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주간, 첫번째 편지, 에세이.

2021.04.18 | 조회 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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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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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대개 비오는 날이란, 다소 우울하거나 몸도 처지기 마련이어서 싫어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아내는 흐린 날을 무척 싫어해서, 비가 자주 오던 부산 생활을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확실히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비오는 날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나가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대학생과 대학원생 생활을 했고, 그 이후엔 프리랜서로 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집에서 할 일을 할 것인가, 밖에서 할 일을 할 것인가,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이 상당 부분 내 의지에 달린 면이 있었다. 오늘 하루도 온전히 나의 의지와 계획만으로 철저히 채워야 한다는 점에서 막막하고 힘든 측면도 있었지만, 시간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자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주로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타자기나 부여잡고 집안에만 있어도 되는 것인지, 묘한 초조함을 느꼈다. 날씨가 너무 좋으면, 나가서 벚꽃 아래를 걸어야 한다든지, 적어도 강이 보이는 카페에서 일을 해야 한다든지, 같은 기이한 압박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 집안에만 갇혀 있는 건 어딘지 루저 같기도 했고, 죄를 저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지하 생활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할 일을 잔뜩 싸 들고 나가서 해야만, 그래도 어엿한 한 명의 정상인 혹은 사회인으로 사는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 비오는 날에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비오는 날은 그냥 방 안에 있어도 아무런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써야할 글을 쓰고, 읽어야할 것을 읽고, 해야할 일을 해도 마음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밖에 나가더라도 그다지 누려야만 하는 맑은 하늘이 없으므로, 집안은 내게 최적의 안정감을 제공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방 안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빗소리를 들으며 타자기를 두드리고, 밤에는 침대에 일찍 들어가 책장을 넘길 때면, 비가 영영 그치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수업이나 강의 등을 이유로 매일같이 밖으로 나서야만 하는 시절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쨌든 '해야만 하는 일'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좋은 날씨'란 늘 아쉬운 데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비오는 날에는 묵묵히 그 날 속에 파묻히기 좋았다. 뭐랄까, 아주 멋진 곳에 여행을 가지 않거나, 근사한 나들이와 데이트를 하지 않거나, 맑은 하늘 아래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느끼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느꼈다. 비오는 날은 어차피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 밖에도 비를 좋아하는 흔하고 사소한 이유로는 나쁜 공기가 있다. 요즘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다들 공기에 민감한 경우가 많은데, 나도 다르지 않다. 미세먼지든 바이러스든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나도 모르게 계속 내 안에 침투해 들어와 나를 '나쁘게' 만든다는 그 느낌이 아주 불쾌한 데가 있다. 특히, 그런 점에서 황사나 미세먼지 많은 계절의 봄비는 더 좋아하기도 했다. 집안의 창문도 활짝 열고, 마음껏 그 촉촉한 공기를 마셔도 좋은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세계가,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이 안심해도 좋은 느낌이었다.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가는 습기 가득한 공기의 청결함이 주는 그 '안심'이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기질이 나쁜 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날씨 좋은 날이 부담스러워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아이러니한 구석도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날씨 좋은 날을 누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런 날씨 따위 그리 사랑하지 않아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는 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내가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날씨 좋은 날 느껴지는 초조함과 아쉬움이 있다 할지라도, 날씨 좋은 날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맑은 날 바다에 반사되는 햇빛이나, 공원의 잔디밭 위를 깔깔대며 뛰어가는 아이, 성곽이나 내천을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걷고 또 걷는 그런 날씨 좋은 시간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히 날씨 좋은 날을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은 그런 사랑의 대피소다. 이 날씨 좋은 날을 너무 사랑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도망갈 수 있는 비오는 날의 안정감을 좋아하는 셈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 뒤에는 그 사랑으로부터 대피하고자 하는 다른 종류의 좋아함이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이란 항상 이루어질 수는 없고, 항상 내 마음 같지도 않아서, 삶에는 적당한 좋아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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