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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7월 31일, 피그마(Figma)가 드디어 뉴욕 증권거래소에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죠. 공모가는 주당 33달러였는데, 거래 시작과 동시에 85달러로 튀어 오르더니 장 마감 때는 115.50달러를 기록했습니다. 하루 만에 250%가 폭등한 겁니다. 이 질주 덕분에 피그마의 시가총액은 단숨에 670억 달러 수준으로 불어났습니다.
물론 피그마가 엄청난 회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매출은 46%씩 성장하고 있고, 91%에 달하는 경이로운 매출 총이익률에, 심지어 이미 흑자를 내고 있는 알짜 기업이니까요. 하지만 하루 만에 기업가치가 3배 넘게 뛰는 게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까요? 이 광적인 열풍,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이 모습은 마치 2020년 9월, 데이터 클라우드 기업 스노우플레이크(Snowflake)의 IPO를 보는 듯한 데자뷔를 느끼게 합니다. 당시 스노우플레이크 역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소프트웨어 IPO라는 찬사를 받으며 시장에 등장했죠.
(상황에 대한 분석일 뿐, 매수매도에 대한 추천은 아닙니다)
데자뷰
피그마의 첫 거래일 풍경은 2020년 9월 스노우플레이크의 IPO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 광적인 첫날: 스노우플레이크는 공모가 120달러로 시작해 첫날 253.93달러로 마감하며 112%의 팝(pop)을 기록했습니다. 피그마는 그보다 더한 250%의 상승률을 보였죠.
- 천문학적인 밸류에이션: 스노우플레이크는 상장 첫날 시가총액 704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당시 연 매출의 176배에 달하는, 그야말로 미친 밸류에이션이었습니다. 피그마는 어떨까요? 170배까지는 아니지만 상장 당일 시가총액 670억 달러, 연 매출 대비 82배라는 엄청난 평가를 받았죠
- 시장은?: 당시 애널리스트들은 스노우플레이크를 향해 "경이롭다",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이라면서도 "클라우드 데이터라는 올바른 시장에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피그마를 향한 시장의 언어도 "버블 같다"와 "세대 교체 SaaS 기업"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며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폭등주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수익성이죠. 스노우플레이크는 상장 당시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 반면, 피그마는 이미 GAAP 기준 흑자를 내고 있는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이 차이가 앞으로 두 회사의 주가 경로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요?
좋은 회사가 좋은 주식은 아닐 수 있다
스노우플레이크의 IPO 이후 여정은 피그마 투자자들에게 참고할만한 교훈을 줍니다.
상장 첫날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주가는 2021년 11월 400달러를 넘어서며 최고점을 찍었지만, 이후 시장 분위기가 바뀌고 고평가 논란이 불거지면서 곤두박질쳤죠. 심지어 2022년에는 공모가인 120달러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상장 첫날 종가(약 250달러)에 1만 달러를 투자했다면, 그 후 2년 반 동안 회사는 계속해서 엄청난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금은 35%나 줄어들었을 겁니다. 스노우플레이크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업이라도 너무 비싼 가격에 사면 좋은 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초기의 밸류에이션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주가는 그 후 몇 년간 새로운 성장을 반영하는 대신, 회사의 펀더멘털이 부풀려진 초기 밸류에이션을 따라잡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마치 너무 큰 옷을 사서 몸이 클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요. 이 고통스러운 '밸류에이션 리셋' 과정은 이제 피그마가 마주해야 할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상장 첫날에는 사지 마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겠죠.
피그마는 다를까?
그렇다면 피그마도 스노우플레이크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될까요?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피그마는 이미 수익을 내고 있는 회사라는 강력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노우플레이크가 '성장'이라는 꿈을 팔았다면, 피그마는 '성장하는 흑자 기업'이라는 훨씬 더 안정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죠. 시장이 불안정해지거나 금리가 오르는 시기에도 스스로 돈을 버는 기업은 어느정도 밸류를 지켜낼 수 있죠.
또한, 피그마의 비즈니스 모델(구독 기반 SaaS)이 스노우플레이크(사용량 기반)보다 매출 예측이 더 쉽고 안정적이라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입니다.
하지만 이런 펀더멘털의 차이가 상장 첫날의 광기를 모두 정당화해주지는 못합니다. 피그마의 폭등 뒤에는 몇 가지 기술적인 요인들도 숨어있었죠.
- 품절주 효과: IPO 때 시장에 풀린 주식 물량이 전체 주식의 8%에 불과했습니다. 공급은 적은데 사려는 사람이 몰리니 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죠
- AI라는 마법의 단어: 피그마는 투자설명서(S-1)에 AI라는 단어를 150번이나 언급하며 자신들이 AI 기업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습니다. AI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자하는 시장 분위기에 제대로 올라탄 겁니다
- 밈 주식 현상의 재림: 똑똑한 개인 투자자들, 특히 스타트업, 테크 업계 종사자들에게 피그마는 이미 사랑받는 제품이었습니다. 여기에 어도비의 인수 시도를 이겨낸 언더독 스토리가 더해지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폭발했죠
어도비의 피눈물
뿐만아니라 피그마의 IPO가 이토록 뜨거웠던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실패로 끝난 어도비(Adobe)와의 빅딜이 있습니다. 몇번 다뤘었죠. 2022년, 어도비는 무려 200억 달러에 피그마를 인수하려 했지만 유럽과 영국의 규제 당국이 "경쟁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며 제동을 걸었고, 결국 이 M&A는 2023년 말 무산되었습니다.
IPO 후에 돌아보면, 규제 당국이 M&A를 반대한 논리는 피그마의 기업가치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공식적으로 "피그마는 명백한 시장 선도자"이며, "이 인수는 어도비의 핵심 사업(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에 대한 미래의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역 킬러 인수(reverse killer acquisition)'라고 규정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 최고의 규제 기관이 "피그마는 앞으로 어도비 제국을 위협할 만큼 혁신적이고 강력한 회사"라고 공인해 준 셈입니다.
업계 리더인 어도비가 제시한 200억 달러라는 가격은 피그마 가치의 강력한 심리적 하한선이 되었고, 규제 당국의 반대는 그 가치가 200억 달러를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는 공식 인증서가 되어주었죠. IPO 공모가가 193억 달러로 정해졌을 때, 많은 투자자들이 '바겐세일'이라고 느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어도비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거구요.
세일 기간은 언제일까
정리해보죠. 피그마는 의심할 여지 없이 A+ 등급의 훌륭한 기업입니다. 하지만 상장 첫날 시장이 매긴 가격표는 A+++였죠. 마치 스노우플레이크 때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노우플레이크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인내심입니다. 지금 당장 이 뜨거운 파티에 뛰어들기보다는, 첫날의 광기가 가라앉고, IPO 이후 내부자들의 보호예수 물량이 풀리면서 주가가 조정을 받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피그마라는 명품을 사는 것은 좋지만 정가보다 훨씬 비싼 웃돈을 주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누구도 단기간의 가격변동은 예측할 수 없죠. 여기서 훨씬 더 높은 가격으로 뛸 수도 있구요. 다만, 기업의 진짜 가치(Value)는 시간이 증명해 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분명 더 합리적인 가격에 이 훌륭한 기업의 주주가 될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스노우플레이크의 기억은 우리에게 바로 그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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