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주간, 열번째 편지, 단편소설.

2021.03.29 | 조회 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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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정지우 작가가 매달 '한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다도해

오랜만이었지만 그는 동네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언덕이 많은 도시에는 주로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어 하늘이 넓어 보였다. 매번 눈앞에 놓인 언덕은 그것만 넘어서면 곧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예전에도 그는 언제 바다가 보이나 하면서 언덕들을 넘어서곤 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 그는 혼자였고 버스를 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약혼녀와 함께였고 자동차를 몰고 있었다. 날씨가 흐리고 후덥지근했기 때문에 그녀는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도시에 들어선 이후로는 조금 나아진 듯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히 반응하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크게 집중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찾은 도시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걔도 웃기지. 사귈 때는 그렇게 불평만 하더니, 헤어지고 나니까 정말로 사랑했다면서 허구한 날 울고 있어.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정말로 알겠다는 거야.”

“멍청한 소리야.”

“그렇지.”

“아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 얼마 지나면 또 모를 텐데.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그녀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두발을 좌석에 올려 다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앉으면 위험해.” 그녀는 듣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슬슬 바다가 나타날 때도 되었건만 계속 나타나지 않자 그는 약간 조바심이 들었다.

“걔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 자기는 두 번 다시 그런 남자는 못 만날 거라고, 자기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대.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시간이 없었어. 계속 그 인터넷 쇼핑몰건 때문에 바빴잖아. 좀 더 우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너무 무겁다고 했다가, 너무 밝았다고 했다가. 그러려면 디자인은 왜 맡긴 거야? 자기가 하지.”

“적당히 맞춰주고 말아.”

“그게 안 돼. 이거 하나하나가 내 커리어란 말이야. 시간을 썼으면 남는 게 있어야 해. 당신도 알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마셨다. 그에게도 슬쩍 내밀었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바다가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초조하게 수평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정말 안 됐어. 얼마 전에 병원에 갔었잖아, 왜. 그때 가봤어야 했는데. 수면제를 스무 알이나 삼키다니. 말로만 들었지, 내 친구가 그럴 줄은 몰랐어. 사랑이 뭐라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그는 핸들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조금 뒤에 그녀가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 남자를 사랑했다며.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럼 뭐가 사랑인데?”

“글쎄, 그런 건 그냥 집착 같은 거지. 병 같은 거라고. 사귀는 동안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며. 괜히 다른 여자가 생기니까 그걸 못 견디는 거지.”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창문을 반 정도 내렸다.

“담배 피우지 마.”

그녀가 말했다. “시원하잖아” 그가 멋쩍게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빈손을 뺐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사실 에어컨 때문에 창문을 닫고 있는 게 더 시원했다. 하지만 그녀도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사랑이 적어도 그런 병은 아니야. 사랑이니 뭐니 하면서 죽네 사네 하는 건 아니라고. 사랑이 뭘 잡아먹고 죽이고 하는 괴물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걔가 병 걸린 괴물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잖아.”

그는 무심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오른 쪽 차선에 있던 하얀 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둘 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녀가 약간의 신음을 흘렸다. “씨발!” 그가 욕지거리를 했다. 물고 있던 담배와 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이 좌석 밑으로 떨어졌다. 그가 클랙슨을 몇 번 울렸지만 하얀 차는 이미 왼쪽 길로 빠져나간 뒤였다.

