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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팔 민주주의가 군사 쿠데타나 내전이 아닌 Z세대가 주도한 디지털 반부패 운동으로 무너졌습니다(New York Times). 총리가 사임하고 정부가 붕괴하기까지 이 모든 운동의 지휘 통제소는 비밀 본부도, 광장도 아니었죠. 바로 원래 비디오 게이머들을 위해 만들어진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디스코드(Discord) 서버였습니다. 한 현지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지금 네팔의 국회는 디스코드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던 겁니다.
게이머들의 놀이터에 불과했던 디스코드가 어떻게 전 세계 정치판을 뒤흔드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플랫폼의 독특한 구조는 왜 한쪽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혼돈을 만들어내는 양날의 검이 되고 있는 걸까요?

게이머들의 놀이터에서 정치의 무대로
디스코드의 시작은 사실 게임 개발의 실패에서 비롯됐습니다. 2014년, 디스코드 창업자들은 게임을 만들다 기존의 음성 채팅 프로그램(스카이프 등)이 너무 무겁고 불편하다는 점에 착안해 게이머들을 위한 가볍고 안정적인 소통 도구를 만들기로 방향을 틀었죠.
2015년 출시된 디스코드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게임을 넘어 스터디 그룹, 스타트업 등 온갖 종류의 커뮤니티가 디스코드로 몰려들기 시작(저도 디스코드를 통해 DAO 프로젝트와, 창업 협업툴을 진행했었죠)했죠. 결국 2021년, 회사는 슬로건을 '게이머를 위한 채팅'에서 '커뮤니티와 친구를 위한 채팅'으로 바꾸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했습니다. 사용자들이 먼저 플랫폼의 용도를 바꾼 뒤 회사가 뒤따라온 셈입니다.
디스코드가 이렇게 다양한 그룹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 핵심 구조인 '서버' 때문입니다. 디스코드 서버는 단순한 단톡방이 아니죠.
- 채널: 서버 안에 주제별로 수많은 텍스트, 음성, 포럼 채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보의 혼선을 막고 체계적인 소통이 가능
- 역할과 권한: 사용자별로 '관리자', '팀장', '일반 멤버' 등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고, 각 역할마다 채널 접근 권한이나 메시지 관리 권한 등을 세밀하게 설정
- 하이브리드 소통: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음성 채널은 실시간 소통에, 검색 가능한 텍스트 채널은 기록과 비동기 소통에 유리
이런 디테일한 조직 관리 기능은 텔레그램이나 페이스북 그룹 같은 다른 플랫폼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디스코드만의 강력한 차별점입니다. 사실상 현실 세계의 조직 구조를 그대로 온라인에 구현할 수 있는 툴을 제공하는 거죠. 그래서 많은 크립토 프로젝트들이 디스코드에서 진행되기도 했죠.
네팔의 디스코드 혁명
이런 디스코드의 특성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네팔 사례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케이스입니다.
정부가 페이스북, 디스코드 등 소셜 미디어를 차단하자 이에 분노한 네팔의 Z세대는 디스코드 서버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부패에 반대하는 청년들'이라는 서버에는 순식간에 13만 명이 넘게 모였죠. 이들은 디스코드를 단순한 시위 독려 공간이 아니라 효과적인 디지털 지휘 통제소로 활용했습니다.
- #공지사항 채널에서는 시위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 #팩트체크 채널에서는 가짜뉴스를 걸러내고,
- #현장상황 채널에서는 실시간으로 현장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고,
- #긴급도움요청 채널에서는 의료 및 법률 지원을 연결했습니다
이런 체계적인 움직임은 결국 총리 사임과 정부 붕괴라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죠.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이 디스코드 서버는 임시 국회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군부와의 교감 아래 서버 내에서 토론과 온라인 투표를 통해 임시 총리 후보를 선출했고, 이 과정은 네팔 전국에 방송되기까지 했죠.
하지만 이 디지털 민주주의의 실험은 곧바로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갔습니다. 익명성과 탈중앙화라는 디스코드의 특성은 운동을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이끌었죠. 서버 내에서는 "기관총을 원한다", "장관 집에 화염병을 던지자"는 극단적인 메시지들이 쏟아졌고, 실제로 방송국과 정부 건물에 대한 방화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주최 측조차 이 폭력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거죠. 네팔 사태는 디스코드가 리더 없는 대규모 운동을 조직하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그리고 동시에 그 운동이 얼마나 쉽게 통제 불능의 혼돈으로 빠져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글로벌 정치의 새로운 전쟁터
네팔의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디스코드가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이미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념과 상관없이 조직화를 원하는 모든 그룹에게 디스코드는 매력적인 플랫폼이죠.
미국 대선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각각의 서버를 만들어 정치적 에코 챔버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선거 이슈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브라질에서는 극우 세력이 청소년들을 급진화시키는 통로로 디스코드를 활용하는 동시에, 진보 시민 단체는 바로 그 공간에 뛰어들어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역공을 펼치기도 하죠.
유럽의 진보 운동가들은 디스코드를 '분산된 자원봉사자 관리 플랫폼'으로 활용하며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는 내부 도구로 적극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조직화의 힘이 극단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익명성, 분산된 관리 구조, 그리고 젊은 남성 중심의 사용자층이라는 특성 때문에, 디스코드는 오랫동안 극우 백인 우월주의, 네오나치, 이슬람 극단주의 등 각종 혐오 세력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이런 집단들은 비공개 서버를 만들어 신입을 모집하고, 외부의 감시를 피해 혐오 콘텐츠를 공유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계획합니다. 2022년 미국 버팔로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디스코드에 계획을 기록하고 범행을 예고했던 것이나, 2023년 미군 기밀문서가 디스코드를 통해 유출된 사건은 이 플랫폼의 위험성이 더 이상 온라인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죠.
통제 불가능한 양날의 검
결국 우리는 디스코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플랫폼의 구조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 커뮤니티의 목적이 선한지 악한지는 가리지 않죠.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처럼 중앙에서 강력하게 콘텐츠를 통제하는 모델과 달리, 디스코드의 관리는 기본적으로 각 서버 운영자라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커뮤니티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수백만 개의 서버에서 일관된 안전 기준을 유지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시간 음성 채팅이나 외부 개발자가 만든 수많은 봇들은 디스코드 본사조차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렵죠.
네팔 사태는 디지털 플랫폼이 단순히 정치를 논하는 공간을 넘어,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는 무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디스코드는 바로 그 무대 전환의 중심에 서 있죠. 이 강력하면서도 통제하기 어려운 양날의 검을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이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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