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주읽기 1년, 읽고 쓰고 함께 노는 평신도들2

뉴스레터 별지6_진상협 (feat 황상수·김대연)

2023.10.18 | 조회 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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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읽기

'김근주읽기'는 신학자 김근주 목사의 저서를 함께 읽는 독서클럽으로, 책 이야기, 모임 안내,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뉴스레터로 전합니다.


10월 8일 김근주읽기 1년 모임을 가졌습니다. '읽고 쓰고 함께 노는 평신도들 : 우리들의 신앙 이야기'를 주제로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세 차례 나누어 싣습니다. 순서는 1. 이범진(고낙임), 2. 진상협(황상수,김대연), 3. 이은주(정진아) (이하 존칭생략) 입니다.  


"크리스천의 글쓰기"

 

진상협 ❘ 연동교회 집사

소개 및 프로그램 참여 계기

못해 신앙에서 ‘잠재적인 가나안(안 나가!)’성도가 되어버린 연동교회 진상협 집사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지금 출석하는 교회의 정체성과는 다른 저의 위치(경계)가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스스로를 '과연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진상협 님, 연동교회 집사, 소식지 '연못골' 기자_진상협 제공
진상협 님, 연동교회 집사, 소식지 '연못골' 기자_진상협 제공

제 신앙의 배경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합동교단에서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고 취직과 함께 지방에 있는 통합교단 그리고 고신교단을 거쳤습니다. 2010년초 엔지니어링 회사로 이직하면서 서울에 있는 지금의 교회(통합교단)에 출석한지 13년이 됐습니다. 특별히 어느 교단에 속하는 것에 구애 받지 않는 편입니다.

교회봉사에는 게으른 편이고, 기본적으로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게으르다고 표현한 것은 배우자가 주로 찬양대 봉사를 했기에, 제가 주일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외주재 발령을 받으면서 주말 육아도 모두 배우자가 도맡게 되었습니다. 2019년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교회를 떠날 각오하며 소개하고 싶었던 책" 

 

쥬빌리 아카데미와 ‘김근주 읽기’

김근주 목사님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느헤미아 렉처시리즈로 동성애 문제를 다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였고, 제게 꽤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교회 소식지인 '연못골' 마중물 코너에 이 책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원고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최종 원고를 서버에 업로드 한 후, 주간님의 전화를 받았고 이 책 소개를 주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마음 속으로는 만약 문제가 된다면 교회를 떠나면 되지 않을까- 김 목사님의 책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회의를 거치며 다음 기회에 원고를 게재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위임목사님이 명성교회로부터 소송을 당한 상황이였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주간님의 의견은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할 지점이었습니다.  결국 급히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책 소개를 대체했습니다.

지난 1년간 김근주읽기를 통해 인상 깊은 책을 고르라면 <복음의 공공성>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쥬빌리아카데미)입니다. 특히 박완서 작가의 문학세계와 고통의 문제를 다루었던 양혜원 님의 글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완독 성공 사례 : <복음의 공공성> (2210,233),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4),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5), <구약의 숲> (8-9)

완독 실패 사례 : <숲에서 우주를 보다>(6-7

신학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담론으로 공공의 지평을 열어가는 공동체  '쥬빌리아카데미'
신학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담론으로 공공의 지평을 열어가는 공동체  '쥬빌리아카데미'

 

김근주 목사님의 저서를 함께 읽고 쓰고 실천하는 독서 공동체 '김근주읽기'
김근주 목사님의 저서를 함께 읽고 쓰고 실천하는 독서 공동체 '김근주읽기'

 

