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기업을 떠나 남한산성의 작고 오래된 음식점에서 50년 가업을 잇다

용마루 임국희 대표

2023.04.14 | 조회 1.7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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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나다운 길을 걸어가는 당신을 인터뷰해 드립니다.

[인터뷰이 임국희]

4대째 산성리에 살며, 가업인 자그마한 한식당 용마루를 3대째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는 한국 IBM 소프트웨어 리뉴얼 팀 근무를 시작으로 YBM Sisa.Com 부원장을 거쳐 영국 문화원에서 근무했다. 또한 그간 쌓아온 내공과 경험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무형 스피치 코치로도 활동했다. 퇴사 후 뛰어든 평생직장 용마루에서 체감상 365일 일하는 요식업 초보 사장으로 소소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2019년 한 여성 커뮤니티에서 프레젠테이션 강사로 강단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몸에 딱 맞는 핏의 파란색 바지 정장을 입고 자신감이 묻어나는 표정과 똑똑 떨어지는 말투는 일 잘하는 커리어 우먼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외국계 IT기업을 거쳐 외국계 어학원에 근무 중이라는 이력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당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특유의 밝고 따뜻함이 있었고 어딘가 모르게 구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SNS를 통해 ‘스피치리더 구키가치’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을 종종 봤는데 어느 순간 ‘용마루딸래미’로 가업을 잇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으로 커리어 확장을 성공적으로 하던 중 어떻게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식당을 운영하게 된 걸까 궁금했다. 2022년 4월 어느 날 그녀와 우연히 마주친 짧은 만남에서 어떻게 가업을 잇게 되었는지 물었고 지인들과 일본 여행 중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고 했다. 전환에 전환을 하여 찾은 길을 응원한다고 말하고 헤어졌지만 전환의 맥락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졌다. 언젠가 들어 봐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인터뷰할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아직은 뭔가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 스스로는 과정이 의미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럴듯한 결과를 기대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 치열한 여정을 지금 시점에서 담담하게 보여 준다면 더 큰 감동과 위로를 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의 이야기가 특별하고 궁금하다고 졸랐다. 그렇게 10년 넘게 신던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작고 오래된 음식점으로 오게 된 임국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인터뷰는 “저는 세계 문화유산 남한산성에 위치한 용마루라는 작고 오래된 음식점의 3대 대표 임국희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하며 시작되었다.

 

- 용마루의 역사는 언제 시작 됐나요?

 

할머니가 1971년 산장 식당을 여셨는데 지금의 용마루가 된 시작점이에요. 할머니는 그전부터 저희 동네 남한산성의 빅 3에 드는 식당에서 참모를 하셨어요. 참모는 요즘으로 말하면 주방의 메인 셰프예요. 할머니 손맛 때문에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직접 식당을 오픈하게 되셨어요. 엄마가 시집온 이래 쭈욱 할머니 아래서 음식을 배우면서 시집살이를 하셨어요. 20년 넘게 산장 식당을 운영하면서 엄마가 할머니 손맛을 배우셨지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쯤 지금의 용마루로 이전하면서 상호를 변경했지만 할머니 손맛은 50년째 이어 오고 있어요.

 

-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랐는데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생각한 적 있나요?

 

가업을 이어야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중학교 때 서빙을 가끔씩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식당을 할 수도 있겠다 정도였어요. 진로를 본격적으로 탐색하던 고등학교 때는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기회가 많이 생기면서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고요. 그리고 제가 그렸던 삶은 아주 명확했어요.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에 사는, 자다가 깼을 때 벌레나 곤충이 없고, 하이힐을 신고 나가 아스팔트를 밟는 도시의 삶을 살고 싶었죠. 지금 저는 정말 시골 할아버지들 타는 삐걱삐걱 소리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든요. 어릴 때 저는 이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생활 말고 막 각박하고 치열하고 쿨내가 풀풀 풍기고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한 돌 소리가 아니라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도시에서 살고 싶었어요. 도시의 워킹우먼 모습을 그렸죠. 오히려 가업에서 멀어져 있었어요.

