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두 가지를 꼽는다.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다. 둘 다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 상황이 자신에 일이라면 그리 재미있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특히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 일이라면 재미있다고 한다. 타인에 곤란한 상황을 보고 재미있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생각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바라보진 않을 거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마지막에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일어야 한다.
몰래카메라처럼 말이다. 몰래카메라가 진행되는 동안에 당사자는, 매우 곤란하거나 혹은 가슴이 철렁할 순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 그런 표정과 반응을 보며 재미있어한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몰래카메라라는 사실을 공개하면 모두가 환하게 웃는다. 매우 용감한 모습을 보였던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한다. 자신도 사실 겁났다고 하면서 말이다.
몰래카메라가 TV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몰래카메라의 원조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이 아닐까 싶다. 골려 먹는 재미 말이다.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면, 당한 사람도 나중에는 재미있어한다. 심지어 자신이 당한 것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써먹기도 한다. 유머에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학창 시절에 이런 놀이를 가끔 했었다. 친구 골려 먹기.
한 친구에게 다가간다.
이미 두세 명이 함께 작전을 짰기 때문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자고 다짐한다. “OO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이 비보를 접한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선생님이 나를 찾는다고? 왜?” 그때 지나가는 척하는 다른 한 친구가 다시 소식을 전한다. “OO아! 선생님이 계속 찾으시던데? 뭔 일 있어?” 한술 더 떠서 당황한 친구에게 먹인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는 무슨 일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때 다른 한 친구가 행동을 촉구하는 한마디를 전한다. “선생님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던데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생각하던 친구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늦으면 더 안 좋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잽싸게 일어나서 교무실로 달려간다. 우리는 해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친구를 뒤따라간다. 그리고 교무실을 살핀다. 친구는 선생님 앞으로 가서 대역 죄인의 표정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이 친구는 빠르게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빤히 쳐다본다. 선생님은 손짓으로 얼른 가라는 동작을 하신다.
우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배꼽을 부여잡는다.
친구의 표정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당한 친구는 씩씩거리며 교무실을 나온다. 깔깔대며 주저앉은 우리를 보자, 바로 달려와 덮친다. 당했다는 생각에 성질을 내고는 있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편해 보인다. 속긴 했지만, 선생님이 실제로 찾지 않았다는 현실이 더 반가웠던 같았다. 그리고 보면 예전에는, 왜 그리 선생님이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악의가 없는 골려 먹기는, 유머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악의가 섞여 있다면, 혹은 순전히 악의적인 속임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도 하고,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그러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 넣고 그 사람 앞에서는 또 웃으며 이야기한다. 야비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영문도 모르고 당한 사람은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당한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 그랬다면 어떨까? 마음이 무너져 내릴 거다.
세상은 반드시,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둔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내가 어떤 씨를 뿌려야 할지 잘 알 수 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누군가를 죽이는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는 몇 곱절로 자신이 거두게 될 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상처를 되돌려 받을 것이고, 누군가를 곤란하게 했다면 곤란한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내가 뿌린 씨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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