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과 내러티브 파괴 (Narrative Violation)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인 피터틸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의 역발상 아이디어를 묻는 질문을 통해 개인의 통찰과 독립적 사고 능력을 테스트하곤 합니다. 그의 저서 '제로투원'에 언급된 것처럼 영어로 '컨트래리언(Contrarian)'이라고 표현되는 역발상 접근법은 단순히 남들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지만 자신만이 간파하고 있는 아이디어와 정보에서 출발하는 방법론의 일종입니다.
피터틸이 이끄는 파운더스펀드에서 투자 경험을 쌓고 2017년 독립 후 베드락(Bedrock) 캐피탈이라는 자신의 펀드를 이끌고 있는 제프 루이스 (Geoff Lewis)는 피터의 역발상 접근법을 더욱 발전시켜 '내러티브 파괴 (Narrative Violation)'란 투자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 특색 있는 벤처캐피탈리스트입니다.
"베드락의 접근 방식은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쫓는 대신, 시장을 지배하는 내러티브와 어긋나기 때문에 과소 평가된 유망한 기업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작점은 언제나 내러티브가 파괴되는 지점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그널을 찾은 뒤 독자적인 분석을 통해 차별화된 관점을 가지고 투자를 전개합니다."
제프는 2017년 디펜스-테크 기업 앤두릴(Anduril)의 시드 라운드, 2018년 범죄 모니터링 솔루션 플록 세이프티(Flock Safety)의 시리즈 A, 2019년 파커 콘래드의 두번째 스타트업 리플링(Rippling) 시리즈 B, 그리고 2020년 GPT-2를 개발하던 오픈AI에 대한 세컨더리 투자까지 모두 당시 시장을 지배하던 내러티브와 무관했던 투자가 지금의 성공 사례가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베드락은 가장 최근인 올해 10월에도 디펜스 스타트업인 마하 인더스트리의 시리즈 A를 이끌며 자신만의 투자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내러티브의 함정
제프는 투자에서 내러티브와 진실을 분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풍부한 자금이 새로운 카테고리에 대한 소문과 결합될 때 형성되는 퍼펙트 스톰을 경계해야 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모방하기 쉬운 새로운 스타트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환영이 보이기 시작됩니다. 몇몇 초기 스타트업의 성공 사례가 전해지면 단 며칠 만에 새로운 글로벌 카테고리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기술의 하입(Hype) 사이클의 등장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공유 킥보드 사업입니다. 2017년 중국에서 모바이크(Mobike)와 오포(Ofo)라는 전기 킥보드 공유 사업의 빠른 성장성이 주목을 받자 2018년 미국에서는 유사 기업인 버드(Bird)와 라임(Lime)이 등장하며 수천억 원 자금 조달에 성공합니다. 당시 투자자들은 마이크로모빌리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흥분하였습니다. 한국에서 킥고잉, 스윙과 같은 스타트업이 등장한 것도 이맘때입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의 공유 킥보드 기업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미국의 라임은 일찌감치 우버에 인수되었고, 3조 원의 기업가치로 상장에 성공한 버드는 주가 폭락을 거듭한 끝에 100억 원도 안 된 시가총액을 기록하며 상장폐지되었습니다.
제프는 투자의 적기란 '내러티브 신화'가 형성되는 시기가 아닌, 이러한 내러티브가 파괴되는 지점을 찾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인 접근법은 과거 주목받다가 지금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분야에서 살아남을 승자를 찾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벤처캐피탈들이 투자 경쟁을 벌이는 곳이 아닌, 자신들이 유일하게 텀싯을 제안한 투자자일 때 '내러티브 파괴' 영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합니다. 제프가 파운더스펀드에서 리드했던 2014년 리프트(Lyft)의 시리즈 B 투자 및 2015년 누방크(NuBank)의 시리즈 C 투자 모두 그 당시에는 굉장히 '인기 없는' 라운드였다고 회상합니다.
2010년 모두가 클린테크의 종말과 전기차의 허상을 이야기할 때 테슬라에 베팅했다면 역사적인 수익을 남겼을 것이고 2013년 잠깐 주목을 받았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비트코인에 당시 투자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 중국, 인도가 아니라면 데카콘 기업이 탄생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2015년 전후 브라질의 누방크, 한국의 쿠팡과 같은 기업에 투자했다면 지금쯤 막대한 차익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2024년의 내러티브 파괴를 찾아서
물론 '내러티브 파괴' 또한 성공한 투자에 대한 사후적 해석일 뿐이라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성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모두가 역발상을 외치는 순간 역발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피터틸은 2008년 스페이스X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였지만 일론 머스크의 또 다른 스타트업인 테슬라에 대한 투자는 거절합니다. 피터는 2015년 DealBook 포럼에서 '스페이스X는 독점적 경쟁력을 가졌지만 테슬라는 여러 전기차 기업 중 한곳에 불과했다고'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발상 투자의 대가도 이 시대 최고의 역발상 투자는 놓치고 만 것입니다.
제프도 역발상 또는 내러티브 파괴에 기반한 투자 전략은 과학이 아닌 예술에 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보다 나은 투자 전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의 차별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투자 접근 방법을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 중 하나인 것이죠.
모두가 AI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AI 언어모델 및 어플리케이션에 대한 투자가 현명한 접근인지는 의문입니다. 정부 수주와 하드웨어 개발에 기반한 디펜스-테크 투자가 지금 시대의 역발상이라고 주장하는 투자자도 있지만 이들 또한 이미 밸류에이션이 상당히 높아진 수준입니다. 블록체인, 핀테크, SaaS에 대한 투자가 바닥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단순히 '내려갔으니 올라온다'라는 관점으로 접근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지나고 나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이디어가 바로 역발상의 묘미입니다. 피터틸이 이야기한 대로 역발상은 결국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를 포함한 소수만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연말연시를 맞아 각자가 생각하는 2024년의 '내러티브 파괴' 아이디어를 탐구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보며 오늘 뉴스레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