“완전 엉망이네. 저런 놈들은 살 날 얼마 안 남았어, 진짜라고. 이 동네는 작동하는 신호등도 몇 개 없어. 죄다 비보호에 껌뻑껌뻑 거리고 있다고. 사람들도 제멋대로 차도를 걸어 다니는 거 봤지? 교통법규 따위는 없는 동네라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았다.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생각했다. 조금 더 제대로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녀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내 말은 그런 식은 아니라는 거야. 아씨, 저건 또 뭐야.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알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삶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지 말이야. 한 번 뿐인 삶인데도 그 사람들은 결국 자기 삶도, 자기 자신도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잖아. 뭔가에 휩쓸려서 결혼했다가 평생 후회하고, 아니면 결혼해서 잘 살다가 엉뚱하게 홀려서 삶을 망치고. 전부 그런 식이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삼 년 전의 일을 생각했다. 이 도시에 들어선 이후에는 계속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도 열정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열정을 느낀다고 믿기도 했다. 하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열정에 빠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랑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적어도 온갖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노래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떠들어대는 식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 점을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만 거기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그때 그녀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도 시야를 조금 높여 보았다. 막 넘은 언덕 뒤로 바다가 보였다. 그 위로는 무수한 섬들이 겹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다시 왔네.”

그가 말했다. 그녀가 앞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이 이곳에 다시 오는 데는 4년이 걸렸다. 그 사이 그는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녀는 작은 디자인 외주업체에 취직했다. 그들은 처음 만났던 이곳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지만, 다시 가보자고 마음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둘은 종종 여행을 하곤 했는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지가 필요했다. 그들은 바쁜 시간을 내어 굳게 마음먹고 서울에서 출발했다. 그는 강렬한 행복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삶의 밀도가 낮아졌고, 하루하루를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는 자신들에게 여전히 삶을 다시 생기 있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차는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 여객터미널에 이르렀다. 둘은 조금 들뜬 채로 차에서 내렸다. 오는 길에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바다에 이르자 가벼운 기대로, 또 편안한 그리움 덕분에 나아졌다. 그녀는 항구에서 바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배표를 사왔다. 주차장에서 나오자 길을 따라 식당이 늘어서 있었다.

“기억나? 우리 돌아갈 때 여기 어디서 아침을 먹었었는데. 전 날 비가 와서 엄청 쌀쌀했지. 어딘지 알겠어? 한 번 찾아볼까.”

그가 길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인도도 차도도 좁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혔다. 차들은 바로 옆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덥고. 어디였지?”

“식당 앞에 깃대가 보였었는데.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깃발 올리고 내리는 역할을 했었던 이야기를 해줬잖아. 애들이 다 나를 부러워했고, 선생님도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뜩 긴장을 줬었지. 웃기지, 조례 시간이 뭐라고.”

그들은 길의 끝에 있던 깃대까지 걸었다. 날이 더워서 온 몸에 땀이 났다. 창문에서 깃대가 보이는 식당은 서너 개 정도가 있었다.

“이 샌들 신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다른 신발 없어?”

“아니, 있어. 그런데 차 안에 있어. 플랫을 신을 걸 잘못했어, 이번에 산 건데 발바닥이 너무 아파. 물집 잡히겠어.”

“잠시 앉을까?”

그가 옆에 있던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얼른 들어가자. 어디야?”

“모르겠어, 헷갈리네. 기억 안 나? 주인할머니 보면 기억나려나. 할머니 기억나지? 우리보고 신혼이냐고 물었잖아. 강아지도 있었고. 일층 집이었는데 여긴 전부 이층이네. 확장했나본데. 어디였지? 내가 좀 둘러보고 올까?”

“기억 나. 당신이 키우던 고양이랑 같은 색깔 강아지. 그런데 아무데나 들어가면 안 돼? 너무 덥네. 어디 들어가든 괜찮을 것 같아. 다 사람도 많고 깨끗해 보여.”

그는 식당과 그녀를 몇 번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깃대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도 많았고 종업원이 부산스레 돌아다녔다. 그가 멀뚱하게 서있자 젊은 여자가, 선불이에요 손님 주문하시고 이 층으로 올라가면 돼요, 하고 말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메뉴판은 저기 있구요, 하고 소리치듯 덧붙였다. 여자는 바쁘고 정신없어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무얼 먹겠냐고 물었고 그녀는 아무거나 좋다고 했다. “나는 먼저 올라가 있을게 발이 아파서.” 그는 적당히 두 개를 고르고 계산을 한 후 올라갔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신발을 벗고 발을 만지고 있었다.

