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진아웃

Story. 모비딕

2023.04.24 | 조회 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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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청경채 볶음. 나에게 있어 이 음식은 실패의 상징이다. 단 한 번도 맛있게 완성해본 적이 없다. 엄마는 그렇게나 잘 만들었는데 말이다.

 집 밖의 작은 텃밭에서 쉽게 뜯어 먹을 수 있는 채소를 기르던 엄마. 그런 엄마가 가장 아끼던 것이 청경채다. 지나치게 평범한 모습이 좋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이유로 청경채 요리는 우리 집 단골 메뉴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엄마가 가장 자주 해주었던 것은 청경채 볶음인데, 정말 청경채 말고는 어떤 부재료도 들어가지 않고, 소금과 약간의 굴 소스만 넣을 뿐이었다.

 어린애들이 그렇듯 나에게도 그 요리는 그리 달가운 반찬이 아니었다.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평범한 나의 동족을 잡아먹는 기분이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청경채를 먹었다.

 한번은 엄마가 이야기를 찾는 여행을 떠났을 때다. 그건 엄마로서도 버거운 의뢰였는지 여행의 시간이 몹시 길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부재하자 이상하게도 청경채 볶음을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 엄마, 청경채 볶음. 

 - 먹고 싶어.

 그러자 엄마는 이틀이 지날 때쯤 답장을 보내왔다.

 - 기름, 센 불, 청경채, 달달, 소금, 솔솔, 굴 소스, 찍, 또 달달, 계속 센 불.

 작가 줄리언 반스는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라는 에세이에서 시중의 수많은 요리책에 대한 불만을 성토한 적이 있다. 도무지 따라 하기 어려운 재료들을 내세우는 것도 화가나는데, 정작 적혀있는 레시피는 수학 공식처럼 복잡하거나 점성술사의 예언처럼 두루뭉술한 요리법이 전부라는 것이다. 엄마의 문자를 받던 내 기분 또한 그랬다.

 "또 저따위 레시피라니." 


 

 "그래서 청경채 볶음은 성공했어요?"

 D가 물었다.

 "아니. 레시피에 무슨 저주라도 걸렸는지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 반쯤은 포기, 포기!"

 "남은 반은요?"

 남은 반. 그건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 엄마는 문자의 끝에 이렇게 썼다. 어차피 네가 하면 맛없을 거야. 두어 번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어느 만화에선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고 했지만, 엄마는 손에 쥔 포도를 놓을 줄 알아야 더 큼지막한 포도를 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믿는 쪽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엄마들과 다르게, 내게 포기하는 법을 먼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머리론 이해해도 가슴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생기는 법이다. 청경채 볶음 같은...

 "그건 그렇고. 의뢰 들어온 건 없었어요?"

 "와 대박. 나 오늘 국가대표 투수를 봤잖아요."

 "국가대표 투수?"

 "그렇다니까요. 갑자기 들어와서는 찾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사인받을 종이를 갖다 바쳤죠!"

 "... 의뢰 신청서가 아니고?"

 "물론, 그것도 줬고요."

 "그럼, 들어봅시다. 국가대표 투수가 찾는 이야기가 뭔지."


 

- 이름 : 오다인

- 기분 : 불안.

- 잃어버린 것 :

 국가대표 오다인 입니다. 이 이름을 등에 달고 다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 없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투수가. 그것도 국가대표 투수가 아웃 잡을 수 있는 공을 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얼굴 옆으로 날아가는 공에 맨손을 뻗었고, 상대는 아웃되었습니다. 지금도 아쉬워하는 상대 타자의 표정이 보입니다. 저는 허탈해하는 상대의  표정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리 웃으려 해도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아팠으니까요.

 야구에 관심이 있다면 기억나실 겁니다. "국가대표 투수 오다인. 왼손 부상!!" 그날. 공과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긴 했지만, 맨손으로 잡는 바람에 손목과 손가락에 큰 무리가 왔습니다. 시즌 절반을 그대로 날릴 정도의 부상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부상이란 건. 선수에게는 필연적인 거니까.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복을 마치고 팀에 돌아온 제게 코치가 말하더군요.

 "이제 선발은 좀 무리겠는걸?"

 처음엔 어디 다른 선수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 얘기더군요. 저도 압니다. 부상에서는 회복되었지만, 구속이 10km 떨어졌고, 커브가 예전처럼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요. 하지만 일시적인 겁니다.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조금만 더 재활하고 연습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코치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고개를 젓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 다인아. 너 이제 서른넷이야. 백 개씩 던지는 거. 이제 못해." 

 코치는 새삼스레 제 나이를 들먹이고는 제게 마무리 투수로 가보자 말하며 등을 툭.

 등 뒤의 제 이름을 툭. 치고 연습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더그아웃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던졌는지 모릅니다. 세보진 않았지만 백 개는 넘었을 겁니다. 중학생 야구부도 칠만한 공을. 백 개도 넘게 던졌습니다. 그 공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포기하라고.

 어떡할까요. 좀 찾아주십쇼. 지금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빌린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있다 보면 그 의자가 내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건 그저 빌린 것일 뿐이고, 언젠간 돌려주어야 하는 것임에도. 그런 착각을 하곤 한다. 오늘 온 손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때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던 의자에 앉은 후, 긴 시간 한 번도 그 의자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종점을 알리는 열차의 안내방송은 내가 내릴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울리곤 한다.

 "오다인 선수. 정말 잘 던졌는데 말이죠."

 "과거형으로 말하네요?"

