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을 위한 또 한번의 변론

정치를 개인적 인성으로 보는 것이 맞는가? 이준석의 영어 대화 균형있는 비판인가?

2023.11.13 | 조회 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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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대한민국 이야기

글로벌 경제와 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합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자신이 갖고 있는 사전적 편견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다르게 평가된다.  이런 이유로 이재명 지지자들은 윤석열 지지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윤석열 지지자들은  이재명 지지자들에게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반복한다. 

최근 이준석 전 대표를 찾은 인요한 위원장에게 영어로 당신은 우리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보수권에서 몰매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가는 미국 같으면 즉시 정치권에서 퇴출될 인종차별적 발언이라는 것에서, 인성에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마치 정치권에 대한 언급을 하는 모든 인사들 사이에 합의라도 된 듯 통일된 평가가 진행 중이다.   여기에 안철수 의원과의 식당 해프닝까지 겹쳐지면서 이준석 전대표는 아직도 어리고 철없고, 인성에 문제가 있는 철부지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세간의 부정적 인식은 정치인 자신들이 극복하고 긍정 이미지를 만들어 가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진행과정을 보면서 우리 보수 국민들 사이에, 특히 중장년 층의 젊은 세대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세대간 단절을 다시금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세대 간의 자연스런 문화적 차이를 떠나 보수권의 정치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정치인, 그것도 젊은 세대의 정치인의 직설적이고 감정을 노출하는 소통의 방식이 철없고 인격적 미성숙을 의미하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판에 대해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몇 년 전에 박근혜 전대통령의 정치 능력에 대해 "닭 대가리"라는 표현으로 비판했던 유튜버를 변호하면서 보수권의 집중 포화를 받았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노년 장년층의 그 도덕적 단죄는 결국 보수권의 젊은 유튜버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지금 청년층들은 과거 세대가 욕으로 간주하던 단어들을 강조하는 형용사나 부사로 사용하는 세대다. 

내가 벤처캐피탈의 CEO로서 스타트업에 투자를 결심하고 투자심의위원회에 부의했던 적이 있다. 그때 스타트업체가 '호갱노노'라는 상호와 서비스 브랜드를 사용했던 부동산 정보 앱을 개발한 업체다.  부동산 거래에서 정보 부족으로 호갱이 되지 말자는 뜻의 브랜드 명이었다. 혹시 호갱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노장년 세대를 위해 부연을 하자면 호갱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당시 나의 세대에 속하는 투자 심사위원들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런 상호를 어떻게 사용하냐며 상호 변경을 전제로 투자를 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 상호가 머리에 쏙 들어오는 기막힌 것이라는 의견들이었고 이 상호로 이 업체는 보기 좋게 성공해서 일찍 사업을 대기업에 매각할 수 있었다. 이 상호는 디지털 마케팅을 하는 전문 컨설팅 업체의 조언을 받아서 채택된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세대간 언어 사용에서도 큰 문화적 격차가 있는 것이다.

