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주간, 여섯번째 편지, 엽편소설.

2021.05.28 | 조회 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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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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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또 왔군.' 노인은 창밖의 소년을 보면서 생각했다. 소년은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낡은 집 앞을 기웃거렸다. 아마 비오는 날은 무엇이든 몰래 하기 좋을 거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빗소리가 다른 소리들을 잡아먹고, 어두컴컴한 하늘과 내리는 비는 시야를 가린다. 그런 날, 집에 있지 않고 굳이 밖으로 나온 녀석들은 무언가 짖궂은 일을 하려고 나온 것이라고, 노인은 믿었다. 

그런 노인의 믿음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동네에서 노인은 일종의 외부인이었다. 물론, 이 동네에서 살아온 날들로 치자면, 벌써 수십년이 흘렀지만, 노인은 이 동네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과 노인은 출신이 달랐고, 그래서 피부색이 달랐고, 말투도 달랐고, 하는 일도 달랐다.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달리, 노인은 늘 무언가를 그렸다.  

하지만 노인의 그림을 본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항상 비밀스럽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꽁꽁 싸매서 어딘가로 한참을 떠났다 돌아오곤 했다. 그림을 어딘가에 내다 판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그림은 얼마에 팔리는지, 같은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게 다른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괴팍스럽고,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지만,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마을 변두리에 놓인, 갈 일 없는 동굴 같은 존재였다.  

종종 아이들은 노인의 집에 담력훈련 삼아 찾아갔다.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노인이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면 도망가는 게 아이들의 놀이였다. 가끔 짖궂은 아이들은 돌멩이나 진흙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노인은 아이들에게 호기심 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비오는 날이면, 한 소년이 계속 찾아왔다. 노인이 느낄 때는, 다른 꼬마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왔다. 대충 둘러놓은 집 주위의 울타리를 넘어, 집 거의 바로 옆까지 와서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처음에 노인은 문을 열고 꺼지라고 소리쳤다. 소년은 후다닥 놀라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 비오는 날이면, 소년은 또 찾아왔다. 노인은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소년은 다시 도망갔다. 그러나 또 찾아왔고, 노인은 빗자루를 들었다. 하지만 또 찾아왔다. 노인은 이제 소년을 내버려 두었다. 사실, 소년이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그저 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가끔씩 노인의 집 쪽을 두려움에 차서 쳐다봤을 뿐이었다. 

노인은 테라스로 나갔다. 비오는 날 담배를 태우는 게 좋았다. 습기 때문에 무거워진 공기 속으로 짙게 퍼져나가는 연기가 노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노인은 담배를 태우며, 이제 풍경처럼 되어버린 나무 아래 소년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소년을 내버려두니, 소년도 노인을 경계하는 일을 관두었다. 둘은 비오는 날이면, 그렇게 풍경처럼 그곳에 각자 놓여 있었다.

어느 비오는 날, 노인은 다시 테라스에 나와 담배를 태웠다. 그런데 그날따라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비오는 날이면 거의 예외없이 소년이 있었기 때문에, 노인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거의 일으키지 않는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은 왜 비만 오면 이곳에 왔던 것일까?

나무 쪽으로 다가가던 노인은 깜짝 놀라 잠시 자리에 멈추어섰다. 없는 줄 알았던 소년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나무 아래 앉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 쪽에서는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돌멩이라도 집어 들어 던지려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천천히 소년 쪽으로 다가갔다. 가랑비에 머리와 몸이 젖었다. 

노인은 곧 소년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을 하는 게냐, 노인이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왜 울고 있는 게야, 왜 비올 때마다 찾아오는 게야, 하고 물었다. 나무가 죽었어요.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나무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노인이 소년 곁에 있는 나무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저의 사과 나무 말이에요, 사과 나무가 죽었어요. 그제야 노인은 소년 옆에 시들어버린 작은 싹 하나를 보았다. 네가 키우는 나무냐? 노인이 물었다. 네, 제가 심었어요, 제가 사과를 심었어요. 소년이 대답했다.

노인은 이 곳은 내 땅이며, 네 녀석이 마음대로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관두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노인은 자기 안에 연민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연민이라니, 그게 언제적 일이지? 자신에게 그런 게 있었던가? 소년은 울먹이며 혼자 말했다. 사과나무가 죽었어, 이제 어떡해, 엄마가 돌아오지 못할거야. 노인이 물었다. 무슨 말이냐, 그게? 사과나무랑 엄마랑 무슨 상관이야? 소년이 소리쳤다. 엄마가 그랬어요, 사과나무를 심으라고요, 그래서 사과나무가 제 키만큼 크고, 언젠가 제 키보다 더 커지고, 그래서 사과가 잔뜩 열리면, 엄마가 사과를 먹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 엄마도, 나도 사과를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사과를 심었어요. 노인은 가만히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어디 간 게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같이 먹자고 했어요. 노인이 다시 물었다. 어디 간거야? 언제 간 거야? 몰라요, 비오는 날요. 노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비가 그쳤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소파에 눌러앉아 눈앞에 놓인 사과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한 여인이 그에게 가져다 준 사과였다. 여인은 사과를 한 바구니 가득 그의 집에 놓고 갔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를 그렸다. 그녀를 그려서 그림을 팔았고, 그림은 집 한 채 가격에 팔렸다. 그리고 그 돈은 고스란히 노인의 병에 대한 치료비로 들어갔다. 노인은 소년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다.

창밖으로 소년이 비 그친 땅 위를 걷고 있었다. 햇빛이 마당을 비추었다. 소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인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땅을 파니, 사과나무 싹의 뿌리가 나왔다. 노인은 그것을 걷어내고 사과 하나를 던져 넣었다. 소년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푸른 줄기 하나가 보였다. 비가 올 때면, 싹이 무사한지 가서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렀고, 사과나무는 조금 자랐다.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사과나무가 겨우 1m 정도 자랐을 무렵이었다.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의 집은 나라에서 몰수해버렸지만,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고, 그 탓에 삽시간에 폐허가 되었다. 폐가 같았던 그곳은 진짜 폐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그 집앞을 지나갔다. 한손에 가방을 든 청년은 무심코 그곳을 지나가다가 멈추어섰다. 그는 무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폐가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한 나무 앞에 서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나무 아래 작은 사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키보다 작지만, 그는 나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심었던 나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무를 매만지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가 삐걱거리고 걸을 때마다 엄청난 먼지가 솟아 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훔쳐간 탓에 남아있는 물건도 거의 없었다. 숟가락 하나, 천조각 하나도 없었다. 그때 소년은 문득 자신이 사과 그림을 밟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 부서져가는 마루 위에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붉은색 사과 그림이 있었다. 그는 홀린듯 그 마루를 뜯어냈다.

그리고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림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오로지 그의 마음 속에만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가 마루 아래 있었다. 어머니는 사과 바구니를 들고, 생전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작은 그림 옆에는 영수증 하나가 붙어 있었다. 지금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영수증에는 이곳에 살던 노인이 어딘가로부터 사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이 도대체 왜 자기 어머니의 그림을 어딘가에서 사왔는지, 누가 어머니를 그렸는지, 어째서 자기 앞에, 이렇게 한참이나 지나서 이 그림이 주어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질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랑의 느낌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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