 

임국희가 나고 자란 동네는 대부분 집안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성촌이다. 집안에서 귀한 고명딸이었던 임국희는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고 자라 자존감이 높았고 어딜 가도 뒤지지 않을 자신만만한 아이였다. 그런 국희를 위해 부모님은 동네 학교 대신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성남 시내로 매일 직접 통학시켰다. 산에 있는 집에 살면서 학교는 도시에서 다니는 이중생활을 오래 했다. 자연스레 도시의 커리어 우먼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됐고 서울 중심지로 가겠다는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했다. 비록 아나운서의 꿈은 못 이뤘지만 서울 강남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 학창 시절 꿈꿔오던 도시의 워킹우먼의 생활은 어땠나요?

 

첫 직장은 한국 IBM이었는데 본사가 도곡동에 있었어요. 타워팰리스 맛을 봤죠.(웃음) 지금의 쓱마켓의 전신이 타워팰리스 지하에 있었고 크라제버거도 먹고요. 외국계 기업은 편한 점이 많았어요. 자기 일 다 하면 눈치 안 보고 칼퇴근해도 되고 세일즈 문화가 강한 부서라 나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내 팀의 성과가 높으면 되고, 내가 잘하면 팀 성과가 좋아지고, 우리 팀이 잘하는 팀이면 그중에서도 내가 잘하는 사람이 되어 성과를 내는 일이 재밌었어요.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못 갔는데 취업해서 외국인 동료들과 일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직을 할 때에도 글로벌한 환경으로 가게 되고 마지막 직장은 그냥 핵심으로 갔어요. 영국 문화원이었는데 외국인들이 떼로 있는 곳이었죠.(웃음)

 

영국 문화원 근무 시절
영국 문화원 근무 시절

 

- 도시 생활과 직장 생활에 꽤 만족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을까요?

 

재미있고 치열하고 잘나간 건 맞지만 ‘현타’가 왔어요.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과업을 해내며 성취를 느끼는 성과주의적인 사람이에요. 육아와 일 두 가지를 잘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딪히는 상황이 생기고 한계가 느껴질 때면 고민이 됐어요. 지금처럼 계속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내 페이스를 지키며 이어갈 것인가에 대해서요. 그런데 그 페이스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다분히 상대적이어서 용납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아이 둘을 출산하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복직을 못하고 퇴사를 하는 등 멈춰야 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몇 년의 공백 후에 마지막 회사에 이직을 했더니 제 또래가 모두 저보다 위 직급에 있는 데다 이제 막 결혼을 했거나 아이가 없어서 저와는 상황이 달랐어요. 그때 위기감을 좀 느꼈어요. 저는 어느 것 하나 놓을 수 없어서 되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제 평판도 좋고 일 자체는 재미있고 좋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한 게 없었어요.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진행해 보고 싶은 업무에 지원해도 제 위치에서는 의견 개진에 한계가 있었어요. 밑도 끝도 없이 “임국희 씨는 애가 있어서 그런가 회사 생활 편하게 하려고 드네.”라고 비아냥거리는 90년대생 동료들도 적응되지 않더라고요. 위에서의 평가와 나 스스로에 대한 부대낌과 세대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 그냥 모든 게 아무것도 편하지 않았어요.

회사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서 올라가 봤자 그 위 스텝에서의 경쟁이 너무 뻔했어요. 위로 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더욱더 다른 삶의 영역보다 회사가 원하는 일에 몰두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 길을 선택하는 게 많이 망설여졌고 자신이 없었어요. 끝까지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찾고 싶었어요.

엄마 임국희, 일하는 임국희 모두 잘 해내고 싶은 딸을 위해 어머니가 아이들 돌봄을 6년간 맡으며 남한산성에서 딸의 집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손주들을 돌봐 주던 6년 동안은 용마루는 주중 영업을 아예 안 하고 주말에 단골손님이 요청하면 마치 심야 식당처럼 그들만을 위해서 가게를 열었다. 용마루 2대 주인인 엄마와 3대 주인이 될 임국희는 함께 엄청 달렸던 기간이라고 회상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며 육아 휴직을 냈고 어머니는 용마루로 복귀하셨다.

 

- 그런 내적 갈등이 있던 시기에 용마루가 떠올랐나요?

 

처음부터 용마루를 먼저 떠올렸던 건 아니에요. 회사를 다니면서 뭐라도 제 일을 확장하고 싶어서 프레젠터를 준비했어요. 기존에 하던 업무에서 프레젠테이션 경험이 많았거든요. 육아 휴직 기간에도 프레젠테이션, 스피치 관련 준비를 꾸준히 했고 오퍼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뭔가 채워지지 않고 자꾸 용마루가 신경 쓰였어요.

