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7일 에세이레터- 오로라로 시작

  우리의 오감 중 가장 기억이 오래가는 감각은 후각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심리학을 전공하는 어설픈 심리학도로서 이 명제가 정확하다! 라고 단언하긴 조금 어렵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충 동의하기엔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유난히 기억에 남는 냄새, 향기들도 있고요. 어렸을 때 엄마가 간식으로 만들어줬던 베이글 피자 냄새, 첫 자취를 시작하고 샀던 좋아하는 브랜드의 방향제 향, 좋아하던 친구의 후드에서 나던 보송보송한 섬유유연제 향, 새벽 내내 공부하다가 아침 해를 보며 열람실에서 나왔을 때 느낀 새벽 공기의 냄새라거나… 냄새의 기억이 제일 오래간다던데,란 말이 경험상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인정할 때쯤부터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어요. 누군가에게 내가 00한 향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욕심이 났거든요.

  첫 향수는 누군가에게 선물해주려고 샀던 향수였어요.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내가 갖고 싶은 걸 슬쩍 골라버리는? 이 친구랑 참 잘 어울릴 것 같단 생각에 향수를 선물하고 나서 사실 내가 갖고 싶었던 향수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친구가 그 향수를 뿌려주지 않아 더 그 향이 간절해졌던 건 덤! 어쩌면 그냥 제가 좋아하는 향을 선물했던 걸지도요.

  그래서 샀던 첫 향수는 곡물의 여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에,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향을 담았다는 별칭이 붙은 향수였어요. 뿌리면 레몬 같은 과일의 상큼한 향이 퍼지고, 시원한 느낌이 들고…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나라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오로라 향은 이런 걸까 같은 상상을 하게 해줬고요.

  그다음 향수는 친구들이 돈 모아 선물해준, 나름 이름 있는 브랜드에 꽤 값이 나가는 향수였어요. ‘이슬 맺힌 블루벨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에 최면을 걸듯 마음을 사로잡습니다’라는 설명이 달렸던 향수. 비싼 브랜드 향수들은 그냥 00향이라고 설명을 안 하고 짧은 서사를 달아주네, 같은 촌스러운 생각을 하며 뿌렸던 향수. 제 느낌엔 최면을 건다기보단 달큰한 수박 향에 시원한 바닷바람 한 방울 더해준 향이었어요. 이 향수에 정말 꽂혀서 한동안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뿌리고, 옷에도 탈취제처럼 뿌리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시원한 느낌의 향수, 중성적인 내음의 향수가 취향인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됐고요. 이때쯤부터 친구들이랑 향수 가게를 놀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름 한 번쯤 들어본 브랜드의 향수를 하나씩 사보기 시작했어요. 별로 안 친한 선배가 어떤 향수 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는 친구의 향수, 대놓고 이름이 ‘비’인 향수, 시원한 목화솜이란 이름이 붙은 향수… 향수가 꽤 많아지면서 매일 외출 전 기분에 맞게 향수를 뿌리고, 집에서 ‘모실’ 향수와 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막 뿌릴 향수를 구분하기도 했고요. ‘앗 이번 향수는 잘못 샀네' 싶은 향수도 몇 개 사게 되면서 이젠 나름 어떤 향수가 제 취향이라고 말할 정도도 됐어요. 여름이랑 잘 어울리는, 시원한 느낌의, 중성적인, 꽃향기 과일 향기가 살짝 곁들여진…

  모은 향수가 많아지면서 제 취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발자국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처음 향수를 샀을 땐 이런 향을 좋아했는데, 이젠 이런 향을 뿌리고 다니는구나. 같은 걸 알 수 있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날 00한 향으로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이 취미가 사실 분위기마다 나이마다 달라진다는 걸 알게 돼,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가 참 다양할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곡물의 여신의 이름이 붙은 향수를 쓰던 저를 아는 사람과, 달큰한 수박 향의 블루벨 향수를 뿌리던 저를 만난 사람들은 각각 저를 어떻게 기억할지 생각하면 기분이 오묘해요.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는 분명 향수 외에도 많은 취향에서, 생각에서 다른 사람일 텐데, 어떻게 그 둘 혹은 그 이상의 ‘저'들이 한 사람으로 이어지는 걸까요? 변화와 변화 사이 어떤 지점까지 연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로라 향수를 뿌리고 이 글을 쓰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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