 "사연 보면 알겠지만, 그 부상 엄청 컸거든요. 선수로서는 나이도 꽤 있는 편이라 팬들도 재기는 무리라 생각하긴 했어요." 

 "본인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왜 아니겠어요. 국가대표까지 한 선수인데. 포기하기 싫겠죠."

 "... 내릴 역에 다 왔는데도?"

 "네?"

 "아니에요. 잠깐 다녀올게요."

 "어딜요?"

 "이야기 찾으러 잠깐. 태평양에."

 "태평양... 이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선물한 뒤, 인간의 역사는 불과 빛을 좇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그 집착이 너무 심해져 불이 될 무기를 만들기도 했고, 빛을 위해 고래를 죽이기도 했다. 빛을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인간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산속 나무부터 마른 풀과 잎사귀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그러다 인간은 드넓은 바다에서 고래를 발견했고, 고래의 몸속에 빛이 될 기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사냥. 끝없는 사냥이 이어졌다. 빛은 곧 돈이었고, 빛을 낼 기름을 품고 수영하는 고래의 집. 태평양은 황금의 바다였다. 그리고 그곳에 피쿼드호가 있었다. 에이해브 선장과 스타벅 항해사가 이끄는 위대한 포경선이 있었다.

 피쿼드 호는 어떤 포경선보다 고래를 많이 잡았고, 고래기름이 흐르는 배는 언제나 질퍽했다. 포경선을 동경해 이 배에 오른 초보 선원 이스마엘은 배에 오르고 소문 무성한 이스마엘 선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에이해브는 좋은 남자야. 우리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지. 물론 에이해브가 상냥한 인간이란 건 아니야. 특히 지난번 귀항했을 때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지. 하지만 그건 그의 다리 통증 때문이었어. 지난번 항해 때, 선장은 저주받은 고래한테 다리를 잃었거든. 그때부터 그가 침울해진 것도 사실이야. 때로는 난폭해지기도 했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다시 말하지만, 에이허브는 나름대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라네!"

 동료 뱃사람들의 말처럼 에이해브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대한 향유고래와의 싸움에서 다리를 잃은 뒤,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것을 치유하고자. 그래서 영원해야만 하는 선장의 키를 쥐고자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선원들은 전보다 더 괴팍하고 거칠게 항해하는 그를 보며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에이해브에게 그런 시선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태평양 어딘가에서 유유히 수영하고 있을 향유고래. 자기 다리를 먹어 치운 그 고래를 향해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라 말했고, 또 누군가는 광기. 혹은 비생산적 집착이라 말했다.

 에이해브와 피쿼드호. 그리고 선원들은 의지와 광기. 집착을 싣고 항해를 이어갔다. 

 "낡은 돛대여, 우리는 함께 늙어간다. 하지만 나의 배어, 너와 나의 몸은 아직 튼튼하지 않은가? 다리 하나가 없을 뿐이지."

 에이해브는 그렇게 믿었다. 늙고 다리마저 잃었지만, 여전히 튼튼하다 믿었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늙고 다리를 잃었다는 것은 튼튼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는 믿음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이성적인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고귀한 영혼과 위대한 정신이여. 그 가증스러운 고래를 왜 추적하는 겁니까. 저와 함께 돌아갑시다. 이 치명적인 바다에서 도망치는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선장님은 늘그막에 얻은 처자식을 다정한 아버지처럼 깊이 사랑하고 간절히 보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갑시다! 돌아갑시다! 지금 당장 진로를 바꾸게 해주십시오."

 포기를 권하는 스타벅의 간절한 요청. 하지만 에이해브에게 배를 멈출 닻은 다리와 함께 잃은 지 오래였고, 오래된 나침반은 오직 한 곳. 모비 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해브는 끝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이 자신의 날개를 태울 불꽃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몸을 바치는 나방처럼. 모비 딕을 향해 돛을 펼쳤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이랬다.

"소용돌이가 원을 그리며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보트와 그곳의 선원들. 물 위를 떠도는 노와 작살까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그 안으로 끌어들여 뱅글뱅글 돌면서 '피쿼드'호의 나뭇조각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삼켜버렸다."


 

오다인 님에게.

 다인 님. 혹시 태평양 바다를 마주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곳은 너무 넓어 자유롭지만, 그래서 또 두렵기도 한 곳입니다. 과거, 뱃사람들은 돈이 되는 고래기름을 찾기 위해 끝없이 이곳에 배를 띄웠고, 싸웠고, 죽었습니다.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죠.

 <모비 딕>에서 보여준 에이해브 선장의 의지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 초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포기를 선택하는 의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포기하는 건. 꺾여버리는 건. 가치가 없다고. 인생의 책에는 "장렬히 "같은 단어 하나쯤 쓰여 있어야 한다고.

다인 님도 아마 그렇겠죠. 팔 하나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내 삶의 전장 위에서 쓰러지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마치 에이해브 선장처럼.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라고 외치던 에이해브 선장처럼.

 하지만 포기하는 것을 포기한 선장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죽음, 피쿼드 호의 죽음, 선원들의 죽음, 그리고 남은 가족의 눈물. 그것이 전부입니다. 만약 그가 포기를 선택할 숭고한 의지를 가진 이였다면 어땠을까요? 최소한. 그의 가족은 항구로 들어서는 피쿼드 호에 손을 흔들었을 것이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에이해브 선장의 두 팔에 안겼을 것입니다.

 저는 이쪽이 더 "장렬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쪽이 더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 <알렉산드리아, 유실물 보관소>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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