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는 한때 '파란색'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하늘과 바다를 보고 당연하게 '파란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구약성서, 인도 베다 등 인류의 고대 문헌 어디에도 '파란색'을 뜻하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1. 호메로스의 '포도주 빛 바다'
윌리엄 글래드스턴(영국의 수상이었으나 고전학자이기도 했던 인물)은 『오디세이아』를 분석하며 기이한 점을 발견했다. 호메로스는 철저하게 색채를 묘사하는 작가였으나, 바다를 '포도주 빛(wine-dark)'이라고 표현했고, 하늘을 '구리색'으로 묘사했다. 왜 그랬을까? 파란색을 묘사하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다.
2. 색채의 진화 순서 (Lazarus Geiger의 연구)
언어학자 라자루스 가이거는 전 세계의 고대 문헌을 조사한 결과, 모든 언어에서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가 나타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단계: 검은색(어둠)과 흰색(밝음)
2단계: 빨간색 (불 또는 피)
3단계: 노란색 혹은 초록색(식물이나 과일)
4단계: 파란색 (가장 마지막에 등장)
3. 왜 파란색은 마지막인가?
자연 상태에서 '파란색'은 매우 드물다. 하늘과 바다는 파랗게 보이지만, 그것은 잡을 수 있는 '물체'가 아니다. 파란색 꽃이나 동물은 매우 적고, 파란색 염료를 만드는 기술 역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늦게 발달했다. 심지어 청금석과 같은 파란 안료는 금값만큼 비쌌다. 미켈란젤로도 돈이 모자라 파란색을 잘 쓰지 못했다는..
이렇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 파란색을 별개의 범주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4. 힘바(Himba) 부족의 실험
나미비아의 힘바 부족은 '파란색'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없다. 이들에게 11개의 초록색 사각형과 1개의 파란색 사각형을 보여주면, 파란색을 잘 찾지 못한다. 반면, 우리 눈은 100개 초록색 중 파란색 하나라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색채 인지도 사실은 언어에 의해 훈련된 결과일 수 있다는 가설이 나온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무엇도 아니었던 것이 이름을 지어주고 나니 꽃이 되는 것처럼, 파란색도 '파랑'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초록 비슷한 짙은 색에 불과했다.
어쩌면 파란색처럼 우리가 '객관적 실체'라고 믿는 물리적 세계조차 언어라는 도구에 의해 재구성된 주관적 표상일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언어가 쳐놓은 그물망에 걸린 허깨비인 것이다.
p.s) 왜 매번 파란 하늘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오늘에야 알았다. 파랑은 원래 없는 것인데 없는 것이 눈에 보이니 백일몽을 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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