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표정, 밤의 기억

#08 나의 우주에 비가 내리더라도

조지아, 불꽃놀이 아래 잠든 밤

2022.07.27 | 조회 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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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full letter

세상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빛나는 기억을 그림과 글에 담아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가울입니다.

여덟 번째 레터를 보내드려요.
레터를 읽는 동안 구독자님과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놀이를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Tbilisi, Georgia

 

계절에 따라 비가 내리고, 또 눈이 오듯 때때로 마음에 오랜 비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좋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캄캄한 밤이 며칠이고 이어지는 듯한 때도 있어요. 오늘은 조지아 트빌리시의 풍경과 함께, 우울의 밤을 벗어난 순간을 전하려 합니다.

트빌리시의 어느  성당
트빌리시의 어느  성당

 

조지아 트빌리시에 도착했을 땐, 여행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만나고 있었어요. 트빌리시의 풍경엔 노란색이 가득이었습니다. 오래된 건물이 가득한 트빌리시는 골목마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했고, 투박한 듯 정감 있는 동상과 공예품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①가을 트빌리시의 모습<br>②날다람쥐같은 아저씨 동상<br>③다양한 공구가 그려진 간판, 꼭 포도넝쿨같은 글씨들
①가을 트빌리시의 모습
②날다람쥐같은 아저씨 동상
③다양한 공구가 그려진 간판, 꼭 포도넝쿨같은 글씨들

 

조지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낭만적인 도시 풍경, 그리고 와인이 유명합니다. 와인의 발상지답게 집집마다 수제 와인을 만드는 문화가 있어 머무는 숙소마다 주인이 직접 담근 와인과 차차(조지아 증류주)를 내어주어 저마다 독특한 맛을 가진 술과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판매하는 와인 역시 저렴해 머무는 내내 여러 가지 와인을 실컷 마셨습니다. 그에 더해 생활 물가가 저렴해 숙박비며 식비 부담 없이 여행하기에 좋았습니다. 조지아는 누군가 오래 머물며 여행할 국가를 묻는다면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곳입니다.

하지만 조지아에 처음 도착했을 땐 그 아름다움을 미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조지아 바로 전의 여행지였던 터키에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좋은 일도 많았지만, 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사건들인 사기와 인종차별, 성희롱을 여러 번 경험해야 했습니다. 잠시만 방심해도 숙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악의에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있어 트빌리시에 도착했을 땐 마음의 에너지가 모두 도둑맞은 듯 했습니다. 

동양인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이 곳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사건들에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타고난 특성에 의한 차별은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반갑게 인사해도, 무시당하지 않도록 깔끔한 옷을 입어도, 바보 같아 보이지 않도록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고 해도, 사람을 구별 지어 차별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순 없었습니다. 

결국 여느 때라면 낭만을 발견했을 트빌리시의 아름다운 가을 낙엽 사이에서 저는 무력감과 우울을 찾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마음이 지쳐있으니 보이지 않았어요. 트빌리시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 걸까요? 익숙한 매일의 일상이 그리웠고, 낯선 이의 시선에서 호의와 악의를 구별하는 일에 지쳤습니다. 친숙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웠고, 익숙한 질감의 이불에 폭 안겨 안전히 보호받는 느낌을 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도망치듯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온전히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여행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훗날의 후회를 남기지 않고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친 마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무언가가 아닌 쉼이었습니다.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숙소를 알아본 끝에, 도시 외곽 오래된 건물 가장 위층에 있는 아파트를 빌렸습니다. 관광지가 있는 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공원이 곁에 있어 소란을 피할 수 있었어요. 조용한 공간에 홀로 남자 여행의 권태와 우울은 사나운 파도처럼 저를 덮쳤습니다. 

④-⑤ 숙소 천장에 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
④-⑤ 숙소 천장에 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


고갈된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부족한 잠을 실컷 잤습니다. 때아닌 겨울잠에 빠진 곰처럼 침대에 종일 누워 잠을 자다 꼭 일어나야 할 때만 일어나 생활을 챙겼습니다. 