“정신이 없네. 그때는 우리 밖에 없었는데.”

그가 앉으면서 말했다.

“주말이고 성수기잖아. 그때는 평일 아침에 여름이 끝날 때였고. 겨우 그거 걸었는데 벌써 물집 같은 게 생겼어.”

그가 고개를 내밀자 그녀가 발을 비스듬히 보여주었다.

“진짜네. 괜찮겠어?”

“조금 쉬면. 저기 봐, 깃대 보인다.”

그녀가 말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음식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그가 주변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보자고 제안했다. 그녀도 동의했다. “차에 좀 들렀다 가자, 신발 좀 바꿔 신게.” 케이블카는 여객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십오 분 정도를 걸으니 산 아래 도착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줄은 길게 이어졌지만 케이블카의 순환 속도가 빠른지 금방 줄어들었다.

“이것 때문이었나. 원래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이 아니었잖아.”

“그런가보다. 여기 봐,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대.”

그녀가 들고 있던 팸플릿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다시 조금씩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너무 조용하게 있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떠들었다.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올 때까지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그녀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그 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듯 했다. 그가 원했던 게 이런 건 아니었다.

“어때, 괜찮아?”

그가 물었다.

“바꿔 신고 나서 괜찮아졌어. 실컷 걸을 수 있겠다.”

“아니, 기분 말이야. 뭔가 별로라거나 나쁘지 않나 해서.”

“아니, 난 좋은데.”

줄은 멈춰있지 않고 계속 조금씩 앞으로 갔다. 앞에는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의 아들 둘은 줄 밖에서 무슨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아이들을 눈으로 쫓으면서 빙긋 웃었다.

“왜 별로야? 케이블카 타자고 한 건 자기잖아. 타기 싫으면 그냥 가자. 난 괜찮아.”

그는 아니라고 했고 그들은 곧 케이블카에 올랐다. 8인용이어서 앞에 있던 가족과 같이 타게 됐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계속 그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옆에서 조금 어색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케이블카 안은 에어컨이 없어서 더웠다. 출발했던 곳이 멀어지며 조금씩 수평선이 올라왔다. 떠들던 아이들은 조용히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부부는 서로 카메라를 보여주고 있었다. 같이 탄 다른 한 쌍은 들리지 않게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창밖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더위와 침묵 때문인지 그는 갈수록 몸도 마음도 불편해졌다. 문득 자기가 왜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한 눈만 팔고 있는 듯 했고 별로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케이블카가 산 위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가볍게 팔짱을 끼며 내리려다 그를 보고는 놀라 팔을 뺐다.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그들은 평소에도 끊임없이 기분을 물었다. 함께 있을 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그럴 때면, 마치 자신이 잘못된 곳에 와있는 것처럼, 상대와의 관계가 완전히 찌그러져버린 것처럼, 이미 둘 사이를 이어주던 끈은 끊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닮았다. 그들에게는 상대로부터 전염되어오는 감정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서로 그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서로의 기분을 적정한 선에서 맞춰주려고 했다. 기분은 그들 삶에서, 또 그들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산 위에서 내려 말없이 걸었다. 의도했던 게 아니었음에도 한 번 이렇게 되자 그는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부당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정을 가누지 못했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떠오르는 생각과 차오르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도 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와 떨어져 걷고 있는 게 사실은 이번 여행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이상해진 그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생각은 끊임없이 거슬리는 피해 의식처럼, 그녀가 애초에 이 여행을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자기 혼자만 기대해왔을 뿐 그녀는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나란히 걸어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 정상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런 감정이나 생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와 자신이 갑자기 서로 불편해진 채로 입을 다물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자기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게 꼭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다시 서로의 감정을 풀어보려 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다도해의 풍경도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수평선까지 뻗어있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보트가 하얀 선을 그리며 돌아다녔다. 보트를 보자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더 아련한 마음이 되었다.

