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주간, 열한번째 편지, 에세이.

2021.04.07 | 조회 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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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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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는 멀어졌고, 보이는 것은 사방의 수평선과 그 위로 떨어지는 태양 밖에 없었다. 요트는 파도를 타고 출렁였다. 아내와 나는 요트 위쪽에 타있었는데, 아래쪽에 타있는 사람들은 파도를 흠뻑 뒤집어썼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깔깔댔고,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깔깔댔다. 하와이 원주민처럼 보이는 남자가 요트를 몰았는데, 그는 하와이 설화를 다룬 디즈니 영화 <모아나>의 주인공처럼 물 속에 뛰어 들었다가 요트 뒤편에 나타나곤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고래가 물을 뿜어댔다. 나는 아내에게 방금 고래를 봤냐며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아내는 못봤다면서 엄청나게 아쉬워했다.

선셋요트에 올라탄 건 신혼여행 마지막 날에였다.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서 여행을 하루 연장했는데, 할 일을 정해두지 않아 마냥 해변을 걸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한 서양인 여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그러더니 곧바로 요트가 딱 한 자리 남았는데 타지 않겠냐고 말을 걸어왔다. 내가 어찌해야 하나 당황하고 있는 사이, 아내가 타겠다면서 바로 승낙을 해버렸다. 곧이어 우리는 요트에 올라탔다. 우리가 타자마자, 요트는 정말로 출발했다. 원주민 같은 남자가 소라를 불고 돛을 폈다. 거짓말 같은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저 아쉬운 마음에 여행을 하루 연장했고, 우연히 올라탄 요트였건만, 그 순간은 신혼여행을 통틀어 가장 멋진 순간이 되었다.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마치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위에 만들어지는 시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평생 들이지 않을 것 같은 돈을 들여 특급호텔을 예약하고 값비싼 자동차를 렌트한다. 좋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 모든 게 준비된 것 같은 천상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준비된 소비는 확실히 어느 정도의 기분 좋음 같은 것을 준다. 그러나 역시, 그런 여행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그런 준비되지 않았던, 값비싸지도 않았던 시간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또 하나, 신혼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 렌트한 자동차를 몰고 무작정 하와이의 중심부에 있던 드높은 언덕을 찾아간 순간이었다.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히 유명 관광지도 아니었다. 그저 갈대밭과 목장만이 하염없이 펼쳐진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냥 조금 머물렀다. 그런데 그 순간 그곳의 그 고요함이 무척이나 신비로워서, 다시는 이런 곳은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양이 갈대 같은 것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바람이 불고, 우리 둘밖에 없었다. 그런 우연한 고요가 마음을 휘감아 돌았다.

그 뒤로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그런 시간 속에서도, 역시 만났던 가장 좋았던 시간이라는 것들은 우리가 발견한, 우리만의 고즈넉한 해안 같은 것이었다. 삶이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현실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무대 안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들어나가고 쌓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시간들은 어째서인지, 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우연한 몇 개의 점들에 있다는 게 묘하게 느껴진다. 가끔, 어쩌면 자주 세상에 모든 게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랑할 오늘과, 오늘 속의 바다와, 이 순간의 감각만이 남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의무와 욕망과 성취를 잊어버리고, 이 순간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저 삶의 핵심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바다를 향해 있다. 이 세상의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잊고, 바다 앞에서 깨끗해지고, 온전히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런 갈망이 바다 앞에서 숨 쉰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저 평생 바다를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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