격정적 언어, 감정적 언어로 국민들에게 잘 소통했던 정치인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저쪽은 그런 소통방식을 장점으로 보수권은 그걸 결점과 약점으로 내세우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그로 인해 구세대가 신세대의 보수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지 나는 의구심이 든다.  미국의 트럼프처럼 격이 낮은 언어를 구사하는 정치인도 드물다. 하지만 그는 미국 보수권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  왜 한국에서 청년이 구세대의 언어 습관에 따라 언어를 구사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두번째 내가 갖고 있는 의문은 정치를 왜 개인의 인격이나 인성의 문제로 축소하고 단순화하느냐 하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보수적이고 봉건적 정치관이 없다. 이런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이재명 지지자가 윤석열과 비등하고 지금은 더 높은 지지를 받는 한국의 정치현실이나, 거짓과 음모론,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의 높은 지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인격, 인성의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정치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단순화하면 국민들은 언제나 실망에 빠지게 된다.  보수권은 인격과 도덕의 우위성을 갖고 정치적 역량이 갖추어지지 못한 이회창 전 대표의 반복된 좌절로부터 아직도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보수권이 이러한 도덕적 군자론에 입각한 세계관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정치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자칫 국가적 아젠다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지난 대선은 정책 토론보다 양대 정당 후보의 배후자들의 도덕성 선거였다. 그 결과 우리는 선거를 치르고도 어떤 정책적 비전을 국민들이 선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집권 세력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는지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의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의 원인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산이랄 수 있는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 10장에서 "왜 최악의 인간 들만이 정상에 오르는가 (Why the Worst Get on Top)?"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는 전체주의 지도자들이 총칼만으로 권력의 정상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압도적 국민적 지지를 통해 탄생한 괴물이다.  하이에크는 개인주의적으로 교육되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을 단결시키는 것은 아주 낮은 단계의 감정이고 이것이 최악의 인간들에게 권력을 쥐여주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일차 세계 대전 후의 절망감이 독일인들에게 독일인의 우월감을 강조하는 원초적 욕망의 호소가 먹힌 이유다. 가장 낮은 단계의 욕망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끈이 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정치적 확신이 강하지 않은 대중들이 강력한 선전 선동에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나찌 치하의 제3제국의 천재적 선전선동술에 대중은 인식의 마비에 빠졌다.  세번째는 사람들이 절망이 빠졌을 때 인간들이 빠지기 쉬운 우리의 본능적 약점은 비난의 대상을 찾는다는 점이다.  나찌는 이것을 유대인과 독일인의 피가 섞이지 않는 민족들을 지목하고 강력한 악의 무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하이에크는 민주적 절차가 도덕적인 인간들을 지도자로 내세우는 보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자유는 인간이 갖는 본성적 약점에 의해 늘 위협에 처해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다. 현대란 다원주의 사회이다. 다원적 가치 아래서는 어떤 하나의 가치로 도덕적 판단이 쉽지 않다. 이것이 현대의 정치인들이 도덕적 규범이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를 포착하고 선거구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문제의 대안을 찾는 기능적 능력이 점차 중시되는 이유다.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정치가 도덕의 영역과 중첩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부분 정치에서 도덕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때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파멸시킬 기회가 있을 때이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외면하고 유교적 덕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인 정치를 기대한다면 보수권은 늘 정치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할 능력을 잃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인성 또는 과도한 도덕적 관심은 위험하거나 비현실적이다. 

세번째 이번 논쟁에서 내가 반론을 전하고 싶은 것은 이준석 대표의 "인종차별" 또는 인성 또는 "싸가지 없다"는 비판 논리가 지극히 편향적이고 견강부회적이라는 점이다. 

예일 대학의 모 교수는 이준석 대표의 발언이 인종차별적이며 미국 같으면 바로 정치권에서 퇴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언론들에 크게 보도되고 있다. 

우선 이준석 대표가 인요한 위원장에게 영어로 이야기한 것과 '당신은 우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와 다르다'라는 표현이 인종차별적인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의문을 삼고 있다. 나 또한 왜 굳이 이 준석 전대표가 그 발언을 영어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언론들이 보도하는 바와 같이 이 표현이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인성의 문제가 있는 발언인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미국에서 당신이 미국인 (백인)이 아니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인종차별적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인종차별적 문화적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미국인 그것도 영어를 하는 백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이 인종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것은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고 그 중에서도 백인들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인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인에게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인종차별적이지만 당신은 미국의 백인이라는 지적은 인종차별일 수가 없다. 언제부터 한국 또는 한국인이 미국 또는 미국인보다 더 우월한 국가이자 민족이 되어있는가?

'우리와 다르다'는 표현이 당신이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뉘앙스라는 주장은 비판자들의 일방적 해석이다.  돌연 당원도 아니었는데 국힘당의 전권을 갖는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신은 아직 국힘당 사람이 아니라는 정치적 항변으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나는 이 해석이 전후 문맥상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걸 '당신은 한국인이 아니나 꺼지라'는 이야기라서 인종차별적 발언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다.  인종차별자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도덕적 비난이다. 그것은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계몽에 이르지 못한 야만인이라는 비난을 넘는 위험한 딱지다.  우리는 "비상한 주장은 비상한 증거가 필요하다 (Extraordinary claims require extraordinary evidence)"라는 칼 세이건의 기준을 알고 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발언을 갖고 단정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입증 책임은 발언자가 아니라 그런 비난을 하는 자들의몫이다. 

