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첫 번째

세점사이의 첫 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09.05 | 조회 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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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첫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사실 출근길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보내드리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사상 최악의 태풍이 다가오는 날에 첫 편지를 보내게 되었네요. 모두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작업실에서 나와 바라본 하늘
작업실에서 나와 바라본 하늘
청계천입니다.
청계천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낙산공원으로 뛰어올라갔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낙산공원으로 뛰어올라갔습니다.

금요일의 해 지는 하늘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왔더니 하늘이 심상치 않아 작업실로 곧바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뛰쳐나왔습니다. 태풍이 오기 전의 하늘은 유난히 장엄한데, 그래서 더 긴장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 지금 하늘은 어떤가요? 저도 아직 겪지 않은 시간이라 궁금합니다. 인사가 길었네요. 첫 글을 보내드립니다. 간단한 에세이입니다.


솔직한 노래를 찾아서

 

열네 살 때는 힙합을 좋아했다. 주변에서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 물으면 언제나 대답은 힙합. 유노왓, 발라드는 다 가짜야. 물론 한 명의 청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힙합기는 정식으로 포함된 한 단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내가 힙합을 듣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좋아하는 애에게 찬송가를 불러주려고 했던 크리스찬 차일드였으니 더 할 말조차 없는 셈이다. 애창곡은 에픽하이 랩 파트가 빠진 ‘윤하의’ 우산이었다. 그러므로 표현을 엄밀히 하자면 나는 힙합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 열네 살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내가 힙합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들킬 수 없었으므로 나는 더 큰 목소리로 힙합 만세를 외쳤다. 에미넴, 에픽하이, 엠씨 스나이퍼……. 이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딱 하나. 가사에 욕이 나와서. 엠씨 스나이퍼의 안양 일번가는 항상 나의 찬양의 대상이었는데 왜냐면 내가 특정 부분에 욕이 나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에미넴의 곡은 Stan 밖에는 들어본 적 없지만 그 사람 노래에 욕이 나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들어서 좋아했다. 외국 노래에는 이렇게 욕도 공공연히 나오는데, 하면서. 에픽하이를 좋아했던 이유는 더 어이가 없는데 에픽하이의 뒷담화라는 곡에 욕이 나온다는 사실을 어디서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곡은...우산과 평화의 날밖에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이런 알맹이라곤 없는 힙합사랑꾼 행세는 당연히 금방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봉사시간을 채우러 지하철 봉사를 갔는데, 거기에서 근무하던 공익근무요원이 나한테 말을 붙였다. 요즘 친구들은 음악 뭐 들어? 저요? 저는 에픽하이 좋아해요!

그는 그 말에 감격한 듯 보였다. 이야, 나도 에픽하이 진짜 좋아하는데. 너 어떤 거 좋아하니? 그는 신나서 MP3를 꺼내 나에게 에픽하이의 곡을 들려줬다. 이거 알아? 당연히 몰랐다. 이건? 당연히 몰랐다. 그러면 이거는 알지? 당연히 몰랐다. 그러면 뭐 좋아해? 저는…그…그…나는 당시 애창곡이 우산이라는 사실을 말하면 가짜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몰라요. 그리고 깊은 실망. 그럼에도 나는 힙합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사랑노래가 싫었다. 왠지 그건 솔직하지 않은 이야기 같았다.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 남들이 쓰니까 의례적으로 쓰는 이야기 같았다면 적절할까? 그렇다고 딱히 주변의 사랑을 못 받거나 하던 시기는 아닌데, 그냥 주류 감성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사랑노래를 쓰지 않으면 그 대신으로 무엇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욕을 좋아했던 걸까? 무작정.

그냥 남들의 말을 듣는 게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들이 맘대로 하라고 놔둔다고 맘대로 할 수 있는 타입의 애도 아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심심하면 찬송가를 부르는 크리스찬 베이비였다.

 

지금은 사랑노래에 환장을 한다.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한밤중에 헤드뱅잉을 하고 사랑노래를 부르면서 지하철에서 혼자 탭댄스를 춘다. 밤은 당연히 샌다. 콘서트에 가서는 사랑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레한다. 종종 인터넷에서 뻔한 사랑노래가 지겹다고 말하는 걸 볼 때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더 성숙해야 청승맞은 사랑 이야기를 싫어할 수 있을까, 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그러고서 청승맞은 사랑노래를 흐느끼듯 부른다.

사랑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라이프스타일 잡지나 블로그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흔한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 다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다 비슷비슷해 보여도 각자의 삶이 가진 생활감에서 오는 디테일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방식으로 청승맞은지, 어떤 방식으로 좋아 죽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상상된다. 조금 가까워진다 싶으면 사람들이 다들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서로가 놀랍도록 비슷해 공감대 형성이 쉽고 이야기의 범주는 그럼에도 놀랍도록 다양하다.

 

사실 아직 사랑에 대한 글을 써본 적은 없다. 사랑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기도 하고, 그러므로 정의는 더더욱 내릴 수 없어서다. 특히나, 사람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부분까지 포함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글들은 좋아한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서 풀어놓을 때면 그 이야기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애정, 자신의 삶에 대한 부분들을 모두 훑은 뒤에, 그것을 되돌아보며 비로소 사랑이라는 요약을 붙인다. 사랑에 대해 확언하지 않으면서 나중에야 깨닫는 무언가.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랑 노래의 가사들도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말하는 로맨틱 코미디와는 다른 무언가의 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 쓰거나 노래하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너무 넓은 세계를 포함하는 일이고, 누구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생활, 가장 부끄러운 감정의 일부를 포함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일단 그럴 용기가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포장해서 내놓기도 아직 벅차 말들 사이에 적당한 거짓말을 섞는다.

 

열네 살때는 사랑 노래가 솔직하지 않은 이야기 같아서 싫었다. 그 때의 내가 욕을 추앙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화내고 욕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됨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화를 하면서 일부러 욕을 섞었다. 일부러 크게 말했다. 하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들이 과연 진실함일까, 하는 생각을 요즘에 와서야 종종 한다.

욕을 섞지 않았더라면 할 수 있었을 더 많은 말들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엉망이 되었던 대화들, 전하지 못했던 마음들. 해야 했던 말들을 감추느라 두껍게 싸맸던 것들. 결국 나는 솔직함을 숭상한다며 더 솔직하지 않은 곳으로 숨었던 것이다. 물론 힙합을 좋아하고 욕설의 맥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네 살의 나는 그랬다는 얘기다. 욕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게 된 이후로도 욕을 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을 뿐 나는 그런 식으로 항상 비슷했다.

 

스물일곱에는 청승맞은 사랑노래가 좋다. 자신의 일상과 그에 녹아든 사랑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좋다. 이제 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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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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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굴

    0
    over 1 year 전

    솔직한 글이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ㄴ 답글 (1)
  • 훵붱

    0
    over 1 year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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