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추억이 미래의 추억을 지워버린다면🎇

[들으며 읽는 평론] D. Schosrakowitsch - Lady Macbeth von Mzensk

2022.04.06 | 조회 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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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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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피난가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 War that forces many people sacrifice must stop
혼자 피난가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 War that forces many people sacrifice must stop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에 위치한 돈바스 지역에서 특별 군사작전 진행을 선언했다. 전면 침공에 나선 것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를 빼앗아간 지 8년 만이다.

 

당일 새벽 5시경, 모두가 불안에 숨죽이고 있는 깜깜한 하늘 위로 번쩍이는 불빛 몇 가닥이 나타났다. 불빛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우크라이나 곳곳을 덮쳤다. 러시아와의 전면전이 시작됐다는 신호다.

 

이후 한 달여간 많은 기업들은 '탈 러시아' 선언에 동참했고, 국제사회 역시도 러시아의 무력침공을 규탄했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심화됐다. 현재까지도 상당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은 전쟁의 피해를 입고 있다.

 


 #1 추억을 찾기 위한 푸틴의 발악 

푸틴에게 우크라이나는 다시 찾아와야 하는 땅이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고,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가보면 이들 민족의 뿌리도 같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다르게 토지가 비옥하다. 러시아는 냉대기후로 인해 두껍고 큰 가구용 나무가 주로 자라 밀을 재배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다르다. 1930년대 소련 대기근이 찾아오며 곡물 생산지역 주민을 포함해 소련 인구의 절반가량이 굶어 죽었다. 여러 차례의 가뭄이 주원인이었다. 여기에 소련의 '농업 집산화 정책' 불을 키웠다. 당대 소련의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소련의 농업 전반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농부가 부를 가지면 자신이 세운 공산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허나 이를 빌미로 지도권들은 곡물을 약탈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자신들이 땀 흘려 키운 곡물을 먹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다.

 

소련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지속적으로 러시아에게 경제적, 군사적 위협을 받아왔다. 이에 응하기 싫었던 우크라이나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가입을 원했다. 상대적으로 러시아가 자신들보다 군사력이 훨씬 우월했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과 가깝게 지내며 동맹하고 싶었던 마음으로 해석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게 되면 자신들의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서방의 무기가 국경지역에 배치된다면 푸틴이 신경 쓸 거리가 늘어난다. 허나 실제 공격으로 이어진 데에는 배신감의 작용이 크다. 푸틴은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소련 체제 아래에서 거의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자신들과 하나라 주장한다. NATO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우크라이나를 보며 “서방 세계에 휘둘리는 꼭두각시”라 칭하기도 했다.

 


 #2 아찔했던 금지의 추억 

D. Schostakowitch "Lady Macbeth von Mzensk"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 맥베스 부인"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다. 1930년대 러시아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성공을 이루기도 했다. 작품을 함께 들으며, 자신의 것을 위한 투쟁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1900년대 초 러시아는 ‘러시아제국’이라 불렸던 전제군주정치의 국가였다. 정치체제를 유지한 채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였고, 자유주의를 학습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이후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제국의 승리로 국민들은 러시아 군주 정부에 쌓인 불만을 폭발적으로 토로하기 시작한다. 지켜지지 않는 인권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공장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농민들 역시 봉기를 일으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터지자 러시아 제국 민중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밀가루마저 구하기 어려워진 민중들은 당국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혁명을 일으켰다. 수차례에 걸친 혁명운동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마지막 볼셰비키 혁명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합의 탄생이 이뤄졌다.

 

이후 정권을 잡은 건 프롤레타리아(임금 노동자) 계급이었다. 공산주의의 이상을 가지고 체제를 재정립하려 했으나, 다수의 전쟁과 혁명으로 폐허가 된 러시아에 다시 산업과 농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정권의 교체 시기 동안 흔들렸던 민심을 모두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야 했다.

 

이 외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사회주의가 시작됐다. 그들의 독재는 1930년대 소련의 우두머리가 스탈린으로 교체되며 점점 더 강화됐다. 스탈린은 모든 소련의 고난을 계급투쟁의 표현으로 파악했고, 의식주는 물론 모든 예술행위와 관련한 사상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가 붐을 일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 원칙이 대두됐다. 예술가는 혁명적 사회와 현실을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예술에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실의 부당함을 그대로 담아내어 바른 사회로 이끌어가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곧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공산당의 제약에 갇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몰락했다. 문학과 예술을 사회주의의 건설 도구로 바라보며, 이에 상응하지 않는 음악은 제작과 연주를 금했다. 또한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형식주의’음악에 대해 제약을 가했다. 새롭고 복잡한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와 이념적 내용의 결여'오류'로 간주해 금지시켰다.

