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08. 초대

오늘은 단편 소설. 이제 여름의 오싹함을 곁들인🍽

2022.07.27 | 조회 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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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집이 엄청 좋네요."

조곤조곤한 말에 남자는 웃고 너는 멈칫한다. 조금 느리게, 어색하게 웃는 너를 남자가 의아하게 바라보고, 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리 내어 웃는다. 남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의아함을 망각할 수 있도록. 너는 어쩌면 그리도 변하지를 않았는지 깨닫는 순간 묘한 승리감이 든다. 네 앞에 서면 마약처럼 온 몸으로 뻗치는 이 느낌을, 너무 오래 멀리했다. 아무도 나만큼 너를 알 수는 없다는 절대적인 명제 아래 너는 떳떳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나는 네 곁을 차지한 남자를 업신여긴다. 남자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씩 웃어준다. 따라 웃는 것을 보니 이 남자는 제법 오래 버틸 것도 같다. 둔감은 제법 강력한 특권이고 무기니까.

눈앞의 음식을 게걸스레 탐닉하는 남자를 힐끔 보자 입맛이 달아난다. , 정말이지 너의 남자는! 탄식을 와인 한 모금에 타 삼키고 천천히 둘러본다. 제법 고급스럽군. 정성껏, 가장 비싼 자재로 마감한 집이다. 아득하게 높은 천장과 둘이 앉기에는 버겁도록 큰 식탁, 가지런하게 도열한 의자들. 허황된 거창함이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다시 남자를 본다. 그럴 듯한 심미안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너를 본다. 무표정하게 남자를 응시하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본다. 시선이 마주쳤다. 네가 싱긋 웃는다. 이 집, 네 취향이구나. 남자는 네 취향이 아니고. 비로소 입맛이 돈다. 외면하던 고깃덩어리를 썰어 입에 넣고 씹는다. 이 요리들을 다 네가 했을까? 몰래 너의 손을 본다. 티 하나 없이 고운 손이다. 역시나 그럴 리가 없지. 다행이다, 네가 고생하지 않아서.

 

Photo by Toa Heftiba on Unsplash
Photo by Toa Heftiba on Unsplash

"식사가 입에 좀 맞으세요?"

남자는 배를 양껏 채운 모양이다. 저작 활동을 하는 요란한 소리와 폭식의 어우러짐이 이 남자를 탐욕스러워 보이게 했다. 멍청한 줄만 알았는데, 제법 욕심을 낼 줄도 아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기어이 너를 곁에 두었겠지. 남자와 눈을 맞추며 웃는다. 슬그머니 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마도 너절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너는 똑똑한 놈을 싫어하잖아. 네 곁에서 똑똑하게 젠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뿐이잖아. 멍청한데다 탐욕스러우니 이 남자와는 곧 안녕이겠어. 순식간에 계산을 마치고 들뜬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고등학교 동창이시라면서요? 가장 친했다고."

", 기숙사 룸메이트였거든요."

", 완전 붙어 다니셨겠네. 우리 와이프, 그때도 예뻤나요?"

"그쵸. 여고였는데도 인기가 많았어요."

"그때 얘기 좀 해 주세요."

"... 말씀하신 대로 맨날 붙어 다녔죠. 같이 밥 먹고, 수업 듣고, 땡땡이도 치고, 같이 씻고... 자고."

너스레를 떠는 나의 말에 만족한 듯 요란히 웃는 남자를 본다. 남자의 맞은편에서 나를 힐끔 보는 너를 이어서 본다. 눈밑이 빨개진 것을 보니, 너도 그때가 생각나나 봐. 남자에게 마주 웃어주며 남은 음식을 여유롭게 입에 넣는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식사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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