엄마랑 할머니는 가업도 일으키고 애들도 키우셨잖아요. 그런데 한 번도 엄마가 저에게 “일하는 엄마여서 못했어, 일하는 엄마라서 미안해.”를 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럼 나도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 온리 원(only one)이 되면 큰 문제없이 엄마도 할 수 있고 일도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올라감의 성취가 아니라 깊이감의 성취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용마루가 자꾸 걸린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고민하던 시기에 지인들과 간 일본 여행이 제가 방향을 정한 계기가 되었어요.

 

프레젠터 : 프레젠테이션에 필요한 모든 분야에 관여하는 전문가. 제안서 작성부터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재가공하고 발표까지 책임진다.

 

- 일본 여행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그 여행이 제게는 좀 특별했어요. 제가 프레젠터로 활동하려던 시점에 만나서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세 사람과의 여행이었어요. 여행 중 이야기할 시간도 많았고 지금의 내 모습만 아는 분들이라 오히려 스스럼없이 제 고민을 얘기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솔직하게 제 속내를 이야기하고 의견을 물어봤어요.

수많은 아나운서들과 김미경 강사처럼 엄청난 ‘짬바’를 키우신 분들 속에서 이제 시작한 내가 잘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나운서처럼 포지셔닝이 명확한 것도 아니니까. 마음 한편에는 우리 가게를 다시 살려 보고 싶은 생각도 드는데 마찬가지로 음식을 해 보길 해, 마케팅을 해 본 것도 아니고 요식업을 운영해 본 것도 아니야. 프레젠터는 그나마 해온 게 있는데 이건 너무 0인 거지. 그런데도 자꾸 용마루가 끌리는데 그대들이 보는 나는 어때? 라고요.

세상에 흔하고 많은 게 식당이지만 할머니와 엄마가 만든 용마루에 손녀가 들어가 이야기를 만들면 특별한 식당이 될 거라고 말해 줬어요. 그런 건 아무나 쉽게 만들어 낼 수 없다고요. 또, 우리 집 음식이 너무 맛있다면서 회사 나부랭이의 경쟁력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이 너무 많아서 임원이 된다 해도 몇 년일 텐데 왜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고민을 하냐고.

의외의 대답이었어요. 저는 허무맹랑하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가업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워너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해 준 말이 큰 힘이 됐어요. 고민을 얘기한 것조차도 이미 가업을 잇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확인받고 싶었던 거겠죠.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스스로 확신이 필요했으니까요. 여행 이후로 제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신랑과 의논하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어요.

 

-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더 궁금한데요?

 

엄마가 의외였는데 둘째 낳고 이직을 할 때부터 제가 용마루를 하길 원하셨대요. 제가 그때 30대 중반이었는데 지금부터 배우면 잘할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고요. 당시 저는 식당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냥 이런 생각은 했었어요. 회사에서 부장님이나 차장님이 “국희 씨 여기 대빵 맛집이야!” 하며 데려가는 곳이어야만 우리 집 정도 맛이 나고, 친구들이랑 소문난 집에 가면 성공한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이 진짜 맛있는 집인 건 알겠는데 산 위에 있어서 부자가 아닌가? 우리 집도 잘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 ‘내가 잘 되게 해야지.’라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젊은 피가 들어와서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해요. 그렇지만 제가 너무 아깝고, 더 좋은 회사에 간다니까 잡지를 못 하신 거죠. 엄마가 많이 좋아하셨고 기대도 많이 하셨어요. 신랑은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주말이 없는 삶, 끝이라는 게 없는 자영업의 삶에 대해 고민을 했고 저라는 사람의 성취욕을 아는 남자여서 “할 수 있겠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사람과의 관계가 매우 매우 중요한 사람인데 용마루는 엄마랑 트러블이 생겨도 그만둘 수도 없고 끊어낼 수가 없잖아요. 신랑은 그 부분을 많이 걱정했지만 제 선택을 존중해 줬죠.

 

- 어머니도 가업을 잇길 바랬던 마음을 숨기고 계셨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언제부터 용마루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나요?

