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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봉이들 그리고 예비 다봉이들께!

2024년 5월 6일, 서른다섯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4.05.06 | 조회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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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문학을 전공한 PD. 외롭지 않고 싶다면 함께 읽어요. 다정함의 순간을 봉안해 드릴게요.

메일에서 여셨다면 '🌐웹에서 보기' 꼭 눌러주세요!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라는, 제목을 보면서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무거움을 견딜 줄 아는지 5월 6일의 편지, 새삼 5월인 날의 편지.

 

반려돌 씨 그리고 아보
반려돌 씨 그리고 아보

PD가 되어 좋은 점은 다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이름 석 자 뒤에 붙는 호칭을 얻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어떤 PD’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어떤’을 매일 조금씩 채운다. 나를 향해 ‘PD님’이라고 누군가 말을 걸 때, 그 앞에 자연스레 응답하기 위해 매일 무언가를 배워나간다.⠀

존경하는 리베카 솔닛은 ‘운명대로 산다’고 말한다. 이는 한 사람의 성품과 목적을 바꾸려고 드는 ‘힘’들이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음을 뜻한다고 한다. 더불어 그녀의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그렇다면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삶을 구성하는 세밀한 조각까지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지 않는다. 모든 의미부여에 애를 썼던 어린 시절이 지금의 내겐 결과론에의 순진했던 매몰로 기억될 뿐이다. 그보다는 두 팔 벌려 우연을 환영한다. 나를 저지하는 힘들에 굴복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헤쳐나가는 쪽에 가깝다. 나는 무수한 사건과 만남을 통해 점차 무엇으로 형성돼가고, 그건 우연이었으나, 결국 내가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이 된다. 그러니까 삶은 ‘지나고 보니 그랬더라’는 식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매순간의 흔쾌하고 때론 뼈아픈 수용을 통해 결국 운명이 되어가는 구성체다.⠀

‘PD님’보다 ‘막내’로 좀더 자주 불리는 요즈음. 나는 고민한다. 언젠가 일이 권태가 될까봐, 이상과 현실의 벽에 마주할까봐, 불친절이나 무례함에 겁을 먹을까봐, 지루함과 고통으로 힘겨워질까봐. 그러나 솔닛은 내게 페소아의 말을 전한다.⠀

“길에 돌이 있다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주워 간직한다. 그랬다가 언젠가 성을 지을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솔닛은 자신의 책을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이라고 소개한다. 문득 알게 된다. 걸려 넘어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운명대로 사는 사람은 길 위의 돌을 피하지 않는다. 권태와 불친절, 무례함, 지루함, 고통이 모두 하나의 성을 이룬다. 그것은 내게 ‘멋진 운’이 된다.⠀

걸려 넘어지는 내 삶을 표현해낼 방법을 늘 찾고자 한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처럼. 미세하게 금간 마음들에 스스로의 언어로 대답하기 위해서. 그게 바로 PD라는 호칭 하나를 겨우 얻은 내가, 다시 꿈꾸는 일이고, 끝내 종결될 수 없는 하나의 목표다.⠀

솔닛과 멋진 나의 선생들처럼, 많고 많은 선배들처럼,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언젠가부터 나는 이야기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자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받는 사람이었음을. 환대가 나를 에워쌌고, 그것은 진동하는 내 이야기의 몰락을 막고 있음을. 무엇 하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삶, 그 가운데에서도 선물처럼, 아니 운명처럼, 꿈과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좌절마저 간직해온 내가 짓고 있는 이 견고한 성에 그 모든 것들이 있다

(24.4.12)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제멋대로 이름 붙인 갈색 강아지 초코와 인사하고 회사로 향한다. 오른편의 골목을 바라보면 나의 철없고 겁 없는 날들이 한눈에 보이고, 걷고 걸어 1층 문을 열고 들어갈 즈음, 나와 이 직장의 연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 그 몇 안 되는 방문들이 떠오른다.