“정말 멋지다. 저기 보트 보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 때는 우리가 저기 타고서 주변의 섬들을 보고 있었잖아. 여기서 보니까 그 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인데. 어때?”

그가 그녀의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팔을 빼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그와 사진을 찍었다. 풍경을 제대로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몇 번 더 예전에 왔을 때의 얘기를 했다. 비가 내렸던 이야기며, 부두에서의 이야기며, 그 때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한참 뒤에 그녀가 한 말은 이거였다.

“그 때 얘기 밖에 할 게 없어? 우리는 사 년을 만났는데, 계속 입 다물고 있다가 하는 말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얘기뿐이야?”

그는 그녀가 생각보다 화가 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화를 내다가도 금방 쉽게 풀어지곤 하는 여자였다. 오랫동안 화를 끌고 갔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단순히 편하거나 다루기 쉬워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런 면이 그녀가 순진하고 좋은 여자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해서였다. 그들은 다시 내려갈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객터미널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 시간이 삼십분 정도가 남아서 그들은 대기석에 앉았다. 삼 년 전에 그는 그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앞에 있는 배 시간표를 쳐다보면서 낯선 기분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항상 세상 속에 혼자 내버려져 있는 듯 했고 여행은 늘 그것을 적나라하게 느끼게 해줬다. 젊은 날 그는 그 느낌에 이끌려 혼자 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뒤로는 세상 전체가 단단하게 끼워 맞춰진 것처럼 안정되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지금, 그는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당시가 불현듯 이 곳에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나랑 여기 온 게 싫어?”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그 순간 그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그런 거 아니야.”

“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당신이 나랑 같이 오자고 한 거였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그런 게 아니라고. 아까 전에는 네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나도 기분이 나빴던 거야. 미안해.”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갑자기 별로라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그리고 발이 아프다고 말했잖아. 그래도 나는 계속 웃고 있었어. 그것도 이해 못 해준단 말이야?”

그들이 타야 할 배 시간이 되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가 고개를 들어 스피커를 쳐다봤다.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시간 됐어.”

“계속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도 안 했잖아.”

“나는 당신 옆에서 계속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도 완전히 딴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들어가서 얘기하자, 하고 말하며 짐을 들고 일어났다.

“나랑 온 게 별로인 거야?”

갑자기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녀도 다른 곳을 쳐다보며 눈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선실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약간 충혈 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배가 출발했고 그는 눈을 감았다. 그는 간절하게 매달리듯 삼 년 전을 떠올렸다.

 

그들은 남쪽 바다에 늘어선 섬들 중 한 곳에서 만났다. 그도 그녀도 우연히 그곳을 찾아갔다. 그는 열흘 동안의 여행을 끝맺을 장소로, 그녀는 이틀간 여행할 장소로 그곳을 택했다. 먼저 와있던 건 그녀였다. 그는 첫 날 그 작은 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배가 들어오는 항구 옆 해변에 혼자 앉아 있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이 대부분 섬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티가 나지 않는 그녀가 금세 눈에 띄었다. 그 때만 해도 그 섬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가게 된 것인지 몰랐다. 민박에 방을 잡고 나올 때까지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면서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도 그를 의식하고 있었는데 둘은 한 시간을 넘게 그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만 해도 바닷가에서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여자를 만나고 다녔지만, 그 때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결국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였다. 그는 자기가 혼자 여행 왔다는 온갖 티를 내며 앉아 있었다. 배낭에서 담배, 지도, 카메라, 책 따위를 꺼내 널브려 놓았다. 그녀는 여행을 온 거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전 어제 왔는데 처음 봤어요 여행 온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구요, 하고 말했다. 그는 해안을 따라 내려온 지 열흘째라고, 마지막 여행할 곳으로 여기를 골랐다고 했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 웃어보였다. 정말요? 여행 좋아하시나 봐요. 그렇게 그들은 처음 말을 시작했다.