 

독단적 사회주의의 급작스러운 진행에 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은 자신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망명하다 결국 러시아에 머무를 것을 택했다. 쇼스타코비치와 같이 자국에 남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하길 원했던 음악가도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새 오페라는 논쟁의 여지없이 우리의 음악생활과 극장생활에서 가장 의미있는 결과 중 하나다. 근본적으로 10월 혁명 이후 16년간 오페라 예술에서 거장이 만든 최초의 대작이자 걸작이다.” - 소련의 예술 (Die Sowjetische Kunst) 1934.02.01

1932년, 쇼스타코비치는 니콜라이 레스노프의 소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864)를 기초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약 2년 뒤인 1934년 1월 22일, 레닌그라드에서의 초연 이후 민중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곧 소련을 대표하는 최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오페라가 됐다.

 

그러나 1936년 스탈린의 관람 이후 판세가 바뀌었다. 스탈린 시대의 여성상은 “희생정신을 가진 어머니”였으나, 주인공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비판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음악적으로도 대중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형식주의적 작품이라 칭했다.

 

사건의 여파로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계획했던 러시아 여성에 관한 3부작 제작을 포기했다. 또한 당의 소식지였던 ‘프라우다'에 쇼스타코비치 오페라에 대한 비판글이 실리면서부터 대대적 논쟁이 시작됐고, 이는 곧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스티에드리가 했던 리허설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굴욕스럽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 교향곡을 연주하면 자기도 무사하지 못할게 뻔하니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솔로몬 볼코프 “증언”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을 작곡했음에도 발표하지 못했다. 1936년 12월에 초연될 계획이었으나, 초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돌연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가 세간의 비난과 대숙청의 여파를 이겨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초연을 담당했던 연주자와 지휘자들 역시 쇼스타코비치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

 

결국 당에 입맛에 맞는 교향곡 제5번을 먼저 발표했고, 소련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1961년이 돼서야 교향곡 제4번이 연주될 수 있었다.


 #3 캔슬 컬처, 미래세대 추억의 기회를 지울 수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펼칠 자유가 있다. 예술은 그 수단 중 하나이며, 다른 사람에게로의 전달 매개로써 작용한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와 같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예술가들을 사례로 보며 자랐다. 우리의 음악사에서 근대의 틈이 존재하는 이유도 역시 일제의 이데올로기로 인한 공백 때문이다.

 

이런 예시들을 듣고 보고 자라며, 우리는 표출의 자유를 억압함이 곧 하나의 문화를 말살시키는 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또한 인본주의에 반하는 문화라 할지라도 그 문화의 산물이 가진 예술성이 해당 이데올로기를 무조건적으로 나타내지 않음을 안다.

 

러시아의 무자비한 폭격 이후 예술계는 러시아 문화를 무자비하게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캔슬 컬처(Cancel Culture) 현상이다. 원래는 유명인의 과거 부도덕한 행동이 계기가 되어 그들의 지위가 상실되는 현상이다. 점점 트렌드화되며 유명인은 물론 브랜드까지 영향을 미쳤다. 상품 가치판단의 주체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변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남을 비판하는 건 쉽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버락오바마

 

무력 전쟁이 잘못된 것도, 이로 인해 전 세계가 분노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으로 한 나라의 문화를 무자비하게 배척하는 행위 역시 잘못됐다. 그저 이전의 적국이어서 가진 분노의 표출은 예술가와 문화에게 큰 시련이다. 잠깐의 화두에 올라 전쟁국의 관심을 이끌 수도 있지만, 반 이데올로기를 위한 제2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  21세기 쇼스타코비치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전쟁인지, 캔슬 컬처인지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예술가의 역할은 문화를 이어나가고 발전시키는 것이지, 결코 타 문화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더 많은 갈래의 문화가 등장할 수 있도록 지금의 문화를 기록하며 그 기반을 다지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당당히 표현될 수 있도록 터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러시아의 예술을 오히려 더 많이 연주하고 읽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의 아픔에 대해 상기시키고,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에 더 현명한 대처를 도출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때로는 과거의 추억이, 미래의 추억이 가질 자유와 권리를 영원히 지워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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