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두 번째

세점사이의 두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2.09.12 | 조회 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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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두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출근길에 읽을 수 있는 뉴스레터를 보내드린다는 선언이 무색하게, 두 번째 뉴스레터는 공휴일에 보내게 되었네요. 물론 저는 이 시간에 아마 출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작업실로 쓰고 있는 무신사 스튜디오는 일몰 맛집이에요. 나가는 길에 늘 멋진 빛을 봅니다.
지금 작업실로 쓰고 있는 무신사 스튜디오는 일몰 맛집이에요. 나가는 길에 늘 멋진 빛을 봅니다.

요즘의 저는 여러 모로 새로운 것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을 얻은 것도 그 일환이구요. 지금 하는 게 사실 완벽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에 하던 것들에 아주 약간의 힘을 더했을 뿐인데 생각하지 못한 과제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런 의미에서 생소한 시선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냅니다.

성북천 인근입니다. 학교 근처인데 정작 이쪽을 가본 적은 없었어요.
성북천 인근입니다. 학교 근처인데 정작 이쪽을 가본 적은 없었어요.
4호선 오남역 부근입니다. 종점 바로 앞 역이에요. 완전히 대자연이죠? 나중에 여기서 사진을 제대로 찍어볼까 싶어요.
4호선 오남역 부근입니다. 종점 바로 앞 역이에요. 완전히 대자연이죠? 나중에 여기서 사진을 제대로 찍어볼까 싶어요.
지금까지 동대문은 항상 용건이 있어서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완전히 해가 지거나, 완전히 밝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에서 마주했어요. 하지만 이곳에 상주하는 요즘, 굉장히 다양한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블루아워 동대문.
지금까지 동대문은 항상 용건이 있어서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완전히 해가 지거나, 완전히 밝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에서 마주했어요. 하지만 이곳에 상주하는 요즘, 굉장히 다양한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블루아워 동대문.
어디인지 감도 안 오는 사진이죠? 충무로입니다. 충무로는 많이 다녔는데 이런 구조물은 처음 봤네요 저도.
어디인지 감도 안 오는 사진이죠? 충무로입니다. 충무로는 많이 다녔는데 이런 구조물은 처음 봤네요 저도.

아휴 말도 많다. 두 번째 글을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두 문단의 눈뭉치

 

한국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데 한국 사람 글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자주 느낀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테가 나는 멀끔한 글인지 판단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두 문단 정도다. 워드를 켜고 그 정도를 타이핑하고 나면 이 글이 과연 제대로 완성될 만한 글인가에 대해 얼추 감을 잡는다. 거기에서 멈출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 감은 높은 확률로 잘 맞아떨어지지만 미련은 보통 판단을 앞선다. 쓰는 입장에서, 별로인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완성하기까지 드는 시간이 잘 쓰인 글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괜한 생각을 버리고 글을 날려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시그널이 왔다고 해서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취할 수 있었다면 내 삶이 이 꼬라지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성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기분은 곧장 우울해진다. 그럴 때면 내가 더 나은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은 안다. 부질없는 생각을 붙들고 있는 것은 그게 글감으로 쓸 만한 것이 아닌 이상은 별 의미가 없다. 이왕 할 생각이라면 글의 소재로 써먹을 만한 건덕지가 있는 편이 낫다. 

 

글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글 하나를 마치고 나면(혹은 중간에 덮어버리고 나면) 무엇을 쓸지 생각해야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은 정리 안 된 서랍장을 뒤지는 느낌을 준다. 나는 그렇게 손에 잡히는 것들을 주머니에 넣어가며 두 문단의 글쓰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거다, 싶은 것들이 찾아온다. 그래, 내가 이런 걸 찾으려고 여태껏 그렇게 쑤석거렸지. 접신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 적절할까? 

텍스트가 텍스트를 끌어오는 과정이 눈에 보일 때면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서랍장 뒤지기는 언제나 심리적 뒤집기의 연속이다. 어떤 순간 나는 내가 한없이 멍청해 보이다가 어떤 순간 나는 또 내가 천재라도 된 기분을 느낀다.

물론 쉽게 쓰이는 글이라고 해서 그 글이 좋은 글이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도저히 이어나갈 건덕지가 없어 고뇌하는 것과, 어떤 것이 최선의 이음매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에 힘이 붙는다는 것은 속도보다는 가시거리의 문제에 가깝다. 글에 막 굉장한 내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서랍장을 뒤져가면서 느낀 건 있다. 대체로 어떤 글감들이 시야를 제공하고, 어떤 글감들이 시야를 제공하지 않는지. 