읽기와 쓰기

‘어쩌다 여기까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늘 이 자리를 설명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김근주 읽기’ 프로그램으로 인연을 맺은 분들이 함께하는 자리인데요. 우리가 ‘읽기’가 중심인 모임에서, 왜 프로그램을 준비하시는 분께서 ‘쓰기’라는 화두를 저에게 주셨을까 지금도 사실 궁금합니다. 더구나 저는 프로그램 내내 소감 표현은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책 본문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만 발췌해 단톡방에 올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발제를 제안해 주셨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수용을 하게 된 건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습니다. 다만 추석 연휴가 끝날 무렵 자료를 준비하면서‘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고 수습할 일만 남더군요. 오히려 저 보다는 지금 이 화상나눔 모임에 참여하신 분들이 더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몇 번의 화상나눔 모임에서 들었던 ‘질문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나라면 저런 깊이 있는 질문과 이야기(narrative)를 할 수 없지 않았을까, 내공이 많은 분들 앞에 서는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소중한 분들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최근 저희 교회 소식지 <연못골> 610(8-9) 특집기사를 위해 일산은혜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제가 연못골 기자라고 전달되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여드릴 수 있는 부분이 빈약하다 보니 자연스레 교회(소식지)에 남긴 흔적을 찾게 되더군요.

‘쓰기’의 연결고리 : 연못골 소식지(현재 제610호 발행) 기고 혹은 기도문

교회 기자생활 :17 7(수습기간 포함)~(현재)/18 1~19 8(공백기,18개월 중국 주재)

※ 교회 소식지 ‘연못골’기자에 대한 오해 : 교회 대내외 소식지이므로 기자가 되는 순간부터 글쓰기가 주()가 아닌 대부분 교인들 기사청탁 및 취재봉사, 특집기획기사 및 편집부 자체코너 순번담당

 

"공예배의 기도는 나의 신앙고백을 공동체로 확장하는 게이트gate"

 

기독교인에게 ‘쓰기’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

평신도로서 신앙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부분 성도가 공교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전하게 되는 게 일상이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공예배에서는 그 기회가 더욱 제한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텍스트 형태의 교회 소식지가 아닌 기도의 경우에도, 공예배에 대한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로 남겨서 기도문을 읽게 되지만, 글로 잔류하지 않기 때문에 전파력은 일회성에서 ‘~카더라’로 전해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평신도로서 공예배에서 기도를 드릴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만, 자치기관인 남선교회나 봉사부서에서 돌아가며 기도를 드릴 때가 주로 해당됩니다. 중국 근무를 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공예배 성격의 자치기관이나 봉사부서에서 기도한 일이 전무했던 차에 한국에 돌아와서 2019 1월에 자치기관 예배에서 모처럼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당시 주일에 기도 부탁을 받고 다음날인 월요일에 바로 기도문을 마쳤던 것은 그간의 연약함과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릅니다. 공예배 성격의 예배에서의 기도에 대해서는 (다른 정의하는 말들은 무척 많습니다만,) 제 경우에는 단독자로서의 신앙고백이 타자와 연대의 가능성과 더불어 공동체로 확장하는 게이트(gate)라고 여겨집니다. 그 문을 열고 닫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것을 열고 나아가는(선포되어지는)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결코 개인에게만 머무를 수 없다고 봅니다. (복음의 공공성)

 

쓰기(Output)와 읽기(Input)의 관계

쓰기 위해서는 기도나 기사청탁과 같은 사건(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나 기사가 아니라면, 스스로에게 잠들어 있는 것을 깨워줄 자극이 필요한데, 가장 쉬운 방법이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읽기 자체가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시간이 지나버리면 한 번 입력(Input)된 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읽기는 행간의 저자의 생각과 인식주체인 개인의 생각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게는 이러한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저에게 얘기해주고 있고, 가끔 그것들이 넘쳐서 놓칠 때도 많고 메모도 하지 못한 채 흘려 버리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다시 제게 돌아온다고 봅니다. ‘필연’과 ‘우연’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장치가 바로 ‘읽기라고 생각되고 ‘읽기’가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을 정리해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할까요~ 이걸 글로 남기지 않는다면, 빠르게 잊혀져 버렸을 겁니다. 이런 경험은 허다하지만 대표적인 예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읽기와 쓰기, 잠자던 인식에 화학반응 일으켜"

 