숙소에 부엌이 있어 식당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게 반가웠어요.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사회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직접 요리해 익숙한 맛의 음식을 먹고, 익숙한 예능을 보며 식사했습니다. 재료가 떨어지면 숙소 가까운 마트에 다녀와 와인 몇 병과 재료를 사 재빨리 돌아오곤 했어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싶은 불안한 마음에 트빌리시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다가도, 결국 나가고 싶지 않아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사선의 천장에 있는 네모난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어요. 천장의 창은 숙소에서 유일하게 바깥이 보이는 곳이었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트빌리시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매연이 빠져나가지 못해 도시 위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뿌연 색의 하늘이라도 그나마의 하늘이 보인다는 게 참 좋았습니다. 가끔은 창을 열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면 땅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공기의 냄새를 맡는 두더지가 된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수면 아래 세상처럼 바깥과 분리된 며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몸은 점점 회복되었지만 종일 숙소에만 있다 보니 에너지가 남아 잠이 오지 않았어요. 밤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딸려오는 의심과 불안, 후회와 자기혐오, 정답 없는 고민이 이어져 불면의 밤이 괴롭게 느껴졌습니다. 억지로 눈을 감으면 오히려 생각이 오히려 날뛰는 것만 같아 멍하니 창밖의 달을 보다 잠들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도시의 빛이 스민 창 위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안경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빗방울이 터지고 모여 물줄기를 이루며 낙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빗소리 사이로 멀리서 들려오는 차의 경적, 누군가의 발걸음, 건물의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펑, 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잔잔한 소리 속에서 나른해지던 감각이 큰 소리에 번쩍 눈을 뜬 순간이었습니다. 

 

불꽃놀이 아래 잠든 밤
불꽃놀이 아래 잠든 밤


진동이 느껴지도록 큰 폭발음은 다름 아닌 폭죽소리였습니다. 비에 젖은 창밖으로 불꽃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터지는 빛들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아직 밤이 한참 남았는데도, 긴 밤이 끝난 것 같은 전율이 들었어요. 불꽃놀이는 한참을 이어졌고, 까만 밤을 채우는 불꽃과 함께 모든 무력감과 우울이 창 밖에서 함께 터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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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는 마법처럼 찾아왔다 연기의 잔향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쏟아지는 비에 그 흔적마저도 금세 사라졌어요. 남긴 사진과 영상이 아니었다면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을 채우던 불꽃놀이는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 남은 불꽃놀이는 생생히 살아남았습니다.

그 생생함을 놓치지 않으려 침대에 엎드려 노트를 펴고 불꽃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왜 전율을 느꼈는지, 어째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벅차오르는 감정은 무엇때문인지 한참 생각하며 메모하고, 스케치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순간의 의미가 또렷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밤의 불꽃놀이는 불면의 공간을 경이의 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사람을 피해 숨어든 이불 안에서조차 경이를 선물하는 세상인데, 다시 용기를 내고 싶었어요.

세상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불행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뜻밖의 순간에 찾아오는 행운 또한 있습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 또한 있을 거예요. 좋은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듯, 괴로운 순간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슬픈, 괴롭고 행복한 그 모든 순간을 충실히 살아갈 내가 있습니다. 불꽃은 저에게 그런 의미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밤 후로 저는 다시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놀랍도록 힘이 났어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여행을 계속해야하는 이유를 그 불꽃놀이 속에서 보았기 때문인가봅니다. 문 밖을 나가 낯선 도시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기억을 쌓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습니다. 또 다시 우울과 함께하는 긴 밤을 보내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마냥 봄바람처럼 따스한 나날만 이어지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만약 또 다시 긴 밤이 찾아오고, 때론 비가 내리게된다면, 그 밤 피어오른 불꽃의 기억이 찾아와 이 모든 순간 또한 견뎌낼 수 있다 위로를 전해줄테니까요. 

그리고 오늘 보내는 이 편지가 홀로 긴 밤을 걷고있는 누군가에게 전해진다면, 그 밤 저에게 찾아왔던 불꽃놀이가  그에게도 찾아가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트빌리시 불꽃놀이 아래의 기억을 담아, 
가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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