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주간, 여덟번째 편지, 여행에세이.

2021.03.20 | 조회 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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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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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에 처음 갔을 때는, 내가 막 이십대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 계획 없이 바다를 따라 달리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남해와 통영, 거제를 거쳐갔다. 그러다가 목포까지 가게 되었는데, 선착장에서 우연히 '홍도'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다. 나는 국어 교과서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고, 다 같이 홍도에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홍도에 전화해서 민박집을 알아보았고, 우리 넷은 예정에 없었던 홍도 여행길에 올랐다. 배를 타고 세 시간은 넘게 가야했는데, 나는 배멀미에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배 타고 떠나는 여행이라는 게 참으로 신선했고 좋기만 했다.

도착한 섬은 모든 게 완벽한 느낌이었다. 너무도 멋진 해안절벽과 우뚝 솟은 섬의 봉우리가 마치 어느 낯선 외국, 동남아의 비밀스러운 섬 같은 곳을 찾아온 느낌이었다. 특히, 여동생과 나는 너무 아름다운 섬의 모습에 놀라 감탄하며 곧장 바다로 뛰어 들었다. 바다는 부산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 흩어지는 모래 하나 없이 너무도 투명했다. 아버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민박집 주인과 마치 오랜 친구 사이인 것처럼 금방 친해졌다. 민박집 주인은 중년 여성이었는데, 자신의 남편이 어부라면서 저녁에는 회와 매운탕을 대접했다. 그렇게 동네 어부들이 모여서 다같이 술자리를 이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내일 유람선을 타볼까 고민이라고 하자, 갑자기 주인네 남편이 자신의 배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어선으로 바다에 나서는데, 함께 가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유람선 따위는 갈 수 없는 곳들을 구석구석 다 보여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날 밤에는 생전 먹기 싫어했던 회를 먹었다. 바다에서 바로 낚아 온 것이라며 바닷속에서 얼굴을 내민 해녀가 전복이나 소라, 성게 같은 것을 건네는데, 그 바다의 신선함이 너무나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져서 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썰어주는 전복을 눈 딱 감고 입에 넣어 씹어보니, 바다의 짠맛이 새어나오며, 마치 바다를 먹는 것만 같았다. 홍도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마 '회'의 맛이라는 걸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 너무 들뜨고 신이 나서, 참으로 행복한 밤을 보냈던 것만 같다.

새벽에는 정말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의 어부 남편이 모는 어선에 올라탔다. 고기잡이배를 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없을 뻔했지만, 바다 낚시 하는 예능에 한 번 출연하면서 또 타본 적이 있긴 하다. 어쨌든, 그런 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그저 어부의 호의로 새벽 낚시에 따라나서는 일은 평생 없을 것만 같다. 우리는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바다 위를 신나게 달렸다. 아저씨는 우리를 위해서 거대한 바위 사이를 지나기도 하고, 동굴 가까이 데려가 주기도 했다. 여동생은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엄마!"라며 소리쳤다. 나도 너무나 신이 났는데, 지금이라면 그때처럼 신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 시절에는 세상 모든 걸 지금보다 열배쯤은 사랑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투명한 바다와 해가 뜨는 하늘, 얼굴을 적시는 물방울, 새로운 섬에 들어선 느낌, 그 모든 걸, 세상을 한결 더 사랑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사랑의 중심에는 바다가 있기도 했다. 만약 홍도가 바다가 아니라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생각하면, 그런 기쁨이나 설렘, "행복해서 죽고 싶을 것 같은" 기분은 없었을 것 같다. 어째서 바다가 그런 기분을 주느냐고 물어본다면, 명확한 대답은 하지 못하겠다. 그저 바다 앞에 설 때면, 저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묘한 바람을 항상 느낄 뿐이다. 그 바람은 마치 내가 이 바다를 따라 온전히 나서기만 한다면, 영영 식지 않을 어떤 행복한 나라를 보장해줄 것 같은 꿈을 꾸게 한다. 시끄럽고 복잡한 현실 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는 푸름, 약간의 거친 파도, 현실에서는 맡을 일 없는 짠 바다내음 앞에서 사라지고, 어째서인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강하게 전해져 온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 다시 만날 홍도 같은 어느 섬을 생각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해안은 너무도 투명하고, 섬에는 초록의 언덕이 펼쳐져 있어서, 어째서인지 그 자체로 삶을 증명해줄 것만 같은 그런 섬에 당도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 어쩐지 이 복잡하고, 항상 수많은 걱정들이 따라다니며, 어떻게 만들어가야 좋을지 막막한 이 현실이라는 것도 걷혀 나가면서, 삶의 정수 같은 것만이 모여 있는 그런 시간에 온전히 속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곳은 무엇보다도 바다가 있는 곳일 것이다. 바다가 봄비처럼 내려 삶을 씻겨 내려주는 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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