매자로 인연이 된 거트루드 스타인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같은 고민을 하는 가인 님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마티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긍정의 우연이 몇 겹은 겹쳐져야 일어나는 그런 일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한 도박은 마티스 정도는 되어야 배팅할 수 있는 것이라며, 나는 절대 안된다며 되려 겁을 먹고 두어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요. 현실이라는 건조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란 판돈을 거머쥐기 위한 도박. 그것을 위해 온힘을 내던지는 그런 일 아닌가요.

그러니 가인님이 선 그 세계에서 적당한 타협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런 스산한 자리 옆에 당신을 믿어주는. 당신의 값을 지지하는 이가 있다는 건. 그런 한 사람의 응원과 마티스의 이야기. 저는 그것이 가인 님에게 행운의 부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행운을 동력 삼아 한 번 걸어보시길 권해드려 봅니다. 당신이 쏟은 지난 날의 시간, 천만 번의 붓질, 수 천의 좌절과 딱 그만큼의 계단을 올라선 당신의 현재를 걸어보시길 권해드려 봅니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의 값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좋은 눈을 가진 이를 만날 것입니다. 그 언젠가 제가 서 있는 이곳. 파리의 언덕에 살던 마티스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유실물 보관소>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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