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목수는 좋은 목재에 한 귀퉁이가 썩었다고 그 나무를 버리지 않는다.”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인데, 아직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문장이다. 글을 쓸 때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의미가 깊어 오랜 시간 생각하게 만든다. 훌륭한 목수를 리더에 빗대어 보면, 사람을 보는 안목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목재에 처지에서 보면, 좋은 몫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완벽하게 온전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판단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판단한 것을 옳다고 믿는다.
옳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판단했다고 말하는 게, 순서상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 자기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판단한다. 판단하기 전까지는 고심할 수 있지만, 판단한 이후에는 자기 선택에 대한 믿음을 더 굳혀간다. 어쩌면 자기 최면을 거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확신하기 위한 이유를 더 찾는다. 하지만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목재를 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된다.
사형을 반대하는 이유도 그렇다.
정말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분명 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지 치를 떨게 하는 자도 있다. 피해자 혹은 그 가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기도 하다. 얼마나 아플까 하는 마음을 헤아리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여서 인지, 아이와 관련된 사건은 더욱 그렇다. 마음이 너무 저리다.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걸 그냥 두고 보시느냐고 말이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을 보면, 또 마음이 달라진다.
한평생을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할지 생각하면, 아니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다. 어찌 감히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형집행을 당하고 나서 누명이 풀린 사건도 있다고 들었다. 누군가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다. 그때는 모든 정황이 그 사람을 향하고 있어서 확신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방향이 생각과 마음에 굴절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확신이 강하게 들수록 더욱 그렇다. 확신이 굳으면 바꾸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뽑은 게 가라지인가? 밀인가?
그게 무엇이든, 가라지라고 믿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만큼 자신에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용기 중에 가장 큰 용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용기는 한 번 발휘하기가 어렵지, 두 번부터는 좀 수월하다. 마음이 편해지고 가벼워지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온갖 걱정으로 몸과 마음이 무겁지만, 털어놓으면 어떤가? 과장 좀 보태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더는 말할 것도 없다. 용기를 내자. 실수하고 잘못했다면, 먼저 인정하는 용기를 내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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