여기서 내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주장들이 있다. 예일 대학의 모 교수의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면 바로 정치권에서 퇴출된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님은 어느 시대의 미국을 살고 있는지 나는 상당히 궁금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복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본인은 가장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인 인종차별인가는 그만큼 판단이 주관적이라는 것, 이것이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의 현실이다. 

트럼프의 발언 중에는 '흑인들 게으르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은 범법자들이고, 마약밀수자들이고, 강간범이다'라는 무차별적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끝까지 우한 바이러스, 또는 중국 바이러스라고 지칭해서 아시안 혐오를 부추켰다는 비난도 자주 있었다. 트럼프의 이런 발언이 이준석 대표의 '당신은 우리들과 다르다'는 애매한 표현보다 인종차별적 요소가 덜하다고 판단되는가? 트럼프는 미 정계에서 영구 퇴출되었는가?  혹시 미국의 대통령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인종주의에 기반한 정치로 권력을 잡았는지 궁금하면 이 논문을 읽어 보기 바란다.  

A Historical Analysis of Racism Within the US Presidency: Implications for African Americans and the Political Process (Dewey M. Clayton, Sharon E. Moore & Sharon D. Jones-Eversley, 2021)

아니면 이 웹사이트 (10 U.S. Politicians Who Have Done or Said Racist Things - History and Headlines)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을 한 10명의 정치인의 명단과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을 보자. 그 리스트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메케인 전 상원의원과 공화당 대선후보자이자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Rick Perry의 "Niggers's Head" ("검둥이의 대가리")라는 발언도 있다. 구글 검색을 하면 미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고 사과하고 넘어가는 사례들이 부지기수다. 이들이 영구히 정치권에서 바로 퇴출되었는가? 미국의 교수를 하고 있다고 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일대학의 모 교수의 발언은 마치 미국이 인종차별에 대한 우리와 다른 엄격한 규범이 작동되는 양 전해지고 있다. 

안철수 의원의 이준석 전대표의 영어 사용이 무례한 것이라는 주장은 더더욱 터무니없다.  안철수 의원은 '닥터 린튼'이 아니라 '미스터 린튼'이라고 부른 것이 무례한 인성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언제부터 영어 미스터(Mr.)가 폄하의 호칭이 되었나?

Mr. (미스터)의 웹스터 사전은 전통적인 존칭의 타이틀(as a conventional title of courtesy) 또는 남성의 공식 직함 앞에 붙여서 존칭을 나타낸다 (used in direct address as a conventional title of respect before a man's title of office)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사 (의학 박사)들에게 닥터(Dr.)라고 불러주는 것은 관행이고 특히 의료계에서는 확고한 전통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료계 내부의 관행이고, 또한 의료계의 고질적인 엘리트의식의 발현이라고 지적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미스터는 영어에서 극존칭에 해당한다.  사회를 보는 남성 의장에게 미스터 의장님 (Mr. President)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가수 김형석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헌정해서 행사장 입장시에 연주된 곡이 미스터 프레지던트이다. 대통령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는 것은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는 예다.   

일부에서는 다민족 국가에서 일부 시민들에게 공용어인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발언한 것은 인종차별로 유엔 인권위원회 제소감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미국 정치인들은 남미 주민들 앞에서는 스페인어로 연설을 하며 친밀감을 자랑한다. 한인 모임에 와서 최소한 "안녕하세요"라고 발언하며 유권자들에게 아부한다.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니 이들이 인권유린이고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당하는가?

