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영화는 랭보의 문장과 함께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요? 그리고 왜 이 영화는 이 문장을 타이틀 시퀀스로 선정했을까요? 이 질문에서 <쿠키 앤 크레딧> 1호: 녹색이 행운을 가져다 줄 거예요는 출발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뉴스레터의 주제인 <녹색 광선>의 쿠키 지수와 이 영화를 고른 이유에 대해 설명할게요.
<녹색 광선>의 쿠키 지수는 30 입니다. 여러 기획전을 통해 국내에 자주 소개되기도 하지만, 40년의 간극 역시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고전치고는 익숙'하고, '어디선가 들어 본 제목'을 가진 이 영화에 적절한 지수겠죠?
다음으로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녹색 광선>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싱그러움으로 첫 편지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쿠키 지수'도 함께 고려했어요.
살펴보기
그럼 본격적으로 <녹색 광선>의 크레딧, 그리고 영화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볼까요?
크레딧의 요소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고, 또 가장 많이 기억하는 요소는 바로 감독일 거예요. <녹색 광선>을 연출한 에릭 로메르(1920-2010)는 평생동안 소시민의 일상과 연애에 관한 영화들을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한 사람이지만, 누벨바그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길을 나아간 감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누벨바그라고 하면 떠오르는 실험정신을 거부하고, 난해하지 않은 쉬운 톤을 일관적으로 유지한 감독이에요. 또 희곡과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대사와 대화에 큰 비중을 두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스타일을 고수한 데에는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에릭 로메르만의 철학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촬영을 담당하신 분은 소피 멩티뇌로, 16mm 필름을 사용하셨네요. 필름 영화와 디지털 영화가 있고, 이 두 가지 중에서도 어떤 필름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어요. 가끔 기사를 통해서도 '봉준호 감독의 마지막 필름 영화'와 같은 표현들을 접해 보셨을 거예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 필름들의 상세한 차이점에 대해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8mm가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촬영에 사용되는 필름이라면, 16mm는 그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성질을 가진 필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필름은 개인적이고 미니멀한 내용을 다루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 스타일과도 잘 어울립니다.
에릭 로메르의 다른 특징들로는, 적은 비용을 들인 제작 방식을 선호했다는 것, 우연과 즉흥성을 강조했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녹색 광선>의 주연 배우인 마리 리비에르가 에릭 로메르 감독과 함께 각본에도 참여했네요. 에릭 로메르가 작업 방식에 있어서 강조한 '우연'이라는 테마는 이번 호의 주제인 <녹색 광선>이라는 영화와 정말 잘 어울리기도 해요. 이처럼 <녹색 광선>은 에릭 로메르의 필모그래피에서 시기적으로도 딱 중간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또 가장 평균적이면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감독 얘기는 이쯤 하고,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제작진들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 에릭 로메르는 소수의 유대감 있는 인원과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여기서의 작업 인원에는 배우 역시 포함되어서, 촬영 전에도 배우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네요. 이렇게 보낸 시간을 통해 촬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사가 정해지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이런 작업 방식은 로메르만의 방식은 아니지만, 현대에서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많은 감독들이 로메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또 로메르는 비전문 배우 역시 자주 기용했는데, 이러한 방식 역시 최근에도 자주 사용되고 있어요. 최근 가장 핫한 감독 중의 한 사람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역시 비전문 배우들과 활발히 작업하는 감독으로 유명하죠?
화면비도 짚고 넘어가 볼까요? <녹색 광선>의 화면비는 1.66:1 입니다. 1.66:1 의 화면비는 유럽의 예술 영화에서 많이 사용되어, 유러피언 와이드스크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TV에서 주로 사용되던 4:3의 비율보다 가로가 조금 더 긴데요. 4:3의 비율보다 현장감을 체험하기에 용이합니다.
추가적으로, 배급과 마케팅에 대해서도 살펴볼까 해요. 당시의 배급보다는 최근 한국에서 에릭 로메르 영화들이 상영되고 홍보되는 방식에 대해 다루고자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2023년까지 서울아트시네마 측이 판권을 보유하고 있다 만료된 이후로는 배급사 안다미로에서 판권을 구매해 회고전을 열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에릭 로메르 작품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감독 중 한 명이었지만 오히려 현 세대의 영화 팬들에게 더 익숙해졌어요. 트렌디한 감각에 맞게 리뉴얼된 포스터들도 예쁘죠?
나가며
들어가며, 저는 오프닝 크레딧에 사용된 랭보의 문장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 아마도 여기서의 시간이란, '녹색 광선'이 희끄무레하게 수평선에 드러나는 순간을 말한 거겠죠? 낭만을 찾아 헤매던 델핀이 좌절하지 않고 기적처럼 마주한 그 순간 말이에요.
영화 <녹색 광선>은 이처럼 늘 곁에 있지는 않지만, 늦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행운이 있을 거라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지루하도록 느긋한 일상뿐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언젠가는 '심장이 뛰는 순간'이 우리에게 꼭 찾아올 거라고요. 그리고 그건 이 편지를 읽으실 모든 분들에게 전하는 제 마음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몇 개의 '쿠키 컨텐츠'들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쿠키 컨텐츠'는 해당 호의 영화와 관련이 있는, 혹은 함께 곁들이면 영화의 여운을 한층 더 즐길 수 있을 만한 추천 컨텐츠들이에요. 영화의 여운을 한층 더 즐길 수 있는 컨텐츠들을 준비했어요.
첫 번째 쿠키 컨텐츠는, 소설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입니다. 에릭 로메르의 단편소설집으로, 여기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영화의 촬영대본으로 발전합니다.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몽소 빵집의 아가씨(몽소 빵집의 소녀)>나 <클레르의 무릎>도 물론 수록되어 있으니, 감독이자 소설가인 에릭 로메르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로는, 영화 <녹색 광선>을 존재하게 한 소설인 쥘 베른의 <녹색 광선>을 추천해 드릴까 해요. 조금은 뻔한 추천작일지 모르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지 8년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소설이랍니다. 줄거리는 주인공이 완벽한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질 때 발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는 ‘녹색 광선’을 보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에 따라 온 가족이 녹색 광선을 관찰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 내용이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밴드 위아더나잇의 <녹색 광선> 앨범을 소개해 드립니다. 위아더나잇은 영화 <녹색 광선>에 영감을 받아 이 앨범을 작업했다고 해요. 위아더나잇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밴드라 이렇게 마주쳐서 더 반가웠어요. 잔잔한 이 영화와도 어울리는 음악을 꾸준히 들려 주는 밴드입니다. 보컬 함병선 씨가 작성한 소개글을 첨부하며,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감사합니다.
소망하는 것들이 언젠가 행운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며
2024년 2월 25일 새벽, Abyss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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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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