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의 성공 신화, Pear VC의 페즈만 노자드
매년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순위를 평가해 발표하는 포브스는 종합 순위인 '마이더스 리스트'와 초기 기업 투자자들의 순위를 별도로 집계한 '마이더스 시드 리스트'를 함께 발표해오고 있습니다.
2023년 '마이더스 시드 리스트'에는 어김없이 익숙한 이름들이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와이콤비네이터에서 파트너로 일하다가 2015년 자신의 펀드 Initialized Capital을 설립, 코인베이스와 인스타카트의 시드 투자자로 명성을 쌓은 현 와이콤비네이터 대표 개리 탠 (Garry Tan)이 2위, 쿠팡의 시드 투자자로 참여, 이후 쿠팡을 알토스 벤처스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 프라이머리 벤처 파트너스의 벤 선(Ben Sun)은 올해 7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편 낯선 이름들도 눈에 띄입니다. 특히 개리 탠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오른 Pear VC의 페즈만 노자드(Pejman Nozad)는 해외는 커녕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를 벗어나면 무명에 가까울 정도로 생소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페즈만은 실리콘밸리 인사이더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입니다. 특히 그의 이야기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자수성가 스토리로도 유명합니다. 이란 난민 출신이었던 페즈만은 2014년 Pear VC를 설립하기 전까지 스탠포드 대학교 앞에서 고급 양탄자와 카페트를 팔던 영업 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25살의 나이에 미국에 처음 와 세차장에서 일하며 영어를 배웠던 페즈만은 어떻게 30년 만에 전세계 최고의 시드 투자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바로 페즈만의 이야기, 그리고 최근 5천억 원 규모의 시드 전문 투자 펀드를 조성한 Pear VC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페즈만이 실리콘밸리에서 네트워크를 쌓은 방법
이란에서 유명 스포츠 저널리스트이자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페즈만은 이란 혁명 이후 전 가족이 망명을 선택하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란을 떠나게 됩니다. 독일을 거쳐 1992년 미국에 안착한 페즈만은 낯에는 세차장과 요거트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세차장의 다락방에서 영어공부를 하며 고군분투하였다고 합니다.
좀 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던 페즈만은 1994년 스탠포드 대학교 앞 '유니버시티 애비뉴'에 위치한 '메달리온 러그 갤러리'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하게 됩니다. 이란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는 방법을 터득했던 페즈만은 영업사원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한 때 가게 매출을 100억 원까지 끌어올리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페즈만이 팔던 제품은 페르시아산 고급 양탄자였습니다. 장 당 가격만 천 만원이 넘는 고가 사치품인 것이죠. 실리콘밸리의 중심지인 팔로알토에서 고급 양탄자를 구매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공한 벤처캐피탈리스트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세콰이어 캐피탈의 수장 더그 리오네(Doug Leone)도 있었죠.
카페트 영업 사원으로 일하며 벤처캐피탈과 엔젤 투자에 대해 알게된 페즈만은 얼마 안되는 종자돈을 모아 엔젤 투자를 하기 위해 발로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금력도 부족하고 네트워크도 일천하던 그가 선택한 방식은 '파워 네트워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업자들을 만나 자신이 카페트를 팔면서 알게된 벤처캐피탈을 소개해주고, 벤처캐피탈에게는 유망한 창업자들을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바닥부터 네트워크를 쌓는 것이죠.
그가 세콰이어의 수장 더그 리오네의 관심을 끈 방법도 흥미롭습니다. 카페트를 매개로 더그의 집을 오가던 페즈만은 자신도 엔젤 투자를 하고 있으며, 관심이 있다면 창업을 준비 중인 최고의 이란 출신 공학 박사들을 소개해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 더그는 세콰이어 파트너들을 데려와 페즈만의 가게에서 '창업자-투자자' 네트워킹 행사를 개최합니다. 그렇게 페즈만은 영업이 끝난 카페트 가게를 네트워킹 장소로 활용,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핫한 네트워킹 행사를 개최하는 호스트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처음 엔젤 투자에 뛰어들어 시행착오를 겪던 페즈만은 2000년 안드로이드의 창업자 앤디 루빈의 이전 회사인 Danger에 투자를 하며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2008년 Danger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며 준수한 실적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점차 자신만의 투자 레코드를 쌓아가던 페즈만은 이후 드롭박스, 렌딩클럽, 앱로빈, 사운드하운드 등과 같은 유명 기업의 시드 투자에 성공하며 명성을 쌓게 됩니다. 하지만 페즈만은 더 큰 목표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만의 펀드를 만드는 것이죠.