안국역 부근에서 일한다는 것. 적어도 내 삶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의 것. 10여 년 전부터 수도 없이 오갔던, 모난 구석 하나 없이 나의 눈과 마음이 안착할 수 있는 유일한 동네가 바로 이곳이므로. 10대 중후반부터 혼자서도 성큼 찾아갈 수 있게 된 삼청동과 인사동은 내 자아의 정교한 뿌리를 만들었으리라. 나는 늘,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안국역으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취업과 별개로 내겐 뜻밖의 신기함이었고. 혹여 잦은 머무름으로 질려버릴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이 사랑스런 동네에서의 점심이 매일 가능함에 나는 부풀고 부푼다.

그러나 과거의 내 얼굴을 오래 응시하지 않는다. 스물셋, 넷, 다섯을 건너오며 나는 더 이상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라는 박완서의 문장을 곱씹을 필요가 없었다. 내 감정의 전반을 지배하던 그리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무언가를 이룰 미래만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 미래에 나는 당도하였고. 그렇게 안국역 출구를 빠져나오는 내 얼굴에서 낯섦을 발견한다. 매일. 그것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이고 처음 보는 상황이며 지위다. 아주 오랫동안 둑처럼 가두어져 있던, 응어리진 마음들은 사라져있다. 설명하기 힘든 홀가분함과 최초로 마주한 스물다섯이다.

나이로 나를 소개할 일이 많아지고, 긴 삶의 경력을 쌓아온 이들을 매일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을 짐작하며 스물다섯의 나를 바라본다. 나를 떠나버린 그리움이 다시 자욱해질 그런 때가 올 것으로 예측하면서.

불안과 후회와 긴장이 존속하나 이제 그것들은 나를 잡아먹지 못한다. 미래가 현재로 변모한 지금. 나는 충분히 기쁜 것 같다. 쉽게 단언하지 못하는 까닭은 역시 사랑과 여유에 흠뻑 젖지 못하는 습성 때문이다. ‘넌 지금을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맘껏 즐기고 누리길’ 바란다는 누군가의 당부에 그 고집스런 습성을 깨닫는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 앞 단골 가게에서 나의 변화를 감각한다. 그처럼 안국역의 내 얼굴이 낡아갈 때, 결국 오늘을 그리워할 테니, 충실하게 행복해보려 한다. 선물 받은 허수경의 시집에는 온통 그녀가 머무른 시대와 거리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그녀 없는 세상에 아직 젊은 채로 남아있는 나는 나의 시대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거쳐간 상실과 목도한 고통을 펼쳐본다. 쓰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이 내 시대의 언어가 될 것이다. 기쁠 일이 많음에도 저 혼자의 안온보다 연대로 거머쥔 희열을 그리워하고 싶다. 눈물이나 끈적한 땀으로 그 희열을 계속 찾고 싶다. 내 존재의 윤리에 질문하고 싶다. 가장 행복한 날에. 그런 날들이 빚져온 나의 과거와 타인의 뒷받침을 잊지 않으면서.

나를 대하는 모든 이들이 내겐 하나의 교본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이며 어리고 약한 자를 어떻게 마주할지 다짐한다. 권력이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그 현장에서 덤덤히 살아남으려 한다. 주저 앉아 보았고 때로 살기 싫었기에, 또 당신들을 잃었기에 비로소의 오늘이 되었으며 그런 오늘 내가 웃고 있다. 값진 휴일처럼 삶의 곡절 속에 슬플 수 있어 기쁜 날들이. 여기 있다고 내게 없는 당신에게 매일 말하고 있다.

(24.4.20)


웃던 내가 울고 울던 내가 웃을 때 나라는 사람을 생각한다. 그런 가변적인 존재, 무례함도 익숙해진다, 하루 지난다, 눈물보다 헛웃음으로 달랜다, 누군가 나를 비웃을 때마다 모든 배경화면에 자리잡은 당신을 떠올린다.

떠나지 않길 바랬던 것은, 절대적으로 사랑해줄 한 사람의 소거를 원치 않았던 욕심, 그러나 어린 내 삶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 눈앞엔 우리의 20년도 더 지난, 사진만이 남아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매우 조건적으로, 한시적으로. 삶의 전부 아니 한 나절조차 온전히 할애될 수 없는 사랑, 평가와 검열을 거친 사랑, 당연하게 얻을 수 없는 존중, 그럼에도 그 안에서 나는 웃고, 울고,

조건부의 매분 매초가 지나간다, 여기 없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의 기쁨과 슬픔 모두 견디면서.

(2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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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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