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틸 라이프 (靜物畵) 000. 시작하며

🎼  류이치 사카모토 「Still Life - orchestra version⌟, 2013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지난 4일이 입춘이었습니다.  저는 '입춘'이라는 말에 항상 속아서, 그 두 글자를 보거나 들으면 황급히 겨울을 정리할 준비를 하곤 합니다. 입춘은 항상 봄보다 훨씬 먼저 와서 한파주의보나 혹설, 빙판길과 꽃샘추위까지 차례로 맞이하게 만들지요. 3월이 코앞인 2월의 끝자락에도 나무들은 소복이 눈이불을 덮고 있고요. 올해도 어김없이 입춘에게 한 방 맞은 느낌으로 억울한 연초를 보냅니다. 그렇게 1월과 2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엇을 하리라는 마음만 겨우 빚으며 넘기는 것 같아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속고, 자연스럽게 빚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부산에서 지내는 동안 뉴스레터를 열심히 적었습니다. 한 주에 한 편.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읽고 어디에 갔는지 써서 보내곤 했지요. 부산 생활을 마친 지도 2년 차에 접어들었고요. 저는 새로 자리 잡은 서울 동네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정 붙이고 있어요. 부산에서 지냈던 날들이 다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요즘엔 자기 전 침대에서 일기를 씁니다. 제 일상은 그곳에 미주알고주알 담겨 쌓이고 있습니다. 연초에 열중한 일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 노트북 앞에 앉아 시간을 들여 한 주의 일상을 뉴스레터에 정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일기 때문이고요. 

봄부터는 좀 더 다듬어진 에세이를 쓰고 나누어보려고 해요.

처음 뉴스레터를 시작할 때 고민했던 멤버십을 만 2년이 지난 지금에야! 시작합니다.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분들이 멤버십에 가입해 주신다고 해도 공들여 글 쓰고, 음악을 고르고, 사진을 찍어 구독자 님의 메일함으로 보낼 예정이에요.

그간 제 글이 좋았다면, 언젠가 이메일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면.

이번 프로젝트 <스틸 라이프> 멤버십에 구독자 님이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

🕰️ 프롤로그 : <스틸 라이프(靜物畵)> 

폐업, 독립, 결혼, 그리고 여러 번의 이사.

삼십 대 초반이 열 개 남짓한 글자 수로 채워진다. 그러나 글자의 개수와 반대로 꽤 무겁고 혹독한 시간이었다. 나는 만 사 년 동안 최북단의 작은 도시에서 홀로 책방을 운영했다. 스물여덟부터 서른둘까지였다.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자리엔 손님 하나 없이 텅 빈 책방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내 곁에는 아침의 커피, 그리고 밤의 와인을 평생 나누고 싶다고 고백한 오랜 친구가 서 있었다.

친구는 남쪽 마을로 떠났다. 그가 자리 잡은 새 직장은 부산의 한 작은 동네에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때는 아니었을까. 마치 낯선 북쪽의 마을에 갑자기 책방을 심기로 다짐했던 어느 이상한 날처럼.

책방에 있던 모든 짐을 싣고 부산으로 내려와 친구와 살림을 차렸다. 수저 한 벌도 제대로 없는 집에선 ‘뭐’만 하려고 하면 ‘뭐’가 없는 ‘뭣’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노트를 꺼내어 필요한 물건의 리스트를 적고 또 적었다. 하나를 사면 가로줄을 길게 그었다. 그렇게 취소 선이 계속 늘어나는데도 늦은 밤까지 눈이 빠지도록 온라인 쇼핑몰을 헤매야 했다. 아침이면 도착한 택배 박스로 거실이 가득 찼다. 사고 또 사도, 치우고 또 치워도 끝이 나지 않는 짐과의 고투는 수개월간 이어졌다. 뜨거운 어느 여름날 아침, 문득 택배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거의 울리지 않는, 고요하고 안온한 일상을 되찾았다는 깨달음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겨울이 올 때마다 다급한 이삿짐을 꾸려야 했고, 마침내 작년에 서울로 다시 이사하며 택배 전쟁을 한 차례 더 치렀다.

2인 가구가 필요로 하는 사물의 개수를 헤아리다 보면 금방 아찔해졌다. 의자에 앉아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내 방을 둘러보며 당분간은 무엇도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의 몸뚱이 두 개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게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할 때. 이제는 새 물건을 가지려고 욕망하고 탐색하기보다, 내가 가진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 이 집에 어쩌다 오게 된 평범하고 소박한 물건들을 가능한 한 오래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내겐 전보다 자주 찾아온다. 

이 시간을 건너면서 직업란에 적는 글자도 '자영업자'에서 '프리랜서'로 바뀌었다. 책 읽고 글 쓰는 강의를 하거나 모임을 운영하며 생활한다. 출근할 곳 없이 대체로 혼자 집에 머물며 생물이 아닌 사물들과 함께 산다. 만지고, 누르고, 찢고, 쓰고, 닦고, 꼽고, 자르고, 끼우고, 걸고, 돌리고, 밀고, 세우고, 쌓고, 말리고, 헹군다. 무엇보다도 읽고, 보고, 쓰고, 그린다. 여러 종류의 동사를 바꿔 가며 집 안의 사물들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뜨겁던 해도 어느 틈에 자취를 감춘다.

뉴스레터 <스틸 라이프>는 내가 매일 만지는 여러 사물에 관한 짧은 에세이와, 그 사물을 다루는 타인의 작품에 관한 리뷰를 담을 예정이다. 타인의 작품은 책이나 드라마가 될지도, 영화나 그림, 음악이나 사진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편지를 읽는 당신도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하나의 사물을 가운데에 두고 새로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의 글 속으로 들어온 물건은 미워하거나 하찮게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짧고 부족한 내 몸의 연장이 되어주어서. 때론 외롭고 지루한 하루의 친구가 되어주어서. 우리가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주어서 말이다.

* 물론 일부 품목에는 예외가 있다. (ex.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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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한 달에 한 번, 커피 한 잔의 값을 나누어주세요. 한 달 구독료는 4,900원입니다.

매주 주말 중 구독자 님께 편지가 발송됩니다.

편지에는 함께 듣기 좋은 음악, 제가 가진 사물에 관한 짧은 에세이, 그리고 그 사물을 다룬 타인의 작품에 관한 리뷰를 담을 예정입니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물건이 글의 재료가 될 것이라서. 아마 구독자 님의 공간 어딘가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을 것 같다고 추측해 봅니다. 제 글을 통해 구독자 님의 소중한 물건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이 메일은 하나의 디딤돌이 되어, 제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하는 사물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벌써 기쁜 상상도 해 봅니다. 💫

- 연재 시작일 : 2024.03.02 (토) ~ 매주 주말 중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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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멤버십과 무관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무료 이메일도 종종 발송하겠습니다.
계속 구독자 님의 메일함을 통해 소식 주고, 또 받아요. 😌

늘 제 메일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24.02.26.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의 마음을 담아,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