양화진 독서모임

인생의 전환점 같은 개인적으로 충격과 같은 사건들이 2015년에 일어났었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없던 제가 자연스레 책을 읽는 모임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양화진 독서모임을 알게 되어, 책을 읽고 낯선 공간으로 찾아갔습니다. 현직 화가, 은퇴 교사, 약사 그리고 양화진문화원에 근무하는 연구원 한 분 등 여러 직업으로 나뉘지만 대부분 여성분이 많았습니다. 또한 참석자 모두가 저보다 연세가 많으시고 개중에는 어머니뻘 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권 책을 정해서 읽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 각자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글로 남기지는 못해서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네요. 그게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적인 독서모임으로 주로 기독출판사인 홍성사의 책방 같은 곳(별관)에서 진행되었는데, 프로그램이 그해 연말에 갑자기 사라지게 되자, 나중에 아쉬움이 남아서 자발적인 비공개모임으로 계속 유지가 되었고, 진행방식을 바꿔서 각자 소감문 형식으로 글을 남기고 서로 공유하였습니다. 중국에 가기 전까지의 그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많은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진상협 님, 연동교회 집사, 소식지 '연못골' 기자_진상협 제공
진상협 님, 연동교회 집사, 소식지 '연못골' 기자_진상협 제공

단독자로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

내면의 질문을 그대로 묻히게 내버려두는 것은 그것이 질문으로 표현될 때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들을 상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겠죠.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와 미디어에 과도하게 노출된 자아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소셜네트워크(SNS)에 그나마 허락되는 시간도 빼앗기고 마는 현실이니까요. 개인의 질문이 인식된 세계관을 드러내고 사고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화하는데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연습이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부끄러운 역사 감추고 스스로 병든 기득권으로 전락하면 안돼"

 

‘쓰기’가 (기록된 글)‘역사가 되려면 반쪽짜리로는 부족해

일단 글이 남겨진 경우, 그대로 기록으로 박제되어 순환하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 이 자리도 그런 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염려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글로 남겨진 것은 어떤 식이든 독자들에게 유통되고 소비될 운명입니다. 그러니 글을 쓸 당시와 다르게 이해될 염려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진실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내에 역사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곳이 있습니다만, 제 눈에는 반쪽자리 역사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전통이 된 한국교회의 좋은 점만 보여주려고 하고, 잘못된 점들은 글로 남겨져 기록으로 전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관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일의 역사가 있고, 서북청년단의 4.3사건이 있고, 번영의 신학으로 가난한 자는 외면하고 소외되고 억압받은 자의 고통을 위로하지 못하였고, 목사가 친위대처럼 자기사람으로 주위를 채우고 교회세습이 반복되고 정권의 꼭두각시를 한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다른 교단이나 교단을 초월한 교회의 갱신의 모습을 보면서 기존 교회의 반성이 아닌 기득권이 위태할까 반목하고 소송을 거는 것이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났습니다. (: 100주년 기념교회와 통합교단 100주년 교회 소송 등)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사도 말씀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와 같은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부분이 있고 강건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목사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기성세대는 자꾸만 잘못된 부분을 은폐하고 잘된 것만으로 포장해 보여주려 합니다. 교회가 내부에서 반목해 두 개로 쪼개지고, 그 과정에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저는 모태신앙으로 성장하며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도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론 : '크리스천의 글쓰기'를 읽고 

 

황상수 ❘ 일산은혜교회 집사, 김근주읽기 운영위원

황상수 님, 일산은혜교회 집사, 김근주읽기 운영위원_황상수 제공
황상수 님, 일산은혜교회 집사, 김근주읽기 운영위원_황상수 제공


"성장의 기록 남기는 김근주읽기 공동체"

 

이야기는 휘발성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 남긴다는 것은 그 순간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실수를 하거나 정신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남긴 글이라면 오히려 남기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도 글로 정리하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글의 내용을 생각하고 글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경우가 더 많은 거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사람은 없기에 늘 성장하고 있다면, 그 성장의 기록이 글로 남을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을 거 같습니다. 내가 혹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근주 읽기가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질문 1 많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류와 다른 의견을 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그 의견이 글로 남는다면 더 부담스럽긴 하겠죠. 그럼에도 다양한 생각들이 나누어지는 공동체가 바람직할 거 같은데, 그게 가능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떤 부분들이 필요할까요?