 

제가 용마루 일에 제대로 뛰어든 건 2021년부터이고요. 육아 휴직 중이었던 2019년부터 네이버 예약 창을 만들고 인스타 피드 올려 드리는 정도로 엄마를 조금 도와드렸어요. 그런데 2020년부터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남한산성에 차가 올라오지 않았어요. 늘 다니는 버스도 거의 빈 차였지요. 지금은 등산객으로 꽉 차서 더 탈 수 없다고 버스 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는 상황인데 2년 전만 해도 코로나 팬데믹에 어디를 가나 이런 분위기였죠. 그때 제가 블로그에 하루에 한 팀만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글도 썼어요. 대를 이어 오래 한 식당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이 저희 가게의 존재를 모르는 거예요. 저희 가게를 아는 건 엄마의 찐 단골과 할머니 때부터 오시던 40년 단골들밖에 없었던 거예요. 거의 용마루 명예 대사 같은 분들 뿐이었어요. 하루에 진짜 매출이 빵 원이었어요. 저는 육아 휴직 급여가 나오는데 우리 엄마는 수입이 없는 거잖아요.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 시작 시점에 코로나 팬데믹이라니 어땠을지 상상이 가네요.

 

뭐라도 해야 했어요. 결국은 코로나였어요. 코로나로 상황이 안 좋았으니까 코로나를 이용해 보자고 생각한 거죠. 제가 되게 예민한 사람이거든요. 청결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전염이 된다니까 사람들이 있는 데서 밥을 못 먹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은 식당이라면 어떤 곳일까를 생각하며 용마루를 최대한 안전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로 했어요. 원 테이블 레스토랑처럼 예약을 하면 최소의 인원이거나 딱 한 팀만 있게끔 시간을 홀딩해 놨어요. 예약이 아무리 많아도 내 뒤에도 사람이 없고 내 옆에도 사람이 없도록 홀에 있는 테이블 중 최대 서너 개만 사용했어요. 공간 확보가 되니까 손님들이 안심하셨죠. 직원들은 모두 KF94 마스크를 쓰고 있고 겨울이어도 창문 틈새를 열어서 환기가 되도록 했어요. 의자, 테이블뿐 아니라 문손잡이 등 에탄올로 닦으며 전체 소독을 했어요. 그랬더니 손님이 보시고 후기를 남겨 주신 거예요. “의자를 소독하는 식당이라 안심이 됐어요. 손잡이를 소독하는 모습이 보여 안심이 됐어요.”라고요. 그래서 많지는 않아도 매출이 잡히는 것에 위안을 얻고 이렇게 한번 쭉 가보자 했더니 주말 예약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매출이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자신이 가진 예민함이 가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었군요.

 

네. 그런데 자영업을 하려면 계속 자기 가게를 알리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살아남아요. 그래서 계속 하나씩 시도해 보고 결과를 확인했죠. 관리를 철저히 해도 안심이 되지 않아 식당에 못 오신다는 분들을 위해 고민했고 전 메뉴 포장 가능하게 시스템을 갖춰 밀키트를 배송했어요. 친환경 포장 용기, 스티커 제작, 먹는 방법 설명서, 포장할 때 뜨거운 걸 한 김 식혀서 담아 주는 센스 등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을 썼는데 엄마가 이렇게 피곤하게 장사해야 되냐고 하셨어요.

일단 제가 하자는 대로 해 주면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를 체감하게 해 드리겠다고 했어요. 매출로 보여 드릴 수 있으니까요. 음식이 포장되는 과정들도 다 인스타 피드로 올렸어요. 로고도 만들고 메뉴판도 제가 파워포인트로 제작해서 출력할 때 더블A 종이 중에서 제일 무거운 종이로 하고 모든 것에 한 땀 한 땀 제 노력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매장에 오신 분들한테는 깔끔함만이 아니라 인스타에 실릴 비주얼의 음식이 돼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하는 독서 모임에서 누룽지 백숙인데 누룽지가 안 보인다는 피드백을 받은 거예요. 원래 저희는 누룽지를 바닥에 깔아 줬거든요. 누룽지가 빨리 퍼져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한 할머니의 마음이었던 거죠. 요즘 사람들은 내가 누룽지를 뒤집어 넣을지언정 사진을 찍어서 남겨야 되잖아요. 그래서 누룽지를 위로 올리고 “누룽지는 아래로 넣어서 드셔요.”라고 말 한마디를 덧붙였죠. 그때부터 음식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후기에서 ‘이 집이 청결해요.’ 보다 음식 사진 한 장이 열 배의 효과가 있더라고요. 사람들의 피드백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하나하나 적용해 보고 별점 1점 준 분의 후기도 받아들이고 적용했어요.

