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자부심이자, 족쇄였다

바냐 삼촌을 보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관하여

2026.05.23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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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 언니랑 4시간쯤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와서 다시 복기하려니, 그냥 녹음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다 나질 않는다.

분명 언니의 모든 말들이 내게 와닿았는데, 아쉬워 죽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일단,

“삶이란, 사람이란 자고로 이래야만 해”하는 틀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는지, 재작년 가을즈음이었는지,

아 아니다. 강의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합정 어반플랜트에서 나눴던 대화가 여전히 내겐 생생하다.

 

“너는 쓸모없는 너를, 생산적이지 못한 너를 사랑해 줄 수 있어?”

언니의 질문에 나는 굉장히 불퉁거리며 "뭐 그럴 수 있겠죠?"라고 대답했다.

 

내가 왜 불퉁거렸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나의 불편한 마음을 그렇게 불퉁불퉁하게 표현한 게 무척이나 부끄러웠는데, 언니는 그런 불퉁거리는 나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ㅋㅋㅋ 그래서 더욱이 나의 어리숙함이 부끄러웠고, 이렇게나 기억이 선명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분명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 나의 결핍을 인정하고 또 수용하며,

잘 보듬어 주고 다독이는 어른이 되어,

사랑으로 스스로를 키워나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생산적이지 못한 나까지 온전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아니었다.

 

하여간 그날 이후, 나는 과연 “생산적이지 못한 나”, “쓸모없는 나”, “가치 없는 나”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인가, 그런 나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인가 라는 물음이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과거의 나는 나를 어떻게 다뤄왔는지, 어떻게 성장했고, 또 어쩌다 이런 내가 되었는지부터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나는 나의 자부심이자, 족쇄였다

"나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은 내 삶에서 오래도록 나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자, 나를 멈춰 세우는 끔찍한 굴레였다.

어떠한 과업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완벽하고 싶게 만들고, 1등 하고 싶게 만들고, 그래서 그 근처에라도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성장하고 또 나아가게 만들었지만, 막상 그 성과를 손에 쥐고 나면, “야, 나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로 새빨갛게 타올랐던 처절한 나의 노력의 시간들을 아무것도 아닌 무채색으로 퇴색시켰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는 나의 자부심이자, 족쇄였다.

 

 

”나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공부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칼끝을 들이미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공무원 시험이 끝난 직후였다.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며 감사하다는 쪽지를 몇 차례 받기도 하고,

합격 후 책을 읽으러 간 도서관 로비에서,

낯선 사람에게 “합격했냐, 축하한다, ㅇㅇ독서실에서 맨날 봤었다.”라며 제티음료를 건네받기도 했다.

 

그렇게나 열심히 해서였을까

이상하게도 합격 발표가 나기 전까지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에 가까웠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불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자전거를 타곤 했는데,

오히려 끝나고 나니 온 세상이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했다.

 

”나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공부하는 거야” 독서실 책상에 써붙였던 문구는

언뜻 보면 다정하고, 또 단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어, 그러니 나는 합격해야만 해,

나니까, 내 인생이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해.

알지? 알면 공부해.

이게 다 날 위해서야.”

라며 스스로에게 하는 날 선 협박이기도 했다.

 

이 걸 해내지 못하면,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스스로에게 칼끝을 들이밀었고,

나는 나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보고 온 다음날 아침,

나의 부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맛있는 아침밥을 차려주셨다.

아빠는 일을 하러 나가시고, 엄마는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하셨다.

동생은 학교에 갔고,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갔다.

이 세상은 그냥,

오늘도 아침이 왔을 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를 몰아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24살의 나는 처음으로

어쩌면, 스스로에게 칼끝을 들이밀지 않아도 내 삶이 그런대로 괜찮게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해.” ”내 삶이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해.”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이 이전만큼 크게 들리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천천히 족쇄로부터 풀려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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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복

    0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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