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신화를 소개하면서 그 누구도 "제우스"를 Ζεύς라고 소개하지 않고,
힌두교 신화를 소개하면서 그 누구도 "인드라"를 इन्द्र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일랜드의 신화를 소개하려면, 일단 고유명사를 한글로 옮겨야겠죠!
그러나...
아일랜드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한글로 옮기려면 정말, 정말, 정말로 많은 장벽을 돌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벽은 완벽하게 돌파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적당한 예시가 있습니다.
밀레시안(Milesian)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밀의 아이들”이라는 일족의 위대한 판관이자 시인이자 드루이드의 이름을 한글로 옮겨 보아요!
1. 일단 원문을 보자
번역을 하려면 당연히 원문이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럼 야심차게 원문을 살펴봅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은 1단계부터 끔찍한 난항을 겪습니다.
어떤 책에는 Amergin, 다른 책에는 Amargen, 같은 책의 다른 문장에는 Amorgen... 결국
Amergin, Amergen, Amargin, Amargen, Amorgin, Amorgen, Amargein, Amorgein, Amarghin...
등의 정말, 정말로 다양한 표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헌이 달라서 그런 거 아니야?”
“저자가 달라서 그렇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같은 문헌의 같은 문단, 같은 문법 환경에서도 온갖 다른 표기가 등장한답니다.
그 이유는 중세 아일랜드 필경사들이 여러 차례 나오는 이 이름을 “같은 단어”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뭔 헛소리래? 같은 사람 이름이면 당연히 같은 이름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건 맞춤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현대인의 생각입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단어에 따라 같은 단어라도 미묘하게 소리가 달라지는 것은 현대인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감이 좋으신 분이라면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고기"가 사실은 다른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몰라요!
그 인지를 가능한 한 소리나는 그대로 글로 재현한 것이 바로 중세 필사가의 중구난방 표기입니다.
맞춤법의 부재는 일을 더 키웁니다.
현대인은 "접착제"라는 단어를 "접착제"라고 씁니다.
그 이유는 "접"과 "착"과 "제"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 뿌리이며,
이것을 이어붙여야 "접착제"라는 완성된 단어가 된다는 언어학 상식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세인의 상식에는 그런 관념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접착제", 또 누구는 "접착쩨", "접작재", 혹은 본인 방언대로 "즙작째" 등등...
온갖 표기를 아무렇게나(?)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Amergin, Amergen, Amargin, Amargen, Amorgin, Amorgen, Amargein, Amorgein, Amarghin...
그럼 이 수많은 표기 중에 무엇을 채택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사전에 실어도 되는 이른바 “표준형”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평생 고대 아일랜드어 문헌만 연구한 학자들이 합의합니다.
보통은 http://dil.ie 같은 사전에 등록되어 있지요.
※ eDIL이란? 1976년에 처음 종이책으로 나와서 2007년 왕립아일랜드학회가 디지털화하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업데이트 중인, 아일랜드 고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위의 사전입니다!
그러나 수백 수천 번 쓰이는 단어라면 몰라도, 한두 번 쓰이고 마는 고유명사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무엇이 표준인지 결정할 수 없다면, 답은 하나!
공권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정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표준어라고 부르지요.
안타깝게도 고대 아일랜드어 표준 표기를 확립할 공권력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이 있습니다.
권위 있는 학자들이 모여 합의하는 겁니다!
아아... 이런... 합의가 안 되어 있군요...
그러니 최악의 방법인 제 자의로 결정하겠습니다.
Amergin을 표준으로 삼기로 하죠. 기준은 오직 제 맘입니다.
2. 현대어로 복원하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를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고대 아일랜드어를 현대어로 변환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일반론이 있기는 합니다.
m은 mh로 바꾸고, g는 gh로 바꾸는 등이지요.
그러나 세부 사항은 전혀 합의되지 않았고, 이 또한 학자마다 표기가 크고 작게 다릅니다.
몇 달 동안 검색을 거듭한 결과,
Aimirgin, Aimhirgin, Aimhirghin, Amarghain, Amharghain, Amhargain, Amairghin, Amhairghin, Amhairghein, Amoirghin ...
수십 가지의 표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 수많은 표기 가운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덜 옳은가?
무엇이 더 권위 있고 무엇이 덜 권위 있는가?
무엇이 더 널리 쓰이고 무엇이 덜 유명한가?
무엇이 더 설득력 있고 무엇이 덜 그럴싸한가?
이 질문 가운데 하나라도 정답이 있다면 참 좋으련만!
결국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합의된 방법론과 제 신념(내지는 취향)을 결합하여 자의적 기준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제 기준으로 가장 그럴싸한) Amhairghin을 현대어 표준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반론은 적극 환영이오니 언제든지 답신 부탁드립니다. ㅠㅠ...
그러나 아직 절반밖에 못 왔습니다. 혹은 절반도 못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까요?
3. 그걸 어떻게 발음할 것인가?

