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장면에서 피어나는 것은

[나의 2010년대] 2014년 4월 16일 ①

2022.10.18 | 조회 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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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저물

덩어리들이 쓰고, 춤추고, 새겨지는 곳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하루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저번에는 %&이런 이상한 기호들을 써버렸더라고요... 이번에는 '구독자님' 하고 부르는 걸 틀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좀 썼습니다. 😉

오늘은 드디어 <나의 2010년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대체 무슨 글이 서론이 이렇게 길었는지... 기대만 높아지게 해드린 거 같아 민망하지만, 부담을 좀 내려놓고 천천히 적어보겠습니다.

 

사회적 참사로서의 세월호를 영원히 기입하기 (2021.11.6.)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제가 과거에 한 학회에서 썼던 이 글을 먼저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긴 세월호의 시대

 

2010년대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를 둘러싸고서 시작합니다. 2010년대의 시작도 아니고, 애매하게 중간에 껴있는 이 사건을 굳이 가장 먼저 다루려 하는데요. 이미 말한 적이 있지만, 시대는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거듭 다시 쓰이고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세월호 사건이 2010년 전체를 다시 호명하고 해석하게 하는, 어떤 지점인 것이죠. 

세월호를 2010년대의 중심에 놓는 것, 그것도 2022년 지금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월호 사건을 너무 낭만화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제가 보기에 '긴 세월호의 시대'는 저의 세계와 2010년대를 뒤흔들었고,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물론 제가 사건 직후 무언가를 깨달았고 제 삶이 바로 변화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 이후 제가, 또 사회가 세월호를 둘러싸고 벌인 일련의 과정들이 매번 세상에 기입되어 왔습니다. 그 기입과 연결의 순간마다, 세월호는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꿔왔고 또 다양한 시간을 연결해왔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세월호'가 아니라, '긴 세월호의 시대'라고 한 것입니다.

세월호가 저의 무엇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은 정말 '시대적'인 사건이었는지, 또 과연 어떻게 2010년대를 규정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 날 이불 속의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아주 사적인 기억들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침몰했습니다. 제가 정확히 언제 처음 그 소식을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도 없는 저녁의 거실에서, 불을 끈 채로 침몰 소식을 보도하는 뉴스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제가 선명히 떠오릅니다. 위로 드러난 선체의 일부를 보며, 그 안에 잠겨있을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을 떠올렸습니다. 어두움과 혼란, 공포를 상상하며 거실의 이불 속에 있는 내가 동시에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처참함보다는 무력감, 무력감보다는 위화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이 거실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그 당시의 저는 비슷한 나이의 학생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크게 슬퍼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슬픔은 이 사회의 같은 구성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죽음을 그 때에 비로소 처음 마주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그 전에도 많은 재난을 겪었지만, 제가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었던 것은 세월호가 처음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계속되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추모시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빈 노트에 빼곡히 갈겨 적었습니다. 지금도 제 블로그에 그 글이 남아있는데, 다시 보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인 글입니다. 하지만 그걸 쓰던 자율학습 시간의 공기는 지나치게 무거웠던 것 같고, 그러니 그런 글이 나왔던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고등학생 시절 학생회 간부를 겸하고 있던 저는, 학생회 친구들과 추모 행사 같은 걸 꾸려보려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마 교감 선생님의 반대로 공식 추모 행사는 무산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라고 여겨서가 아니었을까요? 당시 저희를 도와 행사를 기획하려던 한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의 '훈계'를 받고 곤란에 처하셔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추모 행사는 하지 않고, 추모 방송을 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습니다. 추모 방송을 위해, 제가 마침 갈겨 썼던 야자시간의 글을 다듬어 원고로 만들었습니다. 학생회장 친구가 원고에 사실관계 등을 조금 덧붙여 수정하고, 방송에서 그것을 낭독했습니다.

방송이 흘러나올 때 저는 교실에서 다른 친구, 선생님과 함께 묵념하며 방송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도 있었고, 함께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 저의 글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 영향을 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모종의 공통감을 느끼는 과정에, 내 역할이 있었다는 감각이 저에게 남았습니다.  

 

 

해방과 고립의 롤러코스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후 세월호는 제 안에서 갇히고 말았습니다. 제 삶에 더 많은 질문을 주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요. 수험생활을 치르느라 바빴기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현실에서 다시 세월호를 질문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도 정치는 세월호를 둘러싼 진상규명도, 회복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고, 제 주변에는 그를 해석할 언어도, 담론도, 실행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마음으로 묻어두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세월호는 다시 열렸습니다. 그것도 격렬하게.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시청역에서의 추모공연은 참 즐거웠습니다. 동기 선배들과 함께하는 첫 집회이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과 시청 광장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TV에서나 보던 장면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고요. 

