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2022.06.25~26

잘 산다는 건 뭘까요?

2022.06.26 | 조회 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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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보내는 편지

경험주의자 독일 교환학생의 해외 생활 일지입니다.

구독자 님,

 

마지막 메일이 늦었죠?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후련함과 아쉬움이 공존합니다. 몇십 분이면 술술 쓰던 글도 체한 듯 며칠째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시간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겠지만요.

 

한 달간의 메일링과 함께 저의 독일 교환학생 생활도 저물어가고 있어요.

인턴을 구하면 이곳에 더 있겠지만 두세 달 후에 한국을 갈 확률이 더 높아서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긴 건지, 1년 동안 타지에서 나는 뭘 느끼고 얻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모든 행복과 고통을 곱씹게 되는 요즘이네요.

메일링은 저에게 많은 감정과 순간을 안겨주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분들의 응원, 종종 보내주시던 진심 어린 답장.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마음들을 한 아름 얻고 갑니다.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 우연이라는 것에 놀라고 감탄합니다. 제가 하도 말해서 지겨우시겠지만 말로 다 표현하기에도 벅찰 만큼 감사합니다. 저는 참 복받은 사람이에요.

 

엊그제는 여기서 함께 교환학생을 하고 있는 한국인 동생과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셨어요. 저보다 네 살 어린 친구인데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성숙한 친구입니다. 요즘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서 제 과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4년 전의 저는 많이 불안하고 공허했고,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모르지만 하나 배운 것은, 불안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고 공존하면 된다는 겁니다. 말만 쉽고 여전히 어렵지만요. 그래도 그 친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으레 겪는 힘듦과 잘 지내고 있더라고요.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언니는 힘들 때 어떤 방식으로 해소해?" 

 

가장 힘들었던 스물네 살의 저는 미친 듯이 걸었습니다. 음악도, 사람도, 글도 위로가 되지 않아서 발바닥의 아픔이 무뎌질 때까지 걸었어요. 그때 제 취미는 일몰 사냥이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도 모르게 잠식됐던 마음은 유일하게 노을에 반응했거든요.

그 시절 자주 가던 육교가 하나 있었는데요. 동네 구석에 있어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거리에 떡하니 있던 육교였습니다. 저만 아는 묘한 곳이라는 생각에 신남이 배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육교를 찾아가는 길에는 회색빛 공장과 수풀이 뒤섞여 있었고 저는 그 이질감이 묘하게 좋아서 그곳을 한참 바라보곤 했어요. 감정도, 희망을 꿈꾸는 일도 희미해진 제가 고통에서 멍해진 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만 같아요. 독일에서의 삶도 영향이 있겠지만 대체 무엇이 저를 그렇게 변화시켰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힘든 감정이어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좋고, 사람이 좋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불안함보다는 기대가 훨씬 더 커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역시 답은 사람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오랜 14년 지기 친구부터 잠시 스쳐간 사람까지 모두 저에게 큰 배움을 줬어요. 모든 것이 무뎌져도 사람과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제가 대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세상이 이렇게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든든한 가족 같은 오랜 친구들,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이유 없이 품어주는 가족들, 한 학기 뒤면 헤어질 나에게 온 마음을 다 해준 외국인 친구들, 두서도 없이 만나자고 할 때 기꺼이 나를 받아준 사람들.

가끔 그들의 큰마음은 어디서 생긴 걸까 신기하고 한없이 베풀어주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냥 그런대로 두고 싶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에 마음을 다 했을 뿐인 거겠죠. 그 순간이 저에게는 참 필요한 순간이었고요. 길게 말했지만 결국 이 역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하든, 함께하지 않든 마음을 나눈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문득 어른들은 이 불안과 무뎌짐 속에서 어떻게 꿋꿋이 살아낸 걸까, 나는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두렵기만 해요. 잘 사는 건 뭘까요. 독일에서 만난 소중한 언니는 요즘 이 생각을 매일 하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단어로 말하면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여러분에게 잘 산다는 건 뭔가요? 여러분의 생각도 듣고 싶어요.

 

이번 주에는 메일링의 답장을 많이 받게 됐어요. 대학교에서 친해진 존경하는 동기, 독일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a.k.a. 독일 엄마), 교환학생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같은 학교 디자인과 동생까지. 그들의 메일을 읽으면서 더더욱 이 마지막 메일을 쓰기 싫었습니다.

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올해 2월 외국인 친구들을 보내면서 지칠 정도로 울었던 한 주의 먹먹함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이런 복을 받고 있는 걸까요. 저는 제 앞길 찾느라 주변을 그렇게 많이 챙기지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제 곁에 있는 걸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잘 살고 싶다,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고 싶다. 그들에게 떳떳한 사람이고 싶다. 무엇보다 저에게 떳떳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릅니다. 삶이 뭔지, 사랑이 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래서 계속 살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생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알고 싶어요. 무엇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경험이었더라도 그 속에서 제 것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계속 글을 쓸 거예요. 

 

메일링은 끝나지만 이것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메일링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다음 달 초부터 시작할 예정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더 큰 프로젝트로 찾아뵈려고 해요. 기나긴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건강하게 지내세요. 한 달 동안 받은 따뜻한 마음들 잘 간직해서 씩씩하게 살아보겠습니다. 저는 꼭 다시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겁 없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시길.

 

무한한 사랑과 함께

독일에서, 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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