한국에는 한국어를 다스리는 절대강자, 국립국어원이 있습니다.
"학여울"을 /항녀울/이 아닌 /하겨울/이라고 잘못 발음하거나 "넓다"를 /넙따/라고, 또 "밟다"를 /발따/라고 잘못 발음하면 준엄한 우리말 사랑의 심판을 내리는 기관이지요.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에는 이런 준엄한 공립기관(전문용어로는 한림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림원은 존재합니다만, 발음 방법까지 준엄하게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슬프게도 게일어* 화자가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 아일랜드어라고도 하는, 아일랜드인이 옛날부터 쓰던 토착 켈트어입니다)

아일랜드가 영국의 침략에 800년을 시달린 탓에 게일어 화자는 영어에 밀려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수백만에 이르던 화자가 고작 수만 명으로 줄어들었지요!
드넓은 아일랜드 섬에서 게일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지역은 지도에 초록색으로 칠한 시골만 남게 되어 버립니다.
언어 화자가 줄어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헉! 내 언어를 쓰는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지금이라도 빨리 화합해서 언어를 보존해야겠어!”
라고 하면 참 좋으련만...
정답은, 오히려 방언차가 극심해집니다. 언어를 통합할 중앙의 정치·문화·경제 헤게모니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어가 일본어의 영향으로 완전히 멸종해서 서울, 부산 같은 도시 사람들은 100% 일본어만 쓰게 되었다고 합시다.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은 이제 강원도 철원, 전라도 함평, 경상도 봉화에만 극소수 집단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면 “표준 한국어”는 어디 방언으로 정해야 할까요? 철원? 함평? 봉화?
게일어의 상황이 정확히 이렇습니다.
갈래갈래 쪼개진 아일랜드어 화자 집단의 방언을 통합할 수 없게 되자, 아일랜드 한림원은 표기법의 표준은 정하되 발음법의 표준은 정하지 않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아주, 정말, 매우 기초적인 단어조차도, 지역마다, 동네마다, 사람마다 발음이 달라지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를 뜻하는 trá는 방언에 따라서
/tɾaː/, /tɾəː/, /tɾaj/, /tɾaːj/, /tɾɔj/, /tɾaːɟ/, /tɾaːw/, /tɾaːv/
등등... 정말 정말 정말 다양한 발음이 존재하고, 무엇 하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답니다.
결국 3번 관문에서도 저의 자의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류은결 표준안에 따라 Amhairghin은 /au̯ɾʲin/으로 발음하는 것이 표준입니다.
이의가 있다면 누가 제발 대신 정답을 만들어 줘...
4. 한글로 어떻게 적을 것인가?

랍스터가 맞냐 로브스터가 맞냐, 짜장면이 맞냐 자장면이 맞냐로 머리채 붙들고 싸우는 나라에서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마 /au̯ɾʲin/은, 외국어 표기법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우린"이라고 적는 데에 동의할 겁니다.
그러나 다른, 심지어는 기초적인 단어들은 어떨까요?
dearg /dʲaɾəɡ/ (빨갛다)는?
buidhe /bˠiː/ (노랗다)는?
bean /bʲan/ (여자)는?
teach /tʲax/ (집)은?
아마 이런 화제에 관심 있는 한국인 세 명이 모인 곳에 집어던지면 정말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질 겁니다.
국립국어원에게 게일어 표준 한글 표기법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여러분의 피 같은 세금이 사용됩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시... 제가 마음대로 정하겠습니다.
Amhairghin은 아우린
dearg는 댜르그
buidhe는 비
bean은 반
teach는 탸흐
제가 정했습니다. 땅땅!
5. 마치며...
이제 이 모든 과정을 모든 등장인물과 지명에 대해서 수행하면 됩니다! 와와!!!!
쉽지 않네요.
유월공방에서 출판하는 모든 켈트 신화 서적은 이 과정을 거쳐 독자님께 내놓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브리짓(Brigit), 앵거스(Angus), 퍼거스(Ferghus)에게
브리드(Brighid), 이나스(Aonghas), 파라스(Fearghas)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일,
바로 이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
참고로, 직접 청취와 문헌·논문 조사, 그리고 때로는 제 주관 개입 등 여러 과정을 거쳐 고안한 류은결표 게일어 한글 표기안은 블로그에 따로 정리해 두었으니 관심과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언제든지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링크(티스토리)!
오늘의 뉴스레터를 읽어 주신 구독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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