정치인들이 정적을 깎아내리기 위해 과장된 비판을 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최근의 이준석 대표의 영어 사용에 대한 비판은 한국의 대중이 미국의 영어 사용에 관한 윤리적 규범이나 사회적 관행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이용해서 비논리적이고 가짜 뉴스에 가까운 기준들로 비판을 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하고 반대로 미우면 그쪽을 바라다보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자 편견이다. 나의 이준석에 대한 긍정 평가는 두 가지 기대에 근거해왔다. 최근에 송영길 발언에서 보듯 586세대는 퇴출되어야 한다. 이준석 현상은 이런 세대교체의 가능성을 시사했었다. 둘째는 정치인이 선거에서 이기는 기능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대표로 연패하던 보수 정당을 연승하는 정당으로 만들었었다. 그것은 늘 외면하던 20-30대를 보수의 편으로 아니면 적어도 반대쪽으로 기울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이 정치 개혁의 가능성으로 인해 개인 이준석 보다 기적과 같은 이준석 현상을 지지했었다. 아마도 그의 부정선거에 대한 분명한 입장도 내가 그를 지지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이런 입장이기에 나의 최근 사안에 대한 나의 평가도 나의 편견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글은 이준석 전대표에 대한 비판과 옹호를 넘어 글로벌 시대에 인종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느냐의 이슈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미국 정치, 미국 문화, 미국 사회의 지식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론몰이의 주장들은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런 소수 의견을 낸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성 또는 "싸가지 없다"는 도덕적 단죄를 하려면 큰 그림에서 두 사람의 부산의 만남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는 인요한 위원장을 만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왔다.  그리고 이준석 대표와 이언주 전의원의 토크쇼는 그들에게는 정치적 활로를 찾기 위한 큰 정치적 이해가 달려있는 행사다.  그런데 인요한 위원장의 일방적 방문으로 이 정치적 행사는 이준석-인요한의 만남만 부각된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문제의 본질이 윤 대통령과 국힘당의 관계, 특히 윤핵관의 문제로 정치적 구조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인요한 위원장의 일관된 태도는 이준석 대표가 감정적으로 많이 상해 있어서 위로가 필요하다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의 문제, 심리적 건강 상태의 문제로 축소하고 있다.  이것이 누가 환자냐는 환자론의 본질이다. 이준석은 불쾌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만남은 인요한 위원장이 이준석 대표의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는 잔치상을 뒤엎으러 간 스포일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웃으면서 맞았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니 인성의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옳은가?  인요한 위원장은 심하게 말해서 정치적 스토킹을 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의 사용의 문제로 볼 것인지 보수 정당의 문제의 본질과 이준석과 윤석열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볼 것인지는 프레임 선택의 문제다.  나는 영어 사용의 문제로 단순화하는 것은 큰 그림을 잊은 공정치 못한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준석에게 씌워진 혐의가 사실로 밝혀질 때까지는 이준석을 비난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대표직을 축출하고 나서는 수사당국은 꿀 먹은 벙어리다).  나는 이준석 전대표도, 인요한 위원장도 개인적으로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다. 두 사람모두 나보다 인성이나 인격적으로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나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를 잘하면 그만이다.

이 사안은 보수권의 시대에 뒤떨어진 봉건적 가치관이자 비현실적 이상론 정치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 안 가본 사람들이 남대문 간판의 서체 이야기를 큰 소리로 하는 것처럼 선무당들이 미국/영어 전문가들로 나서는 모습도 슬픈 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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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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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치보이

    0
    11 months 전

    좋은 글 정말로 감사합니다.

    ㄴ 답글
  • IU

    0
    11 months 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글을 읽고 나서는 이준석에 대한 비호감이 약간 줄어 든 것 같기도 하고, 애매 합니다. 이렇게 객관적 분석을 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사회에 계시다는 것이 좋습니다.

    ㄴ 답글
  • Allen

    0
    11 months 전

    첫째, 둘째 부분은 동의하지만 세쩨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교수님이 회의에 갔는데, 다른 분들에게만 김교수님, 박교수님 하고 교수님에게는 미스터 리는 이라고 하면 존중받았다고 느끼시겠습니까? 우리말을 완벽하게 하는데, 이중 국적자라고 그 사람에게만 영어를 쓰면 자별이 아닐까요? 인종차별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중국적자에 대해서는 국적차별은 확실하지 않을까요

    ㄴ 답글
  • lapersona

    0
    9 months 전

    이준석 씨가 하버드에서 공부했다는데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 공개석상에서, 일부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거나 하버드대에서 공부했다는데 몰랐어? 비웃음을 사겠죠. 이준석 씨의 총명함과 하고자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그 기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만, 인요한 씨가 일방적으로 이준석 씨를 찾아가 다짜고짜 대화를 시도했지만, 참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기개가 높다 못해 도를 넘었다고밖에 표현할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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