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 주 - 하루의 끝에서 나를 위로하기

많이, 느리게 쓴 시간들

2023.11.13 | 조회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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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nstar

지인은 지인의 속도대로!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주 바쁘게 지낸 날도 있었을 테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에 가만히 있었던 날도 있었을 것 같아요. 요즘 들어 한국의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고 하는데, 날씨가 바뀌면서 기분이 축 처지기도 할 것 같아요. 물론 겨울 냄새는 너무 좋지만요!

며칠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문자를 했는데, 친구가 '요즘 지내는 건 어떠신지'라고 물어보는거에요. 너무 간단한 질문인데 뭐라고 답할지 생각하다 보니까 막막하더라고요. 또 억지로 괜찮은 척 하고 싶진 않아서 이렇게 보냈어요.

그냥저냥 지내죠 뭐. 학교 가고 때로는 안 가고 밥 먹고 때로는 안 먹고 운동하고 때로는 안 하고 잘 지내고 때로는 잘 못 지내고!

써놓고 보니 요즘 제 생활을 잘 요약해놓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답니다. 때로는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은 마음에 '잘 지내!'라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지난 주는 유난히 피곤하고, 지친 하루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럴 때일수록 하루의 끝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 편지를 써 볼게요. 

뭐든 좋아하는 것과 함께해주세요. 좋아하는 폭신폭신한 인형,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시간

구독자님은 일주일 중에 특히 지치는 날이 있나요? 매일 매일 비슷한 강도로 할 일들을 한다고 했을 때, 저는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까지가 고비인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때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남아 있는 에너지가 없는 것 같아요. 

우선 저의 지난 주 일주일 계획표를 보여드리려고 해요. 여기서 뭔가가 추가되기도 하고, 빠지는 날도 있겠지만 보통 이 정도 양의 일들을 하는 것 같아요. 

       토       일       월       화       수        목        금
-수업 3개-수업 1개-수업 3개-수업 1개 -수업 1개
-Midterm event paper(1.5쪽 분량의 에세이)-뉴스레터 글 쓰기-module quiz(50페이지 분량의 교과서 읽고 퀴즈)-Ally clip report(자료 조사 & 짧은 글 쓰기)-quiz(1시간 온라인 강의 듣기 & 30페이지 분량 교과서 읽기 & 용어 정리 & 퀴즈)-Medicine wheel assignment(나의 생활 점검 & 실행 가능한 목표 작성)-학교 주최 행사
-Integrative Assignment(2쪽 분량의 에세이)-music SI session(음악 수업 보충반 1시간)-chapter quiz(50페이지 분량의 교과서 읽고 퀴즈)-discussion prep(토론 준비하기-내 생각 요약)
-music SI session(음악 수업 보충반 1시간)

일요일 '뉴스레터 글 쓰기' 말고는 다 학교와 관련된 거네요. ㅎㅎ 금요일은 비교적 널널한 편이라서 그날은 푹 쉬고, 토요일부터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느낌이에요. 토요일에 에세이를 작성하고, 일요일에 월요일 과제를 해요. 일요일은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 없는데, 월요일에 오전 9시 반 수업이 있기 때문이에요. 월요일에 수업 3개를 다 들으면 2시 반 정도가 되는데, 그럼 도서관에 가서 화요일 과제를 해요. 저녁때쯤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고, 일기를 쓰다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에요. 화요일은 수업이 하나밖에 없어서 늦잠을 잘 수 있어요. 2시 반이 조금 넘어 수업이 끝나면, 또다시 도서관으로 향해요. 내일은 수요일. 수업도 3개나 있고, 과제도 엄청 많은 날이에요. 하나하나 할 일을 하며 투두리스트를 지울 땐 잠깐의 행복을 느끼지만, 얼른 다음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오래 행복감 속에 머물러 있진 못해요.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날이 4일쯤 반복되었을 때! 저는 '이제 더는 못해.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공부만 하는 게 아니고 밥도 챙겨 먹어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마트에 가서 식재료도 사야 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하다 보면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하고, 그래서 다음날 컨디션이 안 좋은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할 일을 끝냈을 때는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해야 될 일만 하고 보낸 오늘을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같아요. 

음식을 만드는 2시간

그래서 막상 화요일 저녁이 되었을 때, 예전에 잡아둔 친구와의 저녁 약속에 너무 가기 싫은거에요. 너무 지치고 피곤한데 그런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주기도 싫고, 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으로 꾸역꾸역 친구를 만나러 가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약속을 깨면 마음이 더 불편할 것 같았나봐요.

외식을 할까, 음식을 만들어 먹을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비도 오니 기숙사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어요. '뭐를 만들거야?' 묻는 제 말에 친구는 '국물요리인데 감자랑 양파 고기를 넣을거야.'라고 답했어요. 요리의 이름은 없는건가 하는 궁금증에 물어봤더니 그냥 'meat potato stew'(고기 감자 국)라고 하더라고요. 친구는 대만에서 가져온 작은 솥과 고기를 가져오고, 저는 감자를 가지고 기숙사 공용주방에서 만났어요. 친구가 밥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쌀을 가지러 가면서 물었어요. '근데 이거 밥 지으면 20분 넘게 걸리는데 괜찮아?' 솔직히 그때 너무 배고팠거든요. 20분이라니! 그냥 햇반을 돌리거나 밥은 안 먹어도 좋겠다 싶었어요. '응 괜찮아~ 이거 스튜 만드는데 20분 넘게 걸려.' 어떤 스튜를 만들길래 20분이 넘는 조리시간이 걸리는 거지? 궁금했지만 아무 말 없이 쌀을 가지러 갔답니다. 

