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넷째 주 - 최악은 건너온 것 같아

언니는 좋아하는 게 많아서 죽여지지 않을 거야

2023.11.20 | 조회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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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nstar

지인은 지인의 속도대로!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벌써 11월 넷째 주라는 게 믿기지 않는 날이에요. 지난 주에는 한국의 몇몇 지역에 첫눈이 왔다고 들었어요. 제가 있는 지역인 로건에도 오늘 눈이 왔는데요. 두 번째 눈이지만 첫눈은 잔다고 못 봤기 때문에 저에게는 첫 눈인 셈이었어요! 4시부터 눈이 온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기다렸는데 5시쯤에야 눈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눈이 오던 순간도 좋았지만, 소파에 앉아 창밖으로 눈이 오는지 확인하며 눈을 기다리던 순간도 좋았어요. 

기숙사 앞 잔디에 눈이 쌓였어요.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기숙사 앞 잔디에 눈이 쌓였어요.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지난 주에 저는 인생 처음으로 영어로 public speaking(스피치)을 했답니다!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물음표 백만개가 둥둥 떠다녔는데, 하고 나니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피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My friend said she doesn't want to live anymore'(어떻게 우울/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대하면 좋을까)라는 주제로 발표를 구성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말하는 건 이렇게 즐거운 일이구나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발표 영상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스타 @jeenstar210으로 찾아와주세요! 짧은 클립의 영상을 올려두었어요. 

스피치 영상을 본 사촌동생이 이런 문자를 보냈어요. '발표 하면서 예전의 힘들었던 감정이 떠올랐을 텐데 괜찮았어?' 그러게,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봤는데 영어로 말하는 게 긴장돼서 그랬던 거지 발표 내용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가장 힘든 최악의 시기는 건너왔구나.' 처음 로건에 와서 인간관계, 수업 내용, 낯선 환경으로 힘들어하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그 시간들을 건너왔는지에 관한 얘기를 해 보고 싶어요.  

오늘도 역시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해 주세요. 저는 지금 밤(栗)을 먹고 있답니다. 손으로 집어먹고 있기에 얼룩이 키보드에 남고 있지만, 밤을 먹는 행복이 더 크기에 키보드는 나중에 닦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니는 좋아하는 게 많아서 죽여지지 않을 거야

로건에 오고 1달 정도가 지났을 때 말이에요. 제 주변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어 매일 인공눈물을 챙겨다녀야 했던 날들이었어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어 혼자 산책을 하다가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사촌동생한테 연락을 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마음을 알아줄거야'. 반신반의했지만 더 이상 시도해볼 방법도 없다 느꼈기에 한 번만 더 힘을 내보자고 마음먹고 그 날 저녁에 사촌동생한테 문자를 보냈어요. 가족행사가 있을 때 가끔씩 만났지만, 이렇게 따로 연락을 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나는 요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어. 너는 이럴 때 어떻게 해?' 짧은 문자를 보내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편지라고 해도 좋을만큼 장문의 답장이 와 있었어요. 마지막 문장은 '언니의 얘기를 더 듣고 싶어' 였어요. '우울한 얘기도 한 두번이지 계속 얘기하면 싫어하잖아. 근데 나는 언니 얘기 백 번이고 들어줄게.' 멀게만 느껴졌던 사촌동생이 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어요. 

구구절절 그동안의 이야기를 써서 보냈어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이 많은 이야기에 사촌동생이 압도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답장이 왔어요. 이번에도 편지 같은 답장이었어요. 그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띄었어요. 

언니는 좋아하는 게 많아서 죽여지지 않을 거야.

내가? 내가 좋아하는 게 많다고? 사촌동생의 눈으로 바라본 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죽임 당하지 않는 사람. '죽지 않을 거야'라고 표현하지 않고 '죽여지지 않을 거야'라고 표현한 부분도 좋았어요. 정말 그랬거든요. 내가 죽고 싶어서 죽고 죽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는게 아니라, 여러 사건들로 인해 죽여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 의지와 통제력을 이미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너는 내가 누군지 아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가장 처음 떠오른 건 '사람들'이었어요. 언제나 저를 웃게 하고 울게 하는 건 사람들이더라고요. 첫 번째 편지에서 그런 말을 했었어요. '사람들에게 나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괜찮을 척을 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지고, 기숙사에서 혼자 있는 편을 택했다고 했었죠. 

어느 날은 너무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친구 C에게 같이 산책하자고 말을 꺼냈답니다. 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거였어요. 사실은 잘 지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우울하다고 하면 친구가 저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전에 비슷한 이유로 끝이 난 인연들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안전한 껍데기를 둘러 싸고 괴롭게 살 것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혼자가 될 위험을 감수하느냐. 대부분 전자를 택하며 살아왔지만, 이대로 가다간 소리 없이 사라질 것 같았어요. 