둘 다 여행을 좋아했다. 그도, 그녀도 방학 때마다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몇 번이나 해외에 다녀왔다. 그는 일본과 유럽에 대해, 그녀는 남미와 인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어나 해변을 걸었고 절벽을 지나가 보았고 같이 점심도 먹었다. 식당 주인은 신기한 듯 그들을 보고 말을 건네었다. 얼마 만에 놀러온 연인을 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둘 다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가 여행을 하는 이유를, 또 당시에 받고 있던 세상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 때만 해도 그에게 세상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면서 곧 바로 여기에서 끝날 것처럼 불안했다. 그는 자기가 항상 세상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여행을 하면 그런 적적함이 더해져 정말로 내일이라는 게 없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 느낌 때문에 여행을 한다고 말했다. 그녀도 그런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와 처음 그런 식으로 소통을 했다.

해가 질 무렵에 낮의 식당 주인이 그들에게 다가와 제안을 했다. 자기 남편이 보트를 모는데 한 번 타보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둘은 생각하지도 않고 동의했다. 그녀는 펄쩍 뛸 정도로 좋아했다. 둘을 태운 보트는 섬들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바다 위에 선을 그렸다. 그녀는 자지라지게 웃었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보트 주인은 밖에서 온 사람을 태워주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무뚝뚝한 저 남자가 멋지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기분 좋은 질투를 느꼈다.

그 날 저녁에는 비가 왔다. 그녀는 배편을 하루 뒤로 늦추었다. 그들은 밤새 이야기를 했다. 자신들이 겪었던 모든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둘 다 그 기억들이 진정한 사랑이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기억들은 완전히 빛이 바래 있었다. 오직 둘의 대화를 위해 과거로부터 건져 올려진, 지금 그 자리의 빛을 받고서만 광채를 띌 수 있는 유리병 조각 같았다. 새벽이 되어 빗방울이 약해지자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둘은 비를 맞으며 부두 위를 달렸다. 당연히 둘 다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에 그들보다 더 가까운 경우가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배 안의 스피커에서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둘은 배에서 내렸다. 잠시 걷혔던 하늘에 다시 낮게 구름이 깔려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여행객 몇 명과 주민들이 내렸다. 선착장에 들어서자 여자들이 다가와 잘 곳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예약을 하고 왔다고 일일이 답해 주었다.

“전에 없던 작은 호텔이 생겼더라고.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해뒀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심했다고 느꼈는지 그녀도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 섬 뒤편까지 갔다. 호텔 앞에 이르러 그가, 멀리도 있네, 하고 말했다. 둘을 대표해 그렇게 말한 셈이었다. 카운터에 있던 남자가 열쇠를 주었다. 방은 3층에 있었다. 더블 침대가 하나 있었고 텔레비전과 테이블, 화장대가 있었다. 취사시설은 없었다.

“방이 생각보다 작네. 열 평도 안 되겠는데. 너무 비싸네.”

그가 말하면서 발코니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여기 좀 와 봐. 그래도 경치는 나쁘지 않아. 저기 바다도 보이네.”

앞에 있는 건물에 가려 반 정도 잘린 바다가 보였다. 그녀가 다가와 밖을 쳐다봤다.

“응, 좋네. 날씨 때문인지 피곤하네. 몸이 축 처진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아깐 미안해.”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응, 나도 미안. 그 순간 그녀의 드러난 다리와 허리를 보고 약간의 성욕이 일었다. 그가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일어났다. 나가자, 이렇게 있으면 더 처지기만 하겠지. 그들은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왔다.