친구가 가져온 솥은 큰 솥 안에 작은 솥이 하나 더 들어있는 구조였어요. 작은 솥에는 친구가 이미 만들어 온 스튜 베이스가 담겨 있었고, 친구는 그곳에 고기를 넣더니 큰 솥과 작은 솥 사이 틈에 물을 부었어요. 이 물의 증기로 인해서 고기가 부드러워진대요. 저는 감자를 맡았어요. 감자 껍질을 벗기고, 물에 10분 정도 담가두었다가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어요. '더 도와줄  거 있어?' 감자를 손질하고 나자 할 게 없어진 저는 물었어요. '이제 기다리면 돼.' '얼마나?' '몰라. 물 양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요리라니! 직접 요리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은 요리는 처음 해보는 것 같았어요.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고기와 감자가 익기를 기다리며 친구와 부엌 의자에 앉아 다다음주에 있을 Thanksgiving day(추수감사절) 여행계획을 짰어요. 자연을 좋아하는 친구의 취향을 고려해 샌디에고의 여러 장소들을 찾아봤어요. 친구의 솥이 삐 소리를 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가 익었는지 확인하러 갔어요.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하는 저를 위해 친구는 조금만 더 익히자고 했어요. 이번에도 역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희는 얘기를 나누다가 조용해지기도 하고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늘 뭔가를 하는 doing 모드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being 모드에 들어선 게 새롭고 신기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르는데 조급하지 않네! 많이, 느리게 쓴 시간은 서서히 저를 회복시켜주었어요. 

친구가 만들어 준 meat potato stew! 다시 봐도 맛있어보여요. 
친구가 만들어 준 meat potato stew! 다시 봐도 맛있어보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갈비찜 같은 달짝지근한 그 스튜가 너무 맛있었어요! 맛있는 음식은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구나, 또 한번 깨달았어요. 

해피엔딩은 뻔하니까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자주 하는 생각이 있어요. 주인공은 처음엔 아주 힘든 상황에 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도움/노력/운 등으로 이루고 싶은 걸 이루게 된다는 서사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요! 그럴 듯하고 업 & 다운이 있는 구조이지만 왜 언제나 끝은 '업'으로 끝날까요? 업 뒤에 또 다운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업'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다운에서 시작해 업으로 향하는 미디어를 자주 접하다 보면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로맨스 드라마를 볼 때 그런 마음이 자주 들어요. 분명 저 둘은 타이밍이 어긋나고 티격태격했는데 어느 순간 연인이 되어 있어요. '저 둘은 나중에는 잘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때부터 들긴 하지만, 막상 그 둘이 연인이 되면 그 이후부터는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아요.

상처를 극복하는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분명 나와 같이 우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책을 읽는 2~3일동안 그 사람은 역경을 극복해 잘 살고 있고 그에 반해 아직도 우울함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 뭔가 스스로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처럼 느껴진달까요.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 같고. 

이주란 작가의 <수면 아래>라는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편안했던 건 이 소설에는 극적인 장면도 없고, 끝에 가서 주인공이 엄청 행복해지지도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각자의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주인공들은, 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일들을 하진 않아요. 그냥 매일매일을 살아가요.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가게에 찾아온 어린이와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고, 산책을 하고, 때로는 어떤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기도 해요. 특히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답니다. 주로 새벽에 이 책을 읽었던 저는 그때마다 너무 괴로웠지만요. 문장 몇 개로 어떤 음식을 떠올리게 만들고, 그 음식을 갈구하게 만드는 건 대단한 능력인 것 같아요. 주인공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먹고 자고 얘기하고 걷고 매일의 일상을 차곡차곡 쌓다보면 시간이 흐르며 손톱만큼씩은 마음이 괜찮아지는걸까 그런 생각도 해봤답니다. 인물들의 대화투도 너무 매력적인 소설이니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왜인지 '리틀 포레스트' 영화도 생각나는 책이었어요. 

다시 시작되는 일주일에게

다가오는 한 주는 바쁜 한 주가 될 것 같아요. 발표가 2개나 있기도 해서 마음이 살짝 긴장 상태예요. 그럴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려 해요. '급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자.' 그리고 이 말도 좋아해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부터 해보자,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지거든요. 그리고 정말 일, 공부, 운동, 취미 생활, 인간관계 다 너무 중요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아픈 마음&몸을 이끌고 무리해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나중에 후회할 게 분명하니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 너무 많지만 저는 지금의 제 모습과 그 사람들을 비교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요. 언제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지인은 지인의 속도대로 가면 된다고 다짐하며 잠에 들고 싶은 밤이에요. 

 

-2023.11.12

로건에서,

지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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