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다음을 채우는 것들

🎼  Dayglow 「How Do You Know」,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0월의 마지막 주가 열렸어요. 벌써 11월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네요. 올해 주말이 딱 10번 남았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저는 하반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각종 숫자에 집착합니다. 연말은... 말도 마세요.

지난 한 주. 글과 사진, 영상으로 남겨 보냅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시기를.

🏖 10월 넷째 주의 일 : 그림과 라디오

수강 신청에 밀려 잠시 멈췄던 그림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어요. 늘 눈팅(?)만 하며 한번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화실. 드디어 등록했습니다! 이른 아침의 화실에선 라디오가 흘러나오더라고요. 선생님은 조용히 홀로 그림 그리는 것이 일상이니, 뭔갈 늘 틀어둔다고 하셨어요. 그 참에 저도 정말 오랜만에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요. 제가 도착하는 10시에는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가 한참 흘러나옵니다. 그다음 차례인 [이석훈의 브런치카페]를 지나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를 절반 정도 들으면 수업이 끝나요.

라디오를 들으며 가끔 피식거리고, 웃음의 끝에 떠오른 소재로 선생님과 수다를 나누기도 하고. 잊고 있던 노래에 딸린 한 시절을 추억하기도 해요. 튤립과 국화 잎을 그리다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가는 걸 들으며 60분 단위를 새롭게 감각하기도 하고요.

🏡 10월 넷째 주의 장소 : 밀양

부산에서 보낼 마지막 가을. 뭐든 '마지막'이라는 세 글자가 앞에 붙으면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구질구질해집니다. 쌀쌀맞은 평소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 질척거리고 말이죠. 겨울엔 힘 하나 못 쓰는 두더지가 되어버릴 테니. 아마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계절입니다. 이 가을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미리 계획을 많이 세웠어요.

그중 하나는 저와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로 거처를 옮겨 사는 친구들과의 만남입니다. 단풍도 보고, 음식과 술도 나눌 작정이었죠. 접선 장소를 밀양으로 정했어요. 곳곳엔 감나무가 한창이더라고요. 여기저기에 사다리를 세우고 감을 수확하는 풍경이 정겨웠습니다.

먹고, 마시고, 떠든 모든 시간이 다 좋았지만, 친구와 나누었던 이른 아침의 대화가 왜 자꾸 생각날까요. 모두가 아직 잠든 시간. 혼자 밖으로 나와 처마 밑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친구도 조용히 나와 제 옆에 누웠어요. 우리는 누워 새 소리를 한참 들었는데. 소쩍새 알아? 되게 부엉이 같이 생겼어. 새벽에 듣는 여름 철새 소리가 엄청 좋거든? 휘~리호이~ 별안간 친구의 철새 성대모사가 시작됐는데. 그의 어설픈 흉내만으로도 아는 소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곤 조용한 감상의 시간.

구독자 님은 특별한 가을 소풍을 다녀오셨는지. 다녀오려는 계획을 만드는 중이신지 모르겠네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부디, 어서!

📚 10월 넷째 주의 책 : 김지승 『짐승일기』 난다,  2022

지난 어느 금요일, 책방 한탸에서 열린 김지승 작가의 신간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전작이었던 『아무튼, 연필』 이 제가 <아무튼 시리즈> 가운데 정말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수개월 전, 책방 한탸에서 작가님께서 진행하셨던 '여성적 글쓰기' 강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도 무척 아쉬웠거든요. 이번엔 참여할 수 있어서 단숨에 책방으로 달려갔지요. 이미 책방의 안과 밖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더라고요.

『짐승일기』는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되었던 에세이를 묶은 책이에요. 저는 화면으로 글을 읽는 건 잘 못해서, 몇 편을 읽고 그저 책으로 묶일 날을 기다렸어요. 마침내 만난 책은 (역시 너무... 좋아서) 읽는 데 한참 걸리더라고요. 읽고, 또 읽고, 줄도 긋고 필사까지 하느라 바빴던 한 주. 북토크 역시 책 출간을 기다리던 것 못지않게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글의 힘.

어느 곳을 인용하면 좋을까. 책을 넘기다 말고 페이지마다 머무르게 되어 이렇게 짧은 글을 쓰는데도 어찌나 진도가 안 나가던지요. 북토크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저 또한 울음을 참아야만 하는 순간이 이따금 오곤 했는데요. 그건 책을 읽는 중간중간도 마찬가지였고, 필사를 하는 시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아픈 건 오롯한 내 것이니까요. 최악의 상황을 그리는 일엔 도가 터서 자신 있으니까요.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이 외롭게 느껴지는 아픈 (먼훗)날을 가만히 상상해봅니다. 그런 날은 이 책과, 만나본 적 없지만 내 마음대로 얼굴까지 그려 놓은 책 속의 여러 등장인물, 그리고 작가님과 책방 사람들이 주고받은 따스한 눈빛 같은 것들에 의지하고 있겠지요. 미래의 낡은 제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아요.

어디에서 주워들었는데. 좋은 친구 관계가 노후에 꼭 필요한 '정서 연금'이라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비상시에 꺼내 볼 수 있는 <무언가(책, 영화, 물건, 음악...) 리스트>를 만들어두는 것도 확실한 '정서 연금'의 일종인 것 같아요. 그 리스트에 한 권을 추가하자마자, 제 연금은 404g만큼 더 무거워졌어요.

개인 일정이 있는 사장님을 대신에 책방 한탸를 돌보며 오늘의 레터를 써 보았습니다. 책방을 꾸리던 호시절이 절로 떠오르던 시간이었네요.

오늘은 확실히 어제보다 출근길이 춥던데요.

구독자 님의 하루는 어땠나요? 위험한 환절기, 건강하시길 빌어요!

2022.10.26.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