둘 다 배가 고팠다. 그는 또 예전의 식당을 찾아보자고 하려다 관두었다. 그들은 다시 반대편 해변으로 가서 식당 길을 따라 걸었다. 전에 비해 식당이 많았고 간판도 모두 새로 만들었다. 놀러 온 것으로 보이는 가족이나 연인들이 식당마다 한 둘은 보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은연중에 그 때의 식당을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식당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모순된다고 느꼈다. 그곳을 발견하면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테고, 결국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애초부터 찾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계속 절실하게 그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착장 앞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둘은 나와서 해변을 걸었다. 아이들 몇몇이 바다에 들어가 있었다. 둘은 잠시 앉았다. 그는 다시 예전의 여행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그 시절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립지 않은 것도, 그녀와 함께하는 게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머리에서 그만 그것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는 그것이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기억들을 감당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멀리 부두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젊은 여자 하나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뭐 봐?”

“저 여자. 멀리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예쁠 것 같아. 그냥 계속 쳐다보게 되네.”

그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을 보았고 참기 힘들 만큼 쓸쓸해졌다.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다시 해변 끝에 있는 깃대를 향해 걸었다. 무어라 적힌 깃발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라고 적힌 거지? 둘 다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거의 바로 앞에까지 가서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보트라고 적힌 깃발 아래 보트가 몇 대 세워져 있었다. 남자 둘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보트를 태워주는 건가요?”

그가 물었다.

“네, 이만 원만 내시면 실컷 태워드리죠.”

수영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온 몸이 검게 그을린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얼마나 태워주시는데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한 이십 분? 뭐, 상관없죠. 타보시면 압니다. 질릴 때까지 태워드립니다.”

이십 분이라는 말에 둘 다 조금 허탈해졌다. 예전에 탔을 때는 두 시간 정도는 돌아다녔다. 그가 생각해보고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둘은 두 번 다시 깃대 근처로는 가지 않았다.

구름이 태양을 거의 다 가려서 오후인데도 어두컴컴했다. 피곤했지만 그냥 들어가기에는 아쉬워 부둣가에 설치된 파라솔로 가서 맥주를 시켰다. 둘 다 맥주 한 잔이면 얼굴이 벌게졌다. 그들은 몇 잔을 마셨다. 그녀가 케이블카를 타고 갔던 곳에서 했던 말, 예전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냐고 했던 게 떠올라 그는 말을 고르느라 애썼다. 지나가는 사람들 얘기를 했고, 얼마 전에 끝낸 연구과 학회 얘기를 했고, 옛 친구와 가족 얘기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녀가 아는 얘기들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요즘 패션과 회사에 대해 묻자 그녀도 얼마간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그는 오면서 차에서 했던 말이 기억나 한 친구의 연애 얘기도 했다. 그녀가 모르는 얘기였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 했다. 결국 그들도 끝났다는 얘기였다. 둘이 5년을 연애했는데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 둘은 헤어졌지만 여자가 그 남자랑 끝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 헤어지자마자 그 남자랑도 곧 끝이 났다. 친구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5년이었는데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기억나는 건 몇 개의 모습이나 몇 번의 나날들 밖에 없다고 했다. 그 정도 말하고 나니, 둘 다 이제는 정말로 호텔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둘은 취한 채로 다시 언덕을 넘어 호텔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바로 잠들었다. 그는 관계를 나누었으면 했지만 그녀가 잠들자 그런 욕망도 사라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느낌이었다. 다시 돌이켜 하루를 생각해보려 했지만 머리가 욱신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케이블카를 타고 갔던 곳에서 봤던 바다만 떠올랐다. 전에 왔을 때는 그런 식으로 이 바다를 보지 못했었다. 높은 곳에서 보니 이곳은 한결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삼 년 전에 느꼈던 것과는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당시에 느꼈던 건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더 가볍고, 좀 더 반짝거리고, 좀 더 뚜렷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러나 머릿속이 알코올로 가득 찬 탓에 아무런 생각의 발전도 없이, 혼자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두에 떨어지며 부딪히는 물방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있었는지 혼자 그곳에 와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신이 지금 여기 혼자 와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할까? 그는 앞뒤의 상황을 판별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것인지, 왜 온 것인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머릿속에 든 술이 계속 그를 뒤흔들었다. 그녀를 탓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게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 그는 어쩌면 자기 삶에서, 적어도 일과 관련된 삶에서는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2년 반 만에 그가 내놓은 논문이 학계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관점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경력에 맞지 않은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학문 영역에서, 젊은 나이의, 그것도 아직 제대로 된 학위조차 없는 이가 그 정도의 성과를 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같이 공부하던 이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그가 올해 학위 논문과 관련해서는,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잔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너무 오래 혼자 공부했기에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 같이 기쁨을 누릴 만한 사람이라고는 그녀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달간 인도 여행을 떠나 있었다.