공연이 끝나고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광화문으로 행진했습니다.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 정확하지는 않고, 그렇게 느낄 정도로 많았는데 - 세종대로 위로 몰려들었고, 도로 위를 가득 메우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 대로는 생각보다 광활했고,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어둑한 하늘, 점점이 빛나는 행진 차량들의 불빛,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구호, 사람들의 외침, 발소리, 말소리...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았습니다. 

청계천 광장 즈음까지 이어진 행진의 대오는 여러 갈래로 나눠졌고, 본격적으로 경찰과 대치하게 됐습니다. 방패를 들고 있던 경찰들의 몇몇 지점을, 시위대는 뚫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경찰은 방패 뒤에서 캡사이신을 뿌려 댔고, 밀고 밀리다 보니 어느새 앞으로, 앞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 앞으로 가야 하는지, 왜 이렇게 밀고 밀쳐야 하는지는 사실 잘 몰랐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시위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충분히 따져보기에는 그 고통의 순간이 너무 짧게 지속되었습니다. 경찰은 그날의 많은 사람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14년 4월 18일, 광화문에 다시 갔습니다. 이틀 동안 유가족 분들이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8일의 집회 참가자는 16일의 그것보다는 훨씬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낮부터 시위대가 광화문 광장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충돌한 끝에, 광화문 바로 앞까지 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후 늦게 도착한 저는 광화문 바로 앞, 대오의 '최전선'에 멋모르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경찰 차벽과 병력 속에 최전선의 사람들이 고립되었고, 격렬한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입고 있던 야구 잠바 목덜미를 붙잡혀 경찰에 끌려갈 뻔 했지만, 한 선배가 다리를 잡고 버틴 덕에 저는 잠바를 훌훌 벗어던지고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턱끝까지 차올랐습니다. 

이틀 전의 해방감과 도취, 거대한 물결의 감각은 어디로 가고, 경찰인지 의경인지 군인인지 모를 사람들의 위협과 발길질, 끌고 가려는 손아귀, 머리 위와 앞뒤로 쏟아지는 캡사이신 같은 것들만 남아있었습니다. 버스 위에서 위험하게 경찰을 공격하려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습니다. (이 날을 기억하며 저는 페북에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이틀 사이에 저는 해방감과 고립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거리의 정치, 국가 권력, 안전에 대한 감각 같은 것들이 피어올랐습니다. 무엇보다,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와 흐름을 느꼈습니다. 한 번도 일상의 영역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거리 위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달려가고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 풍경과 감정들. 물론 "분노하는 것만으론 어쩔 수 없는" (꽃다지 - 당부 중) 것이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 세계는 원하는 대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 뒤에 감춰져 있던 삶의 언어와 모습들을 수면 위에서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세계에 응답하는 방법 

 

고등학교 추모 방송의 교실에서의 저와, 세월호 1주기 광화문 광장의 저는 세월호를 둘러싸고 무엇을 겪었을까요? 거기에는 유동하는 주체성의 감각들이 있었습니다. 빈 노트에 글을 갈겨쓰고, 방송을 함께 듣고, 거리를 행진하고, 캡사이신과 끌고 가려는 손들에 몸을 움츠리며, 세계의 죽음과 고통에 '응답'하는 다양한 방법을 체득해갔습니다. 어떤 방법이 '선했다'거나 '옳았다'고 쉬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순수한 방법이 있지는 않고, 과거의 저를 성찰적으로 돌아보아야 하는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월호를 둘러싼 경험이 분명히 알려준 것이 있다면, 그저 지속되는 매일의 삶이, 실은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층의 불안과 충돌과 요동침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 역시 흔들리며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세련된, 표백된 삶의 모습 속에 무엇이 소외되고 배제되는지, 그러나 복잡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덩어리들을 마주하는 과정이 오히려 얼마나 살아있는 응답을 가능케 하는지를 말입니다. 흔들리는 장면 앞에서 피어나는 것은, 두렵고 확신할 수 없는, 그러나 나와 세상에 대해 갖고 싶은 희망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쓰다 보니 너무 장황해졌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 더 의미를 고민하면서 섬세하게 써보고 싶었는데, 현실은 파편화된 감상의 나열이 되어버렸네요 흑... 다음 시간에는 저의 경험을 넘어, 왜 '이 시대'에 세월호가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세월호를 둘러싼 시대의 관계망은 어떠한가?를 따져보고, 저의 이야기와 연결해보겠습니다. 참고로 '2014년 4월 16일'은 ③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는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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