 

- 고객들의 피드백을 실행하고 SNS 효과를 체감하게 되었네요.

 

저희 집이 할머니의 긴 역사가 있고 과거에는 너무 잘 됐었어요. 우리 집은 맛있었으니까 알아서 오겠지 하고 아빠가 홍보를 안 한 게 실수였어요. 한 번 오신 손님은 단골이 됐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셨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상승은 없이 유지로만 살고 계셨던 거죠. 그게 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들어와서 내 손님들을 만들겠다고 엄마한테 제안을 했어요. 방금 말씀드렸던 테이블 제한, 포장 등 모든 것들을 엄마한테 하나하나 확인받고 실행한 다음 매출로 보여 드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요. 누룽지를 위에 얹어서 효과가 좋았다는 걸 보여 드린 다음에는 메뉴를 간소화하자고 제안했어요. 많은 메뉴를 해서 우리 집 역사가 깊은 게 아니니까 다른 가게에서도 할 수 있는 건 빼자고 설득해서 지금은 닭, 오리 딱 두 종류만 해요.

이렇게 제가 손을 대는 모든 걸 SNS를 통해 끊임없이 알리고 보여 줬어요. 저도 이렇게까지 해야 돼? 싶은 순간이 와요. 음식 하는 사람 입장에서 매우 당연한 일을 하는데 이렇게 구차하게 다 올려서 보여 줘야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 너무나 당연한 것을 안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간과하지 말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비슷한 음식을 파는 집들이 많은데 왜 우리 집이 특별한지를 확인시켜 줄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용마루에 들어와서 손님들한테 많이 받았던 질문은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메뉴는 뭐예요?”와 “이 집은 뭐가 달라요?”였어요.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너무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과 다른 집과 차별점을 못 찾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어요. 그때부터 우리 동네 100의 99가 백숙집인데 저 집 백숙이랑 우리 백숙이랑 뭐가 다를까 차이점을 찾기 시작했고 내 가게를 다시 바라보게 됐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 당연하게 하는 일인데 다른 가게는 하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좀 더 나와 내 가게에 대해 많이 알아야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나를 드러낼 때에도 정확하고 오류 없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경쟁 상대를 비난하면서 올라서는 건 너무 비열한 방법이고 그렇다고 내 가게가 비교 우위라는 것을 안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폐 끼치지 않고 잘하느냐는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저희 용마루를 알리기 위해 SNS를 하면서 제일 신경 쓰는 부분이에요.

 

-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에서 회사를 다니며 했던 업무나 일처리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면서 해 오던 문서 작업은 오래된 가게의 현황과 기록을 분류 정리 하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오랜 직장 생활로 몸에 밴 업무 처리 방식이 계획적으로 용마루를 그려 나가는데 아주 잘 사용되고 있답니다.

또 외부와의 업무 협조 등을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는 방식은 회사원으로서는 당연했던 업무 스킬이었는데요. 정부 기관이나 각종 제휴 업체 담당자분들에게 명확한 이메일링을 하는 젊은 사장으로 좋은 피드백을 받고 있어요.

 

- 내 일을 하면 일과 내가 동일한 정체성이 되는 것 같아요. 직장과 가업인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차이점은 어떤 것이 있나요?

 

직장을 다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면 공감하실 것 같아요. 가장 명확한 차이점은 실질적인 휴무가 없어요. 특히 저 같은 외식업은 빨간 날이 더 바빠야 돼요. 그래서 쉬는 날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고요.

두 번째로는 저희는 가족 사업이니까 내 가족과 비즈니스 관계가 된 거예요. 마냥 의지하거나 털어놓을 수 없고 누구 탓을 해서도 안 되고요. 여기서 한 번 엇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큰 균열이 생기기 때문에 관계가 회사 내에서의 조직과 타인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어요.