그 논문이 가장 회자되던 때, 그의 기분도 머리끝에 매달려 있던 보름 동안 그녀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연락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지만 그녀도 여행에 푹 빠져 있는지 도통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방 안에 혼자 처박혀 있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매일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안면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구인지 잠시 기억하지 못했다. 곧 여자 쪽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대학 시절, 함께 수업을 들으며 발표 준비를 한 적 있던 여자였다. 그는 누구한테나 말을 걸고 떠들어댈 수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그 여자가 그에게 다소 관심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더 관계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연극을 보겠느냐고 했다. 그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에 응했다. 다음 날에는 함께 술도 마셨다. 그녀가 돌아오기 며칠 전에는,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도 한 동안은 그 여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를 알았고 사랑하는지를 기억했다. 그는 이중생활 속에서 항상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혔다.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지 그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어느 한쪽을 무턱대고 정리할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두 여자 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여자와 동네에서 만나 밥을 먹고 있을 때, 그를 찾아왔던 그녀를 마주침으로써 상황은 끝이 났다. 그녀에게는 그저 같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 했고, 그 여자에게는 자기의 약혼녀라고 했다.

다음 날 여자는 온갖 욕을 퍼붓고 떠났다. 그는 그녀에게 그 여자와의 관계를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미 눈치를 챘고 얼마 후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는 용서를 빌며, 그러나 기필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 밥이나 같이 먹고 연극이나 몇 개 봤다고 말했을 뿐 그 이상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가 매달렸다.

 

그는 발코니에서 일어났다. 비가 점점 더 거세져서 발이 젖었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머리가 너무 몽롱해지는 듯해서 담배를 찾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배낭을 뒤지며 그녀의 다리를 만졌다. 다시 관계를 맺고 싶어졌지만 그녀를 깨우는 게 두려웠다. 담배는 배낭에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갔다가 이번에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곳에도 없어 캐리어를 열어 옷들을 하나씩 다 꺼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사러 나갈까 했지만 슈퍼까지 가려면 다시 섬 반대편까지 가야한다는 게 생각났다. 혹시 호텔에서 얻을 수 있나 싶어 카운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그녀의 백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녀도 술을 마실 때면 종종 피우곤 했다. 그는 백을 열어 하나씩 큰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가 일어났다. 그가 손에 백을 든 채로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하고 있어?”

그녀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없어져서.”

그가 말했다.

“술을 너무 마셨나봐.”

그녀는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그대로 멈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시 백에 물건들을 집어 넣어야할지, 더 찾아봐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녀는 원래 자기의 백을 들여다보는 것도 싫어했다. 4년을 만났지만 항상 그랬다. 화장실 안에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생각 없이 백에다가 물건들을 집어넣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며 그녀가 달려왔다.

“자기야 말해봐, 뭐가 없어진 거야?”

그는 놀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었다.

“정말 없어진 걸까? 이젠 정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걸까? 우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응? 말 좀 해 봐.”

그녀가 그를 잡고 흔들었다. 그도 몰랐다. 다만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던 풍선껌 하나가 비로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

발표한 적 없는 소설이지만, 발표하게 될 날만 기다리다가 인생이 다 끝날 것 같아서 보내봅니다 :) 긴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 닿았다면 참 다행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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