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06. Flashback

과몰입 대장 INFP 메일러의 단편소설(사실 망상)🎠

2022.07.13 | 조회 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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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상단 음악을 감상하며 읽으면 훨씬 매력적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썼거든요.)

 

나는 가끔 사랑을 떠올려.

그 추상적인 감정은 점점 구체화되고, 높은 확률로 네가 돼.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너의 빨개진 귓불, 나란히 걸을 때 내 손등에 맞닿아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같은 것들.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가슴께를 괜히 긁어 보다가 너와 눈이 마주치면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웃고 말았지. 마주 웃는 네 얼굴이 절묘한 각도였던지 햇빛에 눈이 부셨던 기억이 나. 그래서 그땐... 네게서 후광이 난다고 생각했어. 낯간지럽지. 나도 알아.

미처 다 쓰지 못한 편지의 말미에 연필로 깊이 찍힌 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너는 부끄러운 말을 적고 참지 못해 연필을 종이에 꾹 누른 채 그 팔 위로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열일곱의 너 또한 매번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편지를 든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모호한 단어에 단호하게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말이 고맙고, 진솔하고 애틋한 말로 나를 수식해주는 것에 마음이 일렁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네 소식 한 톨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5, 이따금 네가 떠오르더라도 어디선가 너답게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당장 내일의 출근도 할 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단순히 추억을 톺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도 영영 버리지 않았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낙천적인 적이 없었으면서, 참으로 나답지 않게.

 

  Photo by Raphael Brasileiro on Unsplash
  Photo by Raphael Brasileiro on Unsplash

처음으로 품어 본 낙관이 무색하게도 너를 오랜만에 다시 본 건 액자 속 얼굴이었다. 검은 띠가 둘러진 채 밝게 웃는 너의 얼굴. 모든 것이 새카맣거나 새하얀 세상 속에서 너만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함께 간 친구가 울먹이는 동안 나는 네 얼굴만 멀거니 봤다. 그러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왜 눈물이 안 날까? 아직도 미련한 미련이 남았나? 어쩌면,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른다고?

공기를 가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뵙는 너의 부모님. 비로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네가 정말, 떠났나 봐. 그 울음이 기폭제가 된 듯 친구는 다시 열일곱이 된 듯 울었다. 여전히 나는 울지 않았다. 웃는 네 얼굴이 무척 찬란해서. 다시는 잊지 않으려고. 고작해야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내 시시껄렁한 농담에 움푹 패던 보조개, 모음의 끝을 야무지게 꺾어 쓰던 필체 따위로 너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달처럼 사방을 밝히는 웃음을 내 마음에 박아 넣으려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온 세상이 침잠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강박적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렸다. “---, ---이 드---?” 나의 요란한 웃음소리에 내려다보던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아주 천천한 균열. 역시 이 모든 것은 꿈일까? 네 아련한 액자 속 웃는 얼굴마저도? 낯선 얼굴 대신 익숙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친구다. 너는 알겠지, 모든 사실을. 반가워 말을 걸려다 친구가 입은 단정하고 새카만 옷을 보았다. 일순 주위가 멈추었다. 이윽고 세상은 다시 흘러갔다. 두 배 정도 빨리. 아니, 세 배 정도 빨리. 아니, 셀 수 없이 빠르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귓바퀴에 고였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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