Investors don't create the future, Entrepreneurs do
2013년 페즈만은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마르 허쉔손(Mar Hershenson)과 손잡고 본격적으로 벤처캐피탈 펀드 조성에 나서게 됩니다. 2004년 마르가 창업한 Sabio Labs의 엔젤투자자로 인연을 맺게된 페즈만은 자신의 '직감'에 의존한 투자 방식과 조화를 이룰 파트너로 공학도 출신의 창업자인 마르와 파트너쉽을 구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Pear VC는 2014년 $50M 규모의 1호 펀드 조성에 성공하게 됩니다.
Pear VC는 당시만해도 생소하던 프리시드에 전문으로 투자하는 펀드 전략을 고안합니다. 제품이 나오기도 전에 사람을 보고 투자하고, 투자 이후에는 '파워네트워커'의 강점을 십분 발휘해 창업자를 서포트하던 페즈만의 투자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된 전략인 것이죠.
Pear VC에게 신의 한수는 비슷한 초기 투자사인 와이콤비네이터와의 경쟁을 피해 실리콘밸리에 소재한 대학교와 밀착하는 전략을 펼친 것입니다. 이미 20대 초반 창업자가 단기간 내 조단위 기업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없이 목격한 페즈만은 스탠포드 대학교와 UC버클리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밋업, 데모데이, 해커톤 등 이벤트를 통해 20대 창업자의 '첫 투자자'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 Stanford Garage: 스탠포드 학생 창업자들에게 창업 공간, 멘토링, 운영 비용을 제공하는 창업팀 발굴 프로그램
- Pear Launchpad: 대학생 대상 10주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팀 당 $40,000을 Uncapped Note로 투자하고, 다음 라운드에도 $250,000까지 팔로우온 투자
- Pear GSB: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생들에 특화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창업팀을 구성해 선정되면 아이디어 단계에서도 최대 $25,000까지 투자
- UC Berkeley Challenge: UC버클리 재학생이 포함된 팀만 참여 가능. 마찬가지로 5% 지분에 대해 $250,000까지 투자 가능한 액셀러레티어 프로그램
그리고 첫 펀드의 첫 투자처로 점찍은 곳이 바로 당시 스탠포드 MBA 재학생이던 토니와 에반, 그리고 스탠포드 학부생이던 스탠리와 앤디 4명이 창업한 음식 배달 기업 '도어대시'입니다.
총 40개 기업을 편입한 Pear VC의 첫 펀드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미 조단위 유니콘 또는 상장사가 된 기업만해도 도어대시를 비롯, 브랜치 (Branch), 구스토 (Gusto), 가단트헬스 (Guardant Health), 오로라솔라 (Aurora Solar), 어피니티 (Affinity) 등 성공 사례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2022년 말 기준 첫 펀드에 편입된 기업의 전체 시장가치는 무려 $70Bn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Pear VC는 총 $1.9Mn을 투자한 도어대시 투자를 통해 $440Mn을 출자자들에게 분배하기도 하였습니다.
Pear VC는 최근 $432Mn 규모의 4호 펀드를 성공적으로 조성하였습니다. 프리시드 및 시드에 집중하는 펀드 중 손꼽히는 규모이면서 과거 3개 펀드를 넘어서는 규모의 대형 펀드 조성에 성공한 것입니다. 단지 운이 따라서가 아닌, 유망 기업을 가장 먼저 발굴할 수 있는 Pear 만의 독특한 기업 육성 전략이 많은 투자자들의 호응을 이끌어 낸 덕분입니다.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자격이란?
페즈만은 MBA나 금융 교육은 커녕 투자 업종에 종사한 적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페즈만은 창업자와 투자자들이 먼저 찾아오는 실리콘밸리의 대표 엔젤투자자가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필요로하는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자신만의 강점을 꾸준히 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페즈만은 Pear VC 성공의 제1 원칙이 'Optimistic Listening'이라고 강조합니다. '만약 창업자가 이야기한 것이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창업자의 목표가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며 끊임없이 1%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또한 수많은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창업자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회사를 찾는 것에 몰두한다고 지적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창업자이지 투자자가 아님에도 말이죠.
최근 스타트업의 실패 사례가 늘어나면서 '내 그럴 줄 알았어' 내지 '역시 안돼'라는 힐난과 자조가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시장 자정을 위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복기는 생태계에 필수 요소이지만 어려운 문제를 풀고자 도전하는 창업자들의 의지마저 꺾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업무가 창업자들에게 '노(No)'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상수가 되어버린 시기입니다. 하지만 타협없는 긍정주의를 바탕으로 무일푼에서 자신만의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여전히 발로 뛰며 초기 창업자 발굴과 투자에 매진하고 있는 페즈만의 이야기를 보며 과연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해보며 오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