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2022.06.18~19

우리가 통하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야

2022.06.19 | 조회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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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보내는 편지

경험주의자 독일 교환학생의 해외 생활 일지입니다.

아무 말 없이 포옹만 해도 편안했던 건 우리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서였을까?

 

월요일에는 수가 놀러 왔다.

수는 터키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다. 우리는 지난 학기 교환학생 OT 당시, 드넓은 공원에서 처음 만났다. 교환학생 친구들을 정식으로 만나는 첫 자리여서 긴장한 채 뚝딱거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낯선 분위기 속 수와의 대화는 나를 녹게 했다. 곁들인 맥주 한 캔도 마음이 느슨해지는 데에 한몫한 것 같지만.

통성명을 가볍게 하는 1분의 대화만으로 상대와 나의 바이브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신기하다. 수와는 뭐라고 딱 설명할 수 없게 들어맞는 지점이 있었다.

보통 그런 걸 느낌이라고들 한다지. 우리는 엉성하게 잘 맞았다.

 

둘이 만난 횟수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

그마저도 반은 파티에서 만났을 테니, 약속을 잡아서 만난 건 다섯 번 쯤 되려나. 가까워지고 싶던 첫 느낌을 더 발전시킬 만큼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숨이 차도록 꼬옥 안아주는 수가 좋았다.

어느 날은 더듬더듬 어색하게 서로를 알아갔고, 또 다른 날에는 맛있는 음식과 함께 안주처럼 곁들인 가십거리로 배가 아프도록 깔깔 웃었다. 헤어질 날은 감지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왔다. 베를린으로 인턴을 하러 가는 수와의 마지막 소풍에서는 반가움과 아쉬움을 가득 담아 짧은 편지를 써주었다.

 

함께 했던 긴 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운 햇볕에 웃음이 절로 나는 봄이 도래했다. 이 좋은 날, 우리는 여전히 독일에 있었고 수는 내가 지내는 곳에 놀러 왔다.

나는 여행 때문에 바빴고, 수도 지내는 곳에 남겨둔 짐을 가지러 온 것이라서 솔직히는 별 기대 없이 만났다. 반갑지만 그저 교환학생끼리 공유했던 특별한 추억을 함께하는 시간이겠거니 생각했다.

 

수가 도착한 날 밤, 예상치 못한 긴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와 늘 함께 했던 친구 안토니를 추억했고, 외국에 나와서 이방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얘기했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우리답게 앞으로 하고 싶은 예술 분야와 미래에 대해서 말했고, 각자의 인생에서 예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중요한 것이 됐는지 이야기 나눴다. 대화 내용은 파편처럼 기억난다. 그보다는 수와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소통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수는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이 때때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힘들 때 사람을 만나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친구였다. 아무리 그래도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 친구 하나 없이 지내는 건 쉽지 않았겠지.

교환학생 때는 친구들 틈에서 북적이면서 지내느라 외로움도 금방 휘발된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 쉽게 가까워지기도 한다. 온도차가 있는 베를린에서의 삶에 적응해가고, 어린 나이에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정진하는 수의 모습은 나에게도 큰 귀감이 됐다.

 

한 번 트인 입으로 무슨 말을 못 하랴. 다음 날 공원에서도 우리의 깊은 대화는 계속됐다. 수와의 대화 조각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1. 수: 터키에 돌아가면 상담을 받고 싶어. 이곳 생활이 잘 맞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해결하기 어려운 우울이 있었어.

: 나도 한국에서 일 년에 한두 어번 상담을 받곤 했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은 나눌 필요가 있어. 친구가 아니라 전문가가 필요할 때가 있지.

: 맞아. 그리고 나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잘 못하겠어. 짐을 주는 것 같아.

: 원래 서로 짐을 주고받으면서 사는 거지 뭐. 나는 여기 와서 바뀌었어. 원래는 너랑 같았는데, 이제는 힘든 일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얘기해. 그렇게 얘기하면 무겁게만 보였던 일이 가벼워지더라고. 가십거리처럼 얘기하면서 훌훌 털어낼 수 있어서 좋아.

 

2. : 나는 사람을 잘 안 믿어. 독일에서도, 터키에서도 가깝던 사람들과 영문도 모른 채 멀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어.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고 잘 해주면 안 되는 걸까?

: 네가 잘해줘서 너를 막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한거야. 오히려 그런 사람과 멀어질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몰라나도 2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잘 안 믿었어. 그런데 어느 날 때로는 가족보다 더 믿는 친구가 해준 말 덕분에 나는 완전히 바뀌었어.

채은아, 나는 너를 믿고 너를 믿는 게 두렵지 않았어. 근데 너는 사람한테 상처를 받을까 봐 벽을 치는 것 같아. 나한테도.” (이 즈음에 당시 가깝던 또 다른 친구 두 명에게 같은 뉘앙스의 말을 들었다.) 그 순간이 여전히 선명해.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상처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바뀌려고 부단히 노력했어. 그리고 이제는 사람을 믿는 게 두렵지 않아.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줘도, 이상한 사람이어도 그게 나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더라고. 나는 그냥 내 마음을 주는 거지.

: 멋진 순간이었네. 나도 터키에 돌아가면 가까웠던 친구와 만나서 대화를 해보려고. 최소한의 이해를 하고 싶어.

 

3. 수: 유럽이 편한 건 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뭘 해도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

: 공감해. 아무도 나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잖아.

: 터키에 있을 땐 뭔가 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 특히 화장을 하지 말라는 얘기,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하고 다니라는 얘기들.

: 와 우리 다른데 같은 상황을 각자 나라에서 겪고 있었네. 나는 화장을 하고 다니라고, 머리를 길러 보는 건 어떠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화장을 안 하면 캡 모자를 쓰거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야. 여자가 화장을 안 하고 다니면 예의가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거든.

: 크리피하다. 그러게 우리 다르지만 같은 상황이잖아. 우리가 친구인 이유인가 봐. 우리는 규칙을 깨려고 하니까.

: 그러게. 그게 우리가 지금 함께인 이유가 아닐까 헤헤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2박 3일의 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글을 보냅니다. 베를린에서 놀러 온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스위스 바젤로 여행을 다녀오니까 어느새 주말이 됐어요. 시간은 대체 뭐 하는 애길래 이렇게 빠를까요.

이번 주에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메일링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저한테는 뜻깊은 시간이랍니다. 글감 고민이 있어도 즐겁게 글을 쓰고, 제 글을 봐주는 분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어디서든 무탈하게 행복하세요.

 

독일에서, 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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