 

가장 주요한 차이는 구체적인 일화의 존재 여부였다. 나는 이걸 알맹이라고 부른다. 구심점이라고 정의를 하면 좀 더 똑똑해 보일까? 이건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드는 일과 비슷했다. 빈 땅에서 눈을 무작정 긁어서 눈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눈덩이를 하나 만들어 그걸 눈밭 위에 굴릴 수 있다면, 눈사람은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진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눈이 매일 오거나, 눈이 언제나 쌓이지는 않는다는 점 정도? 사실 일 년 중에는 눈이 오지 않는 날들이 더 많다. 어쩌다 한 번씩 손에 잡히는 일화들이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순간들을 기억, 혹은 기록해 두었다가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을 언제나 부러워하고 있다. 그들이 일상의 작은 부분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어떤 온기가 느껴진다. 그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생생하고 꾸준한 관찰을 해낼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써낼 수 있을 만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들의 글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동원하는 공허한 사설들이 없다. 그들은 상황을 따뜻한 눈으로 서술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 이야기 안에 잔잔하게 담겨 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우아해 보여서 따라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스타일의 글쓰기를 실제로 몇 번 시도해 보았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도의 성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몇 문단도 가지 못하고 원래 스타일대로 회귀해 버렸기 때문이다. 가본 적이 없는 길이라서 그럴까? 나는 도저히 그렇게 글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두 문단 분량의 사설이 이야기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끼어들어 있었다. 몇 번 더 시도하다가 그런 글들은 읽기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단순히 쓰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일상의 단면을 상세히 묘사하는 글을 써보고자 시도면서 나는 여러 가지 고민이 생겼다. 우선, 내가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 타인의 삶의 일부를 천연덕스럽게 내 글에 등장시켜도 되는 걸까? 캔디드 사진은 사진계에서 여전히 큰 논쟁거리가 된다. 그것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 싶었다. 

이러한 글로 유명한 몇 작가들은 자신의 글이 사실상 픽션에 가깝다고 말하며 수정과 가공을 통해 이 문제를 파훼했다. 하지만 그런 걸 시도하다 보면 또 다른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 삶을 쓰는 게 맞나? 그런 고민들 사이에 커서가 갇혀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단호하게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들이 존경스러워진다. 내 우유부단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 결단이란!

그럴 만큼의 단호함이 없는 나는 항상 껍데기를 까는 일을 한다. 알 수 없는 포장지에 싸여 있는 생각들을 줍고, 그것들을 정리하고, 일화들을 떠올리고, 연결하고, 거기서 다른 곳으로 생각을 뻗어내고. 그렇게 두 문단쯤 쓰고 이게 과연 완성될 수 있는 글인지 생각하고, 그러다가 또 지울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완성하고, 후회하고, 행복해하고.

 

사는 것이 언제나 팍팍하지는 않았다. 유달리 삶이 힘을 얻을 때가 있었다. 엄청나게 원기가 넘치고, 그런 시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말로 뱉으려고 하니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가 그랬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명확하게 잡혀 있다 보니 삶이 아주 심플해서 좋았다. 아침에 등교를 해서 정해 둔 분량의 공부를 하다가 집에 와서는 잠을 잤다. 토요일에는 자습이 끝나고 학원에 갔고 일요일에는 컴퓨터 게임을 했다. 수능 점수 말고는 다 예측가능했다. 그게 참 좋았다. 몸이 힘든 것은 좀 별개의 문제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몸이 대충 여느 때와 비슷비슷하다면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그 이후에는 2019년 즈음에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때도 여전히 바쁘긴 했지만 역시 삶은 심플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아침엔 교내 연구소 조교보 일을 했고 저녁엔 국어 수업을 했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돈을 모았다. 빈 시간을 끄집어낼 수 있을 땐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물론 일련의 공부나 노동 자체가 즐거웠던 건 아니지만. 세상의 누가 아침부터 형태소가 어쩌고를 보고 있는 걸 즐기겠어.

그 날들을 이어가는 데에 힘이 붙었던 것에는 삶의 예측가능성과 심플함이 크게 기여했지만 한편 그 시기의 나에게 있었던 구체적 에피소드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짧은 여유동안 즐겼던 게임 한 판이나, 촬영 중 있었던 해프닝들, 혹은 다음 해에 독일에 가서 해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꿈들. 

