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쓸모없는 날개의 자리

Story. 돈키호테

2023.04.23 | 조회 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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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늦으셨네요?" 책장을 정리하며 D가 말했다. 늦었다는 말에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 삼 분. 정오를 기준으로 한다면 삼 분이 늦은 셈이고, 한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오십칠 분. 빨랐다. 늦었다고 말하는 D를 보니 그의 기준은 최소한 열두 시 삼 분보다 빨랐을 것이다.

 "왜 멀뚱히 서 계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생각을 하느라 입구서 멍하게 멈춰 선 나를 향해 D가 말했다. 명령받은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카운터 겸 책상으로 향한다.

 "빨리 왔네요?"

 "사장님 보다는요."

 그랬다. D의 기준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보다 빨리 오면 빠른 것이고, 반대라면 늦은 것이다. 참 셈하기 편한 성격. 어쩌면 그래서 박봉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D란 아이는.

 <유실물 보관소, 알렉산드리아>에는 특별한 출근 시간도 퇴근 시간도 없다. 그저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을 때 오면 그만이고, 정리가 다 됐다 싶으면 퇴근해도 무방했다. 파격이라면 파격이라 볼 수 있는 이 근무조건을 보고 처음엔 꽤 많은 이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D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나친 자유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한 사람은 당연히 D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을 편하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D는 놀랍도록 자유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아이였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죠."

 "여기 오기 전에는 어떤 일 했어요?"

 "이것저것 했죠."

 "이것저것? 어떤 거?"

 "그냥 있잖아요. 그런 거."

 "그런 거 뭐?"

 " 어? 손님 왔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하기 싫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D는 늘 능숙히 해냈다. 성능 좋은 날개를 타고 나, 여기저기 휙휙 날아다니는 생명체처럼.

 "어서 오세요.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고 싶으시다면 여기 서가에서 편하게 찾아보세요. 여기 Y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어서 분류 기호 같은 건 없지만, 여기쯤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걸으면 보통 거기에 찾는 게 있으니까요. 편하게 돌아보세요."

 "만약에 찾고 싶은 게 없으면요?"

 그럴 땐, 편지를 남기면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찾고 싶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나중에. 남기면 된다. 그러면 나와 D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찾아 준다. 그게 어디에 있든지.


 

- 이름 : 고 연희 

- 기분 : 4시간 마다 변함

- 잃어버린 것 : 

 어제, 회사에 들어온 지 일 년 남짓 지난 팀원이 퇴사했어요. 딱히 그 친구와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팀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마지막 날, 점심을 함께했죠. 사실 이름 말고는 사는 곳도, 나이도 정확히 몰랐어요. 그저 MZ겠거니... 넘겨짚을 뿐이었죠. 말주변 없는 나의 피상적인 질문이 지겨웠는지 그 친구가 물었어요. 일하는 거 재밌으시냐고. 

 당돌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말 그대로 꼰대가 된 것이겠죠. 물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다만, 그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답은?"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내 대답은 뭘까. 일? 당연히 재미없지. 그러면 왜 하는 거예요? 글쎄. 돈 벌어야 하니까. 해왔던 게 이거고, 할 줄 아는 게 이거니까. 그냥 하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 당연한 거까진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 맞아. 당연한 거까진 아니지. 그래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하잖아? 센 강의 다락방이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한때뿐이라고 하잖아.

 "재미없으시구나. 저도 그래요. 그래서 일찌감치 그만 하려는 거에요. 팀장님은 이해 못 하실 거예요. 겁도 없고 철도 없다 생각하실 거에요. 맞아요. 철 같은 거 없어요. 그런데 겁은 진짜 많아요. 그래서 그만하려는 거기도 해요."

 팀원의 말에 제 머릿 속에는 또 다른 물음표가 떠버렸어요.

 "겁이 많은데 그만둔다고? 이건 마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자이로드롭 타려는 거에요. 라고 말하는 거랑 다른 게 없잖아?"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때쯤, 그 친구가 말했죠.

 "잘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오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살아야 한다니... 너무 겁나는 거 있죠. 소름, 소름!!"

 그렇게 연속으로 펀치를 얻어맞으며 식사 자리를 마쳤죠. 그날부터였어요. 갑자기 겁이 난 건. 이대로. 지금처럼 그대로. 재밌냐는 질문에 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아도 괜찮은 걸까? 겁이 났어요. 그래서 책도 보고 강연도 가보고 했지만... 다들 자아인지 뭔지를 찾아가라고는 하는데. 공허하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왜 아니겠어요. 새로운 도전이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서 성공하는 거... 그건 엄청 대단한 사람들의 성공담일 뿐이잖아요. 전 잡스도 저커버그도, 머스크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찾고 싶었어요. 나보다 평범한 사람이 길을 벗어나고도 잘살고 있는 이야기를.

 그런데 진짜. 그런 게 있기는 할까요.


 

  "꽤 까다롭네요?"

 D의 말처럼 이번에 의뢰받은 잃어버린 이야기는 꽤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세상 평범하고 널렸을 것 같은 이야기지만, 조건 하나만 달리해도 특별한 이야기의 카테고리에 들어설 때가 있다. 이 경우엔 이야기의 주연이 아주 평범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평범한 주인공이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렇다면 찾으러 갈 수밖에.

 "찾았다! 사장님. 이건 어때요? 딱 맞는 거 같은데?"

 "Y, 이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어때요? 한 번 봐봐요."

 "아니야. 그거. 거기 그대로 둬요."

