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신약, 전도서 1장 9절)
기독교 성경 전도서의 유명한 문구처럼,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했던 일이고
앞으로 우리 후손도 우리가 했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처럼
영원한 루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의 주장대로 라면,
생성형 AI로 여러 예술가의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무수한 변형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우라를 침식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 감정, 의식이 없는 AI가 만든 작품이 독창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의 또 다른 주장대로 AI가 창작과정을 민주화시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제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아니면 AI가 생성한 예술이 그 자체로 독특한 아우라를 가질 수는 없는 걸까요?
인공지능에 대한 많은 우려와 그 한계점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더 가속화될 수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창조물(?) 혹은 생산물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기 보다는
유에서 유를 연결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새롭게 연결하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존재하는 점들을 인식하고,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탐구하는 작업에
인공지능을 활용한다면,
새로운 연결에 대한 아이디어를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점이 있습니다.
예술작품과 세계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새롭지 않지요.
하지만,
파괴를 통해 새로운 연결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 힘 중에 하나가 바로
패러디입니다.
유머, 풍자, 비판은
익숙한 시각을 파괴하고,
재구성한 후
다시 맥락화를 통해
새로운 연결을 가능하게 해 줄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파괴와 창조의 이중성은 패러디 내에 깊숙이 자리하며,
때론 우리에게 통찰을 주기도 합니다.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규범의 층을 벗겨내어
기본적인 진실과 비판을 밝히는 이 패러디의 미학은
문학, 시각 예술,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역사의 장편을 들여다보면,
패러디는 항상 강력한 표현 수단이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희곡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패러디를 사용하여,
그들의 사회의 약점을 코믹하면서도
사유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예술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패러디도 그 시대의 변화하는
규범과 내러티브를 적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시각 예술의 세계에서,
패러디는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L.H.O.O.Q"에서 수염이 그려진 "모나리자"를 생각해보죠.
다 빈치의 존경받는 창작물에 수염을 더하는
이 간단한 행위는 예술계에서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작품에 대해
그 신성함을 파괴하고
예술계에서 허용되고 존경받는 것의 경계를 밀어내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였습니다.
다다이스트들은 부조리와 풍자에 열광하며,
사회와 예술의 확립된 규범을 조롱하는 도구로 패러디를 사용했고,
생산적인 파괴의 도구로서
패러디를 예술의 도구로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물건들을 조합하여
"레디메이드"라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Fountain"이라는 작품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뒤집어 놓은 것에 서명을 한 것이었죠.
이는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와 정의에 대한
생산적인 파괴였으며,
새로운 연결이었습니다.
저는 뒤샹을 다시 패러디하였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분수'를 패러디한
이 도자기 소변기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단순한 일상의 오브제가 아닌 지속 가능한 친환경 화분으로 변신했습니다.
녹색 식물과 꽃이 분수에서 솟아나며
재활용과 지속 가능성 노력을 통해
버려진 물건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재활용 목재 받침대 위에 놓여 있어
버려진 물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재활용의 메시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받침대 주변에는 버려진 플라스틱 병,
찌그러진 캔, 기타 폐기물의 상징이 장식되어 있어
소변기에서 자라는 식물의 생명력과 생동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받침대의 작은 명판에는 '쓰레기에서 경이로움으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지속 가능성의 변혁적 힘과
가장 평범한 물건도 아름답고 환경에 유익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신분을 감추고
거리 예술가, 정치 활동가, 영화 감독인 '뱅크시'도
패러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펄 이어링을 착용한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외부 보안 알람박스로 대체하여,
전통적인 예술을 현대의 현실로 스며들게 하며
현대 감시의 침략성을 풍자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예술가 피에로 만조니는
캔 안에 자신의 대변을 넣은 깡통 90개를 출품하면서,
예술가의 인격과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해
대담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피에로 만조니의 대변을 다시 패러디한 이 작품은,
원작의 평범하고 미니멀한 라벨 대신
오늘날 인기 있는 명품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브랜딩으로 캔을 장식했습니다.
골드 액센트, 홀로그램 스티커,
바코드가 "한정판!", "컬렉터 아이템!"을 외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가격을 암시하며
소비 중심 사회에서 예술품,
심지어 가장 평범한 물건도 상품화되고 브랜드화되는 방식을
더욱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배경은 광고, 광고판, 네온사인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두 이 캔이 마치 세기의 필수 아이템인 것처럼
'최신의 최고급' 캔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소비주의와 브랜딩이
어떻게 가장 평범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물건도
고급 예술품이나 탐나는 수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신랄한 논평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브랜드, 한정판,
그리고 물건의 고유한 가치보다는
마케팅에 기반한 인식된 가치에 대한
사회의 집착을 거울로 삼습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심슨 가족" 역시
패러디의 여러 사례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시각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사랑받는 TV 시리즈의 특유의 유머와
현대적인 내러티브를 도입하여 관객에게 새롭고 재미있는 재해석을 제공합니다.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을
성찰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
금욕적인 농부와 그의 딸은 전통적인 목조 주택 앞에 서 있습니다.
그 화면은 수많은 소셜 미디어 알림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딸은 정면을 응시하는 대신 헤드폰을 귀에 꽂고 음악이나
팟캐스트 등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 뒤에 있는 집은 여전히 고전적인 고딕 양식이지만
지붕에 위성 접시가 있고 벽을 따라 수많은 케이블이 있습니다.
창문은 아늑한 실내를 보여주는 대신
다양한 전자 기기의 푸른 빛을 반사합니다.
팝아트 운동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생각해보면,
그는 종종 소비 문화와 미디어에서 익숙한 이미지들을 가져와
과장하거나 다르게 변형하여
대중 문화의 비판과 축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창조하였습니다.
그의 "캠벨 수프 캔"은 패러디로 볼 수 있으며,
상업적 미학과 전통적 예술 표현을 혼합하여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엔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을 다시 패러디한
이 작품은 "케일 & 퀴노아 딜라이트",
"골든 강황 토닉",
"베리 비트 루트 블리스" 등 건강에 초점을 맞춘 현대적인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각 라벨에는 "친환경", "식물성" 등의 배지와 흙빛 톤이 돋보입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건강 음료를 상징하는 작은 캔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배경에는 생동감 넘치는 신선한 농산물 일러스트를 배치하여
유기농 및 지속 가능한 소비를 향한 오늘날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시각 예술이나 문학, 또는 그 어떤 형태에서든, 패러디는
단순한 조롱, 파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패러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의 역학을 반영하여,
익숙한 것을 왜곡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제시함으로써,
패러디는 우리에게 세상을 새롭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웃으면서 우리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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