 

여전히 게임을 하고 사진을 찍지만 그 때의 경험들처럼 구체성이 있지는 않다. 내일이 정해져 있었기에 눈사람 역시 여유롭게 만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시기는 내가 글을 정말 많이 쓰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짤막한 일기의 형태가 아니라, 좀 더 멀끔한 형태의 글을 쓰곤 했다.

하지만 일 년 중에는 눈이 오지 않는 날이 더 많고, 남은 일 년을 눈을 그리워하는 데에 쓸 수는 없다. 모란이 피지 않아도 내 일 년은 일 년인걸. 하늘이 쨍쨍해도 글은 써야 했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삶은 이어져야 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삶은 두 문단 써보고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한 해가 시작되면 나는 끝까지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일상의 존재 그 자체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나는 작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전체적인 흐름을 가지고 올 수 없으니 당장 주울 수 있는 걸 주워다가 소재로 써먹는 식으로. 살면서 글감이 가장 많았던 시기가 무언가를 꾸준히 하느라 바빴던 시기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디테일이 가장 잘 떠오르는 시기는 무언가 다른 일을 꾸준히 할 때인가보다. 하기사, 뭘 해야 딴짓이 하고 싶지 아무것도 안 하다가 뭘 하는 걸 딴짓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어떤 사람들은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오히려 빡빡한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삶을 붙잡을 수 있는 실체가 없으니 명문화된 계획표에 삶의 모양을 구겨넣는다고. 내가 딱 그런 스타일이다. 하나 웃긴 건 저렇게 다이어리에 한 달치 계획을 구겨넣고 나면 정말로 평온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하고싶은 일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길이 생긴다. 만들어진 예측가능성이랄까. 결국 내가 나를 뭉치는 거지 뭐. 그럼 나는 그걸 가지고 나중에 서랍장을 뒤져서 글을 쓴다. 그 과정이 서로 닮아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원래 나는 글을 테마만 정해 두고 자유롭게 쓰는 스타일인데, 요즘은 콘티를 세밀하게 짜두고 살을 붙여가면서 글을 쓴다. 그리고 확실히, 올해는 두 문단이라고 할 부분은 지났다.

글을 쓰는 과정은 자아도취와 자괴감의 무한한 엎치락뒤치락이다. 글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는 마치 내가 천재라도 된 기분이 든다. 나는 사실 정말 천재가 아닐까? 친구가 나만큼 거리낌없이 텍스트를 뽑아내는 사람은 살면서 나 밖에 못 봤다고 했는데. 어쩌면 내가 정말로 좋은 작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싶다. 어쨌든 꽉 짜인 콘티 위에 텍스트를 뽑아내는 건 글을 완성하는 데에 꽤 도움이 되는 일이다. 종종 자괴감 사이에 번뜩이며 빛나는 ‘나는 천재다’의 순간들이 있다면 더욱 좋다. 

 

앞서 두 문단을 써보면 글이 써봄직한 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음,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세 번째 쓰고 있다. 글을 못 쓰겠다는 글을 못 쓰겠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다가도 몇 번씩 올렸는걸. 글을 쓰면서도 다른 작가들의 우아한 방식하고 너무 동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근데 뭐, 난 그걸 못 한다.

내가 좀 더 멀끔하고 바람직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이 글감은 버렸어야 했겠지. 하지만 나는 이걸 이렇게 쓰고 싶었고, 이걸 결국 완성했다. 두 문단이야 어찌 됐든, 일상을 우아하게 살아내든 아니든, 일생이 내 맘에 든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아무래도 좋다. 내가 나로 살아봐서 아는데, 내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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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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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siwol

    0
    over 1 year 전

    ‘글을 쓰는 과정은 자아도취와 자괴감의 무한한 엎치락뒤치락이다.’ 우와 너무 공감돼요. 그래서 저는 제가 쓴 글을 다시 들춰보기가 힘들더라고요.

    ㄴ 답글 (1)
  • 감굴

    0
    over 1 year 전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

    ㄴ 답글 (1)
  • 벅벅벅

    0
    over 1 year 전

    힘들었던 것은 둘째 치고 저도 다시 수능공부를 할 때가 가장 뭐랄까... 살아있는 느낌 같은 것을 받았던 시절 같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듣고 자율적으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체크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요즘 너무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정말 생산적이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 보면서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감되네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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