 "아니, 그게 아니고. 한 번 봐봐요. 평범한 주인공인데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성공하잖아요. 이거 딱이지 않아요?

 D는 <유실물 보관소, 알렉산드리아>의 일을 늘 능숙하게 해냈다. 성능 좋은 날개를 타고 나, 여기저기 휙휙 날아다니는 생명체처럼. 다만, 눈치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또, 여행 가려고 그러시는 거죠? 남의 사연으로 그렇게 사리사욕을 채우시면 어떡해요?"

 "D."

 "네?"

 "내 맘이야."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할 수 없이. 여행을 떠난다.

.

.

.

 "할 수 없지 않잖아요! Y! Y!!


 

 스페인의 옛 수도. 톨레도. 옛 수도답게 현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으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의 나이가 세 자리를 넘는다. 그 오래됨에 매료된 이들은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역시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스페인 기행>이라는 담담한 제목의 기행문을 남기며 이곳에 긴 시간을 할애하는데, 그건 아마도 이곳에 어느 이름난 기사가 있기 때문이리라. 조르바라 이름 붙여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기사. 돈키호테가 말이다.

 돈키호테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독자는 물론, 작품을 지은 세르반테스도. 심지어 돈키호테 자신도 그 이름을 헷갈렸으니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이름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 돈키호테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나 지어 붙일 수 있는 본명보다는 "기사"라는 이름의 명예였다.

 라만차 지역에 위치한 톨레도는 세르반테스가 정확히 점찍어 둔 것은 아니지만 돈키호테의 도시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도시 중 하나라는 표현을 해야 하는 이유는 돈키호테가 너무나 왕성한 활동으로 스페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라만차나 톨레도 같은 내륙 지방도 있었지만, 바닷길을 사이에 둔 지역, 혹은 그곳에 둥둥 떠 있는 섬이 무대인 경우도 많았다. 이제 막 도착한 바라토리아 섬 역시 그중 하나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라토리아 섬은 실제 있는 지역은 아니다. 그렇기에 스페인의 아무 한가한 섬에 가서 이렇게 말해도 무방하다.

 "이곳이 바라토리아 섬의 모델이 된 섬이군."

 <돈키호테> 속 대부분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우나 고우나 돈키호테다. 그가 허황된 돌진을 할 때도, 노쇠란 병에 걸려 침대맡에 누워야 했을 때도, 때론 정말 영웅 같은 기사도를 발휘할 때도. 이 작품의 주인은 돈키호테다. 하지만 바라토리아 섬을 배경을 한 에피소드에서 그는 기꺼이 주인의 자리를 아주 평범한 하인 산초에게 넘긴다.

 산초는 우연한 기회로 이 섬의 총독직을 맡게 된다. 그건 돈키호테와의 모험을 결심하기 전부터 그가 꿈꿔온 꿈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섬의 총독이 되어 섬을 잘 관리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말이다. 그런 총독으로서의 시간을 보내던 산초는 그것이 진짜 자신이 원한 삶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총독이 갖는 모든 명예를 내려둔 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향해 질주한다. 다시 시작하는 그 길에서 산초는 자신이 총애하는 당나귀 잿빛을 끌어안고 말한다.

 "예전에 너와 고생길을 같이 하는 동안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 하지만 너를 버리고 야망과 오만의 탑 위에 오르고 나니, 내 마음속은 수천의 불안과 비참함으로 가득 찼어. 진심 내가 잘 못했구나. 네덜란드산 이불을 덮고, 검은담비 옷을 입으면 뭐 하겠느냐. 코르도바 가죽 구두를 신고 멋쟁이가 된다 한들 뭐하겠느냔 말이야. 차라리 새끼 양가죽 옷을 입은 채 겨울을 나고, 여름이면 떡갈나무 아래서 한잠 늘어지면 그만이지. 그보다 더 길게 다리를 뻗을 방법은 없지 않겠냔 말이야."

 산초는 총독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잿빛에게 다시 돌아옴으로써, 허름하지만 성능 하나는 끝내주는. 자유라는 이름의 날개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 날개의 힘을 빌려 바라 토리와 섬을 떠나려 한다.

 그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산초는 새로운 여정의 초입에서 과거 알고 지낸 무어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짭조름한 고기 안주 하몽과 잘 익은 포도주를 대접받는다.

 이것을 두고 누군가는 초심자의 행운이라 말할 테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남쪽으로 향할 때, 바람은 곧잘 남쪽으로 불곤 한다." 고 말이다.


 

 고연희 님에게.

 연희 님. 저는 지금 스페인의 어느 섬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섬의 이름은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겠지만 저는 바라토리아라 부르려 합니다. 이 섬에서 톨레도로 돌아가기까지. 저는 수없는 바람을 맞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초면이라는 듯 새로운 얼굴로 인사하며 지나가겠죠. 다만 바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내가 가는 길. 그 방향을 동행해 줄 바람이 불어와 주길. 바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바람은 대부분 어긋날 테죠. 하지만 또 가끔은. 우리들 말로 해보자면."진짜 못 해 먹겠네." 싶을 정도가 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를 달래기 위해 남쪽의 바람이 불어올 겁니다. 새 여정에 배가 곯은 산초에게 하몽 한 덩어리가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죠. 이곳에서 찾은 이야기는 이렇게나 희망적입니다. 총독 산초가 아닌, 시골 마을의 평범한 농부에게도 이렇게나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믿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바람이 불어, 내 등을 사뿐. 밀어주리라는 것을.

 

- <알렉산드리아, 유실물 보관소>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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