그리고 제 존재가 너무 커졌어요. 회사에서는 정말 부품 같은 존재였어요. 어떤 부서에 속한 사람이고 내가 조직에서 잘 돼서 위로 올라가도 아시아에서도 한국 센터장 정도인데 용마루라는 이 작은 사업체는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내가 폭풍도 담당해야 되고 비도 담당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회사에는 건물 관리소장님, 리셉션 데스크의 직원들, RND 팀, 피티 팀, 세일즈 팀, 마케팅 팀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다 해야 되는 일이에요. 화장실 청소도 내가 하고 오픈 준비할 때 메인 홀 청소, 테이블 정리, 가스레인지 정리, 식재료 준비, 손님 응대, 전화, 예약, 마케팅 다요. 그래서 내가 너무 커져버린 거예요.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차이점이고 사실은 제일 힘든 부분이기도 해요. 지금 만 3년이 안 됐는데 아직은 직원 수도 적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단계가 아니니까요.

 

-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그래도 용마루를 운영하면서 의미 있는 타이틀을 얻게 되셨는데 보람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블루리본, 백년가게 인증을 받았어요. 저한테는 칭찬 스티커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사실 블루리본 서베이가 뭔지 몰라서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마케팅 업체가 보냈나 하고서는 버리려고 했어요. 워낙 마케팅 우편물이 많이 오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온 마케팅 업체의 우편물보다는 좀 간결하고 세련된 느낌이어서 검색을 해 봤더니 미슐랭 가이드처럼 한국의 맛집 가이드북이더라고요. 누군가의 추천을 받았다는 건 내가 잘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마치 본사에서 감사 나왔는데 잘 통과한 느낌이었어요. 백년가게는 제가 신청을 하면 정부에서 공인해 주는 시스템이고 3년 주기로 성과를 평가해서 갱신해야 해요. 인증을 받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확실히 저는 성취 지향적 사람인가 봐요.

 

백년가게 용마루 2대 대표와 3대 대표
백년가게 용마루 2대 대표와 3대 대표

 

- 관계를 무척 중요시한다고 했어요. 영향을 주신 분이 있나요?

 

인간관계에서 저의 롤 모델은 할머니예요. 할머니처럼만 살면 적이 없을 것 같아요. 할머니는 지금도 평판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제가 할머니 손주인 게 감사해요. 지금도 저희 동네에서 저는 산장 식당 할머니네 국희, 제 동생은 국희 동생, 엄마는 국희 엄마로 불리는데 할머니가 저를 고유 명사로 만들어 주셨거든요. 할머니는 맺고 끊는 게 굉장히 명확하셨고 사람을 품고 베푸는 일에 인색함이 없으셨어요. 절대 남 뒤에서 험담하지 않고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직접 하되 덜 무안하게 잘 이야기를 하셨어요. 말씀을 워낙 조리 있게 잘 하셔서 동네에서 별명이 변호사였어요. 그래서 오래가는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사람과의 관계는 우리 할머니처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할머니가 맨날 하시는 말이 있어요. 공은 안 해. 공치사는 안 한다는 뜻인데, 동네가 거의 식당집이라 수다 떨러 가시면 그 집에서 커피를 타 주거나 고구마 같은 걸 쪄서 내와요. 드시고는 파를 다듬거나 나물을 손질하는 등 소일거리를 끝내고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는 어느 집에 가도 공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랑 연이 있는 어느 집에 놀러 가도 항상 제가 어릴 때 잘 먹던 간식을 내주시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영향을 받았어요. 현생에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가까이 지켜볼 수 없는데 저는 너무 감사하게도 집안의 역사를 만들어 준 할머니가 엄청난 위인이셨던 거죠.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100% 저희 할머니처럼 하고 싶어요.

 

- 용마루딸래미 임국희에게 가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가업이란 저에게 연금술사에 나오는 ‘마크툽’ 같은 거예요. 제가 다른 곳을 계속 돌고 돌았지만 언제나 용마루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쉰까지 회사를 다녔어도 분명히 퇴사하고 용마루를 하지 않았을까? 정년퇴직을 하고도 용마루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는 해요. 솔직히는 잘 되는 가게에 억지로 저를 앉혀 놔 주셨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그건 제 운명에는 없는 일인 것 같고 저에게 가업은 ‘마크툽’ 외에 달리 설명할 표현이 없네요.

