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의 입증책임

변호사스럽지 않은 입증책임론

2023.01.08 | 조회 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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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팝 변호사

오늘도 태산같은 업무 중 티끌만큼을 마친 변호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단 한 문장의 답변서를 제출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지만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원고가 손해배상 사건 소장에서 사고의 발생 사실과 그 사고로 인한 손해의 내용에 관하여 깨알같이 기재해 놓았는데, 피고 대리인은 단 한 문장의 답변서를 냈다는 겁니다. 원고는 사고 발생 사실과 손해의 범위에 관하여 주장하고 있으나, '손해의 발생'에 관한 입증이 없어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어야 합니다, 라는 취지로요. 

'손해의 발생'과 '손해의 범위' 중 손해의 발생에 관하여 우선 입증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 손해의 범위를 이야기해도 의미가 없지요. 손해의 발생을 입증한다는 것은 원고가 피고에게 그 손해의 전보를 구할 청구권원이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인데, 그 입증 없이 개호비, 노동능력상실, 후유증, 위자료 등등 손해의 범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다만, 아무리 손해의 발생에 관한 입증이 없어 보이는 소장이라도 통상의 피고 대리인이라면 원고의 모든 주장에 관한 반박을 하기 마련입니다, 예비적 주장이라는 전제를 깔고도요(소심해지고 걱정되잖아요, 재판부에서 손해의 발생에 관한 입증이 되었다고 덜컥 판단할까봐요).

 

진정성에 대한 입증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입증책임론에 관한 상징적인 이 일화를 통해 법률가들은 입증책임의 중요성을 되새기곤 하지만, 사실, 입증책임 문제가 사건을 다루는 내내 교과서에서 처럼 뾰족하게 다투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있건 간에 정말 이 사건의 옳은 결론은 무엇일까, 라는 big question이 사건 내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는 요즈음 없던 길을 만들어 가 보고자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시죠,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일을 할 때는 '왜'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데, 새로운 도전이나 시도를 하려고 하면 '왜'라는 질문을 엄청나게 받는다는 것을요 -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거나 학교에 보내려고 하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데, 학교를 그만 두게하고 아이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려 하면 '왜'라는 질문을 하며 호기심천국이 시작되잖아요.

인생을 통틀어 '왜'라는 질문(ex. 왜 피아노를 그만두었냐, 왜 항암치료를 그만 두었냐, 왜 법을 하기로 했냐 etc.)을 무수히 받고 살아온 저로서는 근래에 많이 듣는 '왜'라는 질문과 시선(ex. 이제 좀 쉴만한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 왜 남들 하는대로 하지 않냐 etc.)이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 할 때, 또는 엄마로서 굳은 결심을 하고 아이를 위하여 어떤 일을 실행할 때 굳이 엄마의 마음을 설명하거나 이유를 알릴 필요 없듯이, 저도 제 진정성의 입증책임을 제가 부담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어요. 긴 말 하지 않고 그냥 가려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원래 진정성이란게 그런 거잖아요, 애써 드러내고 확인시키지 않아도 천천히 선선히 묻어나오는 것. 

 

지금은 왜 하냐고 묻지만 나중엔 어떻게 했냐고 물을 것이다 - 출처 미상

누구의 말인지 몰라서 출처 미상이라고 쓰며 늘 인용하는 문구, '지금은 왜 하냐고 묻지만 나중엔 어떻게 했냐고 물을 것이다'는 무척 용기를 주는 글귀입니다.

어쩌면 매번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듣고 산다는 것은 제가 세상과 그다지 화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진정성의 입증을 촉구받아 오면서 저의 마음의 조각은 더욱 단단해 진 것 같습니다. 한번 뿐인 삶, 꼭 의미있는 삶으로 살아남고, 살아내겠다고요. 

 

ps. 모유수유 후일담

아기에게 젖을 주는 엄마의 진정성에는 입증책임의 부담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저는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며 생후 17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방문을 잠그고 유축을 했습니다. 유축한 모유를 보냉병에 넣어서 퇴근할 때 가져가면 다음 날 낮 시간 아이가 냠냠합니다. 금요일 낮에 사무실에서 유축한 것은 집에 가서 얼렸다가 월요일 낮 시간에 아이가 냠냠하구요. 그 나머지 시간인 새벽과 밤, 주말에는 직수유했고, 조금씩 남는 젖은 짬짬이 유축해서 얼려 두어 아이가 배고파할 때 보충했습니다. 

어렵사리 늦게 낳은 아이에게, 목을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를 두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모유수유를 했던 것이었어요. 제가 진정성의 입증책임을 부담하지 않는 일들은 이렇듯 다른 옵션이 없을만큼 간절한 일들이었네요, 지금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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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팝 변호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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