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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다시 만나요

2024.10.01 | 조회 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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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웹진 청새치의 눈.

하루 한번 꿈과 조우하는 순간의 기록, 세상에 없는 책을 써나가는 일, 비문학 웹진 <청새치의 눈>입니다.

봄에 다시 만나요 

 

1.

작년 이맘때쯤 썼던 글이었다. 여름이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멀리 가버리고 서늘한 가을이 드리운 계절.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고 다니며 내 감수성을 탓하곤 했다. 무엇이든 자세히 느끼고 깊게 느끼는 이 촉수가 좀 마비되었으면 했다. 사소한 일은 사소하게 넘겨야 하는데 내가 막 밟고 지나온 낙엽에서도 여러 장면이 스치니. 쏟아지는 감정이 때로는 버거웠다. 하루가 길었고 순간이 영원 같았다.

2.

이 순간의 소중함을 다 느끼면 좋을까? 나는 이따금 남편의 옆얼굴을 보며 그가 아직 젊을 때, gk고 생각한다. 지금 내 품 안에서 말랑거리는 아기 여름을 보며 우리 큰아들 우리 장남 왜 이렇게 작아졌어? 하고 묻는다. 자식 다 키우고 나와 내 세대 사람들이 다 늙은 어느 시절에서 막 돌아온 것처럼 궁상을 떤다. 올여름에는 기후에 관한 상상력도 늘어서, 무더위 속에서 헉헉거리다가도 삼십 년 후보다 서늘한 여름이라고 중얼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중함을 다 못 느끼고 지나 온 어리석음이 아쉬워서 억지로 키워본 상상력인데, 이제는 그때그때 왈칵 쏟아지는 알아차림에 어쩔 줄 모른다. 연상의 남편이 나보다 먼저 떠나고 아이는 새 가정을 꾸려 내가 혼자가 된 시간. 그 시간에 대비되는 지금의 소중함.  지금의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먼 과거라서 꼼짝 없이 짓눌린다. 소중함의, 행복의 미덕은 적절함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 나다. 가끔은 미워하고 귀찮고 성가시고그러다 문득 즐겁고. 그렇게만 살고 싶다.

3.

지금 휴대폰에서는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 OST가 흘러나오고 있다. Arabesque. 영단어는 어색한데 읽고 나면 익숙한 아라베스크라는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청주 주봉마을 카페 후마니타스가 생각난다. 푸릇푸릇한 벼가 돋아나던 이맘때쯤, 신혼 초기에 들이닥친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그 카페로 향했다. 오래된 선 이어폰을 꽂고 이 노래를 들으며 한가한 카페 근처 논을 혼자 배회했다. 그때 내 안에 이 감정 주머니가 크게 생겨서 이제는 곡의 전주만 들어도 그곳으로 돌아간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집을 나왔던 것이다. 뛰쳐나왔던 것에 실은 더 가깝다

4.

기특해. 넌 네가 가진 섬세한 감수성 덕에 잘 될 거야. 상상하다가 울어버리는 그 여린 마음을 소설에 잘 녹여낸다면 많은 사람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늘 그것 때문에 괴롭기도 하겠지. 너는 네가 상상하는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으니…. 

5.

어젯밤부터 종일 쏟아진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간밤에 반려인을 붙들고 나를 사랑해?’‘행복해?’‘연애할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나도 행복하고 싶어이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 말을 하면서 끌어내야 할 묵직한 슬픔이 있었다. 그런 말로 쥐고 흔들어도 휘청이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울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민망할 만큼 금세 잠들었다. 한층 보송보송해진 마음으로. 점점 더 커지는 행복이 무서우면서도 눈물을 쏟고 싶은 아이러니라니. (그러나 과연 그가 휘청이지 않았을지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6.

오늘은 2024921. 오후 17. 비청눈의 남은 기한은 일주일 더하기 며칠. 일상 속에 무언가가 이미 들어차서인지 실감은 나지 않고 허전함도 아직은 못 느낀다. 아마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한꺼번에 밀려올 것 같다. 그때쯤 돌아오겠지. 겨울? ? 아마 봄에 다시 만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메일의 제목을 이 빌어먹을 감수성에서 봄에 다시 만나요로 고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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