 

마크툽: 아랍어로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현재 시점에서 스스로가 터닝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부담스럽거든요. 다만 지금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려는 순간에 있다면 결심을 한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세요. 그건 치열하고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쉽게 발휘되지 않는 용기거든요. 그 정도 용기를 냈다면 어떤 일을 하셔도 잘할 겁니다.

생각보다 세상에 전혀 다른 일은 없어요.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 앞으로 할 일에 꽤나 쓸 만한 자양분이 될 거거든요. 그러니까 용기 낸 지금의 자신을 충분히 칭찬해 주고 매일을 성실히 보내셨으면 해요. 생각해 보면 저도 무엇이 되겠다는 큰 꿈을 위해 달려왔던 적은 없어요. 그냥 지금 아쉽게 보내면 내일의 내가 후회할 것 같아서 오늘을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오늘 최선을 다하며 하루를 살기에도 급급했던 직장인이었어요. 그렇지만 작고 소소한 치열함으로 가득 찼던 하루가 지금의 용마루딸래미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거창하고 원대하고 선명하게 그려지는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나는 온리 원(only one)이니까요. 용기 낸 나를 칭찬하고 하루를 꼬박 소소하고 치열하게 보내면 어느 순간 과거의 나를 보면서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제 대답이고 사실 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지금도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때가 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한 저를 토닥입니다.

“We are never to old to accomplish big things.”

예능 <뜻밖의 여정>에서 윤여정 선생님이 했던 말이에요.

그냥 모든 것을 언제 해도 돼요.

 

 


 

인터뷰를 마치며

 

드라마 <런치의 여왕>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장소 ‘키친 마카로니’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운영하는 30년 된 경양식집이다. 아버지는 비장의 데미그라스 소스 만드는 방법을 항상 성실하고 식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셋째에게 전수해 준다. 임국희는 ‘마크툽’이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가장 중심지의 커리어 우먼에서 남한산성에 있는 작은 식당의 3대 대표가 되었다. 50년 된 용마루의 비장의 무기는 손님들을 단골로 만들어 버리는 할머니가 물려준 손맛뿐 아니라 오래된 용마루의 정신도 있다.

그녀의 할머니와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가치를 담은 정신을 잇는 것이구나.’를 느꼈다. 할머니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의 마음, 식재료를 쓸 때 장사가 되지 않아도 타협하지 않고 좋은 것을 쓰는 마음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넘어서 봐야 하는 좀 더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한 인터뷰였다. 나의 경험을 넘어 가족, 선조의 경험과 생각이 이어져 스며든 가치, 행동 양식이 내가 무엇을 선택할 때마다 자주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수많은 정보를 담아 후대에 전달하는 유전자가 더없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많은 시점이라 질문에 답을 하는 게 어려웠다고 했다. 제일 어려운 질문이 쉬는 날 주로 무엇을 하면서 보내냐는 질문이었다고 해서 내 눈이 동그래졌다. 공식 휴무는 있지만 장 담그기, 재료 손질, 계약 재배 농장 가기 등을 하느라 아직은 쉬는 날이 딱히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용마루를 하나씩 바꿔 나간 실행력을 칭찬하자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회사원은 시간이 흐르면 월급이 들어오지만 자영업자는 어떻게 하면 손님이 더 들까 고민하고 자신과 가게를 알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매출이 0원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이나 소속 없이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진심으로 공감할 것이다. 자유를 얻은 대가로 책임도 더 많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드라마 <미생>에서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다.”라고 했나 보다. 회사를 다니면 시스템이 나를 보호해 주겠지만 나오면 그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내공이 생기기까지 힘들겠지만 시간을 월급으로 교환하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삶은 내가 계획하는 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다음을 생각하며 일어서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렇게 내공이 강해지는 것이리라.

쉬는 날이 없고 매번 뭔가를 찾아서 실행해야 하지만 재미있다고 하는, 작고 소소하고 치열한 매일을 쌓고 있는 임국희의 여정을 응원한다.

 


 

인터뷰어 이주영

 

라이프 아트 북 살롱 <아티스트웨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예술을 매개로 삶이 예술이 되는 콘텐츠를 기획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편견을 하나씩 부수어 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응원이 필요할 때 곁을 내어 줄 수 있는 삶에 관심이 갑니다.

저서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을까:인터뷰로 묻고 글쓰기로 답하다》,《다시, 시작합니다》,  《1YEAR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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