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ded by Zero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IT테크, 스타트업 그리고 자본시장에 대한 2차적 사고를 공유합니다.
이번주에 실리콘밸리의 자본 시장을 뒤흔드는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핀테크 대기업 스트라이프(Stripe)가 자사주를 직접 매입(buyback)하기 위해 투자자들과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죠. 거론되는 기업 가치는 무려 1,070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이건 단순히 또 하나의 유동성 확보 이벤트는 아닙니다. 벤처캐피탈의 오랜 공식인 “모든 성공한 스타트업의 최종 목적지는 IPO”라는 대전제에 정면으로 균열을 내는 선언이죠. 스트라이프는 어떻게 이런 대담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게 된 걸까요? 그리고 테크 업계의 자본 흐름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일까요?

이익으로 독립을 선언하다
이번 스트라이프의 움직임은 과거의 유동성 프로그램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과거 스트라이프는 직원이나 초기 투자자들이 보유 지분을 다른 비공개 투자자에게 매각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텐더 오퍼(tender offer)를 진행했었죠. 말 그대로 주주 구성만 바뀌는 소유권의 재배치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논의되는 것은 회사가 직접 자사의 자본을 투입해 투자자들의 주식을 사들이는 자사주 매입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숙한 상장 기업들이 주주에게 자본을 환원하고 주당이익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죠. 비상장 유니콘이, 그것도 외부 자금 조달 없이 자체 이익만으로 이런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실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 하나의 동력은 바로 스트라이프의 압도적인 재무 건전성입니다. 스트라이프는 2023년부터 현금흐름 흑자로 전환했고, 2025년 현재는 완전한 수익성을 달성했죠. 2024년 한 해 동안 무려 22억 달러의 잉여현금흐름(Free Cash Flow)을 창출했습니다. 총 결제액은 1조 4,000억 달러를 넘었고, 매출은 180억 달러를 돌파했죠.
더 이상 성장을 위해 외부 자본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재무적 독립. 이것이 바로 스트라이프가 IPO라는 전통적인 경로를 거부하고 새로운 규칙을 쓸 수 있게 된 근본적인 힘인 겁니다.
VC 딜레마
이번 자사주 매입은 벤처캐피탈(VC) 모델의 핵심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VC 펀드는 통상 8~10년의 만기를 가진 유한책임조합으로 운영되죠(GP는 무한책임). 이 기간 안에 투자 기업을 IPO 시키거나 매각(M&A)해서 투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투자 계약서에는 상환권(Redemption Rights)이나 동반매도권(Drag-Along Rights) 같은, 필요시 엑싯(Exit)을 강제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레버리지는 기업이 ‘수익을 내지 못하고 외부 자금에 의존할 때’만 효과적입니다.
스트라이프처럼 스스로 막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기업에게는 VC의 압박이 통하지 않죠. 오히려 스트라이프는 회사의 자금으로 투자자들에게 직접적인 현금 출구를 제공함으로써 VC들이 가진 계약적 무기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겁니다. 투자자들이 가장 원하는 자본 회수라는 문제를 회사가 직접 해결해주니 VC 입장에서는 더 이상 IPO를 압박할 명분도, 실익도 사라지는 거죠.
일단 이 사례에 한정해서는 힘의 균형이 자본 제공자(VC)에서 자본 생성자(기업)로 완전히 넘어가는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투자자가 “언제 엑싯 할 거냐?”고 물었다면, 이제는 스트라이프가 “우리가 좋은 가격에 엑싯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하는 구도가 된 셈입니다.
데이터브릭스(Databricks)
수익성을 달성한 거대 비상장 기업이 어떤 길을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데이터브릭스(Databricks)입니다. 스트라이프와 마찬가지로 1,00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데이터브릭스 역시 현금흐름 흑자를 기록하고 있죠. 하지만 데이터브릭스의 선택은 스트라이프와 약간 다릅니다.
- 스트라이프(자본 환원): 자사주 매입을 통해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주고, 소유 구조를 공고히 하는 가치 실현 및 통합 전략
- 데이터브릭스 (자본 확충): 운영 자금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10억 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시리즈 K)를 유치해 AI 경쟁 자금을 비축하는 공격적인 확장 전략
이런 전략적 선택은 각 회사가 자신의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죠. 스트라이프의 자사주 매입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시장의 리더로서 외부 변수 없이 내실을 다지겠다는 판단이 깔려있습니다. 반면 데이터브릭스의 자금 조달은 AI 시장이 아직 승자독식의 출혈전쟁 단계에 있으며, 미래의 지배력을 위해 지금 공격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반영하는 거죠.
두 회사 모두 투자자들의 인내심 관리라는 공통된 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스트라이프는 직접적인 현금 보상으로, 데이터브릭스는 AI라는 거대한 성장 스토리를 제시하며 더 긴 시간을 벌고 있는 겁니다.
영원한 비상장
스트라이프와 같은 소위 주권 유니콘(Sovereign Unicorn)의 등장은 비공개 자본 시장 생태계 전체가 성숙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과거에 IPO는 성공한 기업의 유일한 목적지였지만, 이제는 수많은 대안이 생겨났죠.
2차 시장(Secondary Market) 플랫폼인 Forge, Hiive 등은 비상장 주식을 위한 준 증권거래소 역할을 하며 직원과 초기 투자자들에게 유동성을 제공합니다. 또한 2012년 제정된 JOBS Act는 기업이 SEC에 의무적으로 실적을 보고해야 하는 주주 수 기준을 500명에서 2,000명으로 완화하면서 대규모 비상장 기업이 더 오래 비공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적 환경을 만들어주었죠.
즉, 과거처럼 회사가 자본 시장(IPO)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본 시장이 회사로 직접 찾아오는 구조가 만들어진 겁니다.
IPO 시대의 종말?
그렇다고 스트라이프의 행보는 IPO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대다수의 스타트업에게 IPO는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자금 조달 창구이자 최종 목표로 남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 산업의 최상위 계층, 즉 압도적인 수익성과 시장 지배력을 가진 유니콘들에게 IPO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상장으로 인한 단기 실적 압박과 규제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시간표에 따라 장기적인 비전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죠.
스트라이프의 자사주 매입은 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혁신과 자본의 관계가 재정의되면서 차세대 유니콘들이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소유 구조를 형성해 나갈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만 투자자로서는, 이 움직임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네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