질문 2 김근주 읽기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경우도 많은 분들이 글을 남겨주시지만, 글을 남기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글을 잘 못남기는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시나요?

질문 3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을 거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일단 시도를 해 보는 것이 중요할 거 같습니다만, 글쓰기를 시도해 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언 : 김근주읽기 1년을 함께하며

 

김대연 /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대표, 일산은혜교회 운영위원회 운영위원 

 

김대연 님,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대표_김대연 제공
김대연 님,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대표_김대연 제공

"구심력이 사라지는 오늘의 공동체, 대안의 김근주읽기"

 

김근주읽기를 참여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 사회에서 요구하는 많은 조건들에 압박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시간과 에너지를 업무와 학업에 많이 할애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와 공동체에 모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부터 교회 공동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왔던 저역시 공동체와 모임에 참여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지체들과 연대하는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또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이 지나갈 무렵 한 모임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그 모임이 바로 ‘김근주읽기’ 였습니다. 이 모임은 다양한 분들이 시간을 내고 참여해서 김근주 목사님이 쓰신 한 권의 책을 읽고 저마다의 생각을 나눕니다. 이 모임이 저에겐 바쁜 일상 속 또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체들 간의 연대뿐만 아니라 이 모임의 중요한 취지인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자 하는 열의를 함께 느낄 수 있었고, 이 기회로 구약이라는 어려운 책에 관해 더 자세히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공동체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속에 이 모임이 작은 대안이 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감수성 없는 교회, 청년에게 다가갈 수 없어"

 

한국 기독교의 문제 제기 혹은 제언

최근 어느 한 찬양집회에 참여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데 강사분의 기도 주제가 “코로나 이후의 교회 부흥”이었습니다. 이 내용으로 기도회를 진행하는데 적잖은 불쾌함을 느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는 해당 강사분의 기도를 들을 때 강사분이 말하는 부흥이 단순히 코로나 전으로의 교회 회복과 교인의 인원 회복 정도로 가다 왔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 감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문제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으로 기독교 청년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 사이 한국 개신교 청년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요즘 주변의 교회들을 살펴보면 교인 비율 중 청년들의 수가 가장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교회와 공동체를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나중에는 고령화 인구복지를 위해 버는 돈의 70퍼센트 이상의 세금을 내야 될 수 있다는 추측들 속 이민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나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으면 앞으로가 암담하기만 합니다. 바쁜 현대사회 속 그리고 인구 위기 속 한국교회 청년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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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미경

    2
    7 months 전

    🌸진상협님 많이 감사합니다! 진상협님이 어떤 분일지 함께 읽으면서 늘 궁금했습니다^^ 스스로 신실한 신앙인일까? 고민하시는 상협님은 일단 심하게 멋진 분이십니다.♡ 쥬빌리아카데미, 김근주읽기에 참여해 주시며 보여주시는 사랑에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교회 역사관에 대해 통찰해 주시는 글에 깊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쓰기'의 기쁨과 Input, Output의 중요함을 기억해봅니다. 고맙습니다🩷 🌸황상수님 항상 감사합니다. 김근주 읽기 운영지기로 이렇게 천사같은 분을 만나니 행복합니다.☺️ 사랑을 다해서 함께 이끌어 가심에 큰 고마운 마음을 보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쓰는 일에 도움주시는 상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질문도 참 좋습니다. 화이팅입니다🩷 김대연님! 함께 읽는 공간에 이렇게 멋진 청년이 계시다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자' 하시니 역시 최곱니다. 써주신 글을 보며 사회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꼭 되어야겠다 싶습니다. 청년의 목소리를 들려주셔서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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