기숙사 뒤편 주택가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저는 사실 많이 힘들다고 얘기를 꺼냈어요. C는 말 없이 들었어요. 말을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뭔가 해결책을 말해주면 좋겠는데, 아니 그냥 들어주면 좋겠는데.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괜히 얘기를 꺼냈나 후회하면서도 계속 걸었어요. '어디까지 가고 싶어?' C가 물었고, 저는 모르겠다고 했어요.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었어요. '이 길은 엄청 길어. 원하는 만큼 계속 갈 수 있어. 더 가고 싶어?' 제가 1분이 넘게 아무 말이 없자 C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어요. 방금 전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는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이게 바로 제가 원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더 가고 싶었지만 C가 더 가고 싶은지 몰라서 답을 못했다는 사실도요. 더 늘어난 거리만큼 C가 제 얘기를 들어주는 시간도 늘어났고, 더 갈까 말까 망설일 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C의 뒷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 날 이후 저와 C는 절친이 되었어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수도 있겠지만요 ㅎㅎ. C는 학교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저에게 요리를 해 주었어요. 어느 날은 토마토 비프 스튜, 어느 날은 라멘. 따뜻한 그 음식들을 먹다보면 추워진 마음이 달래지는 기분이었어요. 아무 일정이 없는 날에 학교 행사에 같이 가자고 저를 끌어내기도 했고, 어느 때나 제가 '산책하러 가자!'고 하면 산책 동지가 되어주었답니다.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나고 걸어가고 있는데 C가 보이는 거예요. '헤이 C!!' 반가운 마음에 C를 불렀는데 저를 쳐다보더니 그냥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 같으면 분명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텐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어요. 얼른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요. '야 너 왜 나 봤는데 인사 안하고 그냥 가?' '너 봤잖아.' '하이 안했잖아.' '아.' 멋쩍게 웃는 모습을 보는데 뭔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 친구가 나를 보고 인사도 안하고 가려고 했는데 나 서운하지가 않네? 역시 사정을 들어보니 얘는 그런 마음이었네. 그러니까 서운하지가 않았던 건, 내가 얘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구나! 다시는 누군가를 믿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마음의 둑이 무너졌어요. 또다시 상처 받게 된다 할지라도, C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될 기회를 놓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내가 C를 믿는 것처럼, C도 나를 믿을 거라 생각하고 C에게만큼은 괜찮은 척하는 걸 줄여나갔어요. '얘라면 내가 누군지 아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길 원했는데, 이젠 제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사랑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더 자유로운 것 같아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또 한 가지. 제가 정말 잘했던 것 중에 하나가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 속에 가두고, 나와 타인을 비교하기' 였어요. 두 가지 다 엄청나죠. 전자는 끊임없이 타인의 관심, 애정, 사랑 등을 갈구하게 만들고 나의 소중한 가치보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더 가치 있게 보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후자는 어떤 값진 경험을 해도 내 삶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요. 특히 인스타 같은 SNS에서 이 두가지 마음이 자라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그만 둬야지, 안해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뉴스레터도 쓰고 있고요 : )

그런데 요즘은 두 가지 다 좀 약해졌어요. 아직도 타인의 시선 끝의 저를 바라보며 만족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나를 그대로 드러내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이후로 굳이 '타인'이라는 필터를 끼고 나를 바라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좋아할까? 싫어할까?' 이런 상상을 하는건 정도가 지나치면 진이 빠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비교하기. 자신을 타인과 끊임 없이 비교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사실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 그럴 수도 있대요. 나는 내가 너무 잘됐으면 좋겠는데, 내 현재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채찍질을 하는 거예요. '타인과의 비교'에서 '타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몰라요. 언제나 중요한 건 '부족한 나 자신' 이니까요. 분명 사랑에서 시작된 마음인데,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라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그런 마음을 좀 놓아 주고 싶다고 느낀 건, 각각의 삶이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한 순간부터인 것 같아요. 제가 듣는 수업 중에 'Gender psychology'(젠더 심리학)와 'Multicultural psychology'(다문화 심리학) 이라는 수업이 있어요. 이 두 수업에선 주로 우리가 가진 특권들과 특권을 가지지 못한 소수자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특권들에 대해 생각할수록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아시아인이고, 여성이이라는 점에선 소수자이지만, 태어날 때 부여 받은 성별과 저의 성 정체성이 같다는 점에선 특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요. 누군가에겐 살 만한 세상이고, 누군가에겐 힘든 세상일 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비교'를 한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교'는 똑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같았고,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출발선이란 없으니까요. 

최근에 들은 Gender psychology 필기 내용이에요. 나이 든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최근에 들은 Gender psychology 필기 내용이에요. 나이 든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평소 부러워했던 외향적인 친구의 소식을 들어도 이제 좀 덜 아픈 것 같아요. '저 친구는 저 친구의 삶을 잘 사는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 삶을 잘 살아봐야지.'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또다시 오겠지

최악은 건너왔다고 적었지만, 분명 또 다른 최악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알아요.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해가고 싶지만 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니까요. 어떤 구렁텅이가 기다리고 있을지 겁이 날 때면, 아이유의 노래 <아이와 나의 바다>를 떠올려요. 이런 가사가 있거든요.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아니 너무 위로가 되는 말 아닌가요? 또다시 휘청거리고 울고 쓰러지고 땅을 치겠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길을 알거래요.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길을 배워가며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덜 무서운 것 같아요. 우울함이 쓰나미처럼 찾아와 가라 앉을 때면, '안녕. 또 왔네. 그래도 우리 구면이야.'하며 얼마간 잠겨 있다가 다시 빠져나올 수 있길 바래요. 

 

-2023. 11. 19

로건에서,

지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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