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표정, 밤의 기억

#11 햇살, 파도 그리고 비행

구름을 지나 페티예의 푸른 바다 위로

2022.11.30 | 조회 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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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full letter

세상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빛나는 기억을 그림과 글에 담아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가울입니다.

열한 번째 레터에 페티예에서의 기억을 담아 보내드려요.
이번 레터를 읽는 동안 구독자님과 함께 페티예의 하늘 위를 날아오르길 바랍니다.

Fethiye, Turkey

페티예 항구에 가득한 유람선들
페티예 항구에 가득한 유람선들


페티예는 동생과 함께 한 튀르키예 여행에서 이스탄불과 파묵칼레, 그리고 카파도키아와 안탈리아를 거쳐 다섯 번째로 도착한 튀르키예의 남쪽 도시였습니다. 

페티예로 향한 이유는 패러글라이딩을 위해서였어요. 처음 여행을 계획하던 때부터 패러글라이더들의 사진에 반해 서둘러 날짜를 정하고 업체를 찾아 예약까지 해 둘 정도로 정말 하고 싶은 경험이었습니다. 계획하던 때엔 도착한 직후엔 페티예 시내를 둘러본 뒤에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욀뤼데니즈 해변으로 이동해볼까 했어요. 도시도 보고 자연도 보는, 딱 좋은 계획이다 싶었거든요. 

막상 페티예에 도착하니 도시 구경보단 한시라도 빨리 해변으로 향하고 싶었습니다. 여행 내내 예상치 못한 이른 겨울 날씨에 시달린 탓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따스한 지중해 기후가 너무나 반가웠어요. 날카롭게 벼려진 겨울바람이 아닌, 초여름의 바람처럼 부드럽고 느린 바람의 감촉이 상냥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장 따스한 햇살이 반짝이는 해변에 누워 바닷소리를 들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노곤하게 녹아버린 마시멜로처럼요. 호텔에 짐을 던져두고, 다시 길을 나서 버스를 타고 욀뤼데니즈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욀뤼데니즈 해변은 성수기가 끝난 관광지 특유의 한가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작은 투어 회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자리를 잡은 해변의 조용한 공기에 파도 소리만 잔잔히 오가고 있었어요. 그 한적함이 참 좋았습니다. 고요하고, 아름다웠어요.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모래 위를 걷다 괜스레 바닷물에 발가락을 적시기도 하고, 발장구도 치며 신나게 사진도 찍었습니다. 깔깔대며 동생과 놀다 늘 챙겨 다니던 얇은 돗자리를 모래 위에 펼치고 드러누웠어요. 햇살에 달궈진 모래 위에 뉘이면 어쩌면 그리도 기분이 좋을까요? 그 온기를 그대로 끌어와 이불 속에 펼쳐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따스한 모래를 침대 삼고 따스한 바람을 이불 삼아 가만히 누워 파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따금씩 주위로 드물게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의 발가락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어요. 그러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둘러보니 넓은 해변을 무대 삼아 누군가 우뚝 서서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햇살, 파도 그리고 음악 (종이 위에 수채, 2019)
햇살, 파도 그리고 음악 (종이 위에 수채, 2019)

연주를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에 모래사장을 떠나 더 가까운 거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느린 템포의 이름 모를 곡의 선율이 바람을 따라 해변의 공기에 퍼지고 있었어요. 따스한 햇볕이며 파도 소리가 그를 위한 무대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관객이 있든, 없든 그건 그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어요. 지그시 눈을 감고 연주하는 그와 내내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거든요. 어쩌면 그는 늘 이 자리에서 서서 연주를 해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광객이 떠나 한적해진 해변의 풍경이 그의 연주로 인해 풍부하게 채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풍경 속에 녹아든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를 마치 해변의 주인처럼 묘사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욀뤼데니즈의 따스한 색채를 더해서요.  

한참 연주를 듣고 있는데, 그의 뒤로 해변 위에 착륙하는 패러글라이더들이 보였습니다. 볼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내일이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하늘을 날고있겠지?'라는 생각에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가, '굳이 내일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란 충동이 들었어요. 날씨는 좋고, 분주히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넘쳐흘렀습니다. 그렇게 동생과 함께 'Gravity'라는 간판을 찾아갔습니다. 여행 전 예약해두었던 패러글라이딩 회사였어요.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모든 게 일사천리로 흘러갔어요. 패러글라이딩을 위한 최소 인원이 금세 채워졌고, 다른 몇 명의 관광객과 함께 봉고차에 올라 바바다 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으로 향하는 동안 곳곳에서 쉬고 있던 프리랜서 파일럿들이 올라탔습니다. 욀뤼데니즈 해변 옆의 바바다 산의 거친 길을 봉고차가 거침없이 올랐어요. 중간에 몇 번이고 코를 막고 먹먹한 귀를 뚫어야 할 정도로 높은 산이었습니다. 포인트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파일럿이 배정되었어요. 저와 함께 비행하게 될 파일럿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곧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비행 포인트 주위론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해변에서는 날씨가 그토록 좋았는데,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가득했어요. 인솔자는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다시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할 수 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요! 제발 비행할 수 있기를, 시야를 가리는 구름이 걷히길 바랐습니다.

산 정상에 부는 바람은 차갑고 세찼어요. 얇은 반팔 하나만 입고서 벌벌 떠는 모습에 짝궁 파일럿이 커다란 가방에서 여벌의 외투와 장갑을 꺼내 빌려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던지요! 동생과 함께 감사히 옷을 입고 그나마 바람이 덜 부는 곳에 앉아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요? 구름은 걷히는 듯 하다 또다시 몰려오길 반복했어요. 그럴 때마다 투어 인솔자의 무전기는 바쁘게 울려댔습니다.

거의 체념하려던 순간, 인솔자의 손짓에 파일럿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낙하산을 펼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장비를 착용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짝궁 파일럿에게 다가가 하네스며 헬멧을 착용했고, 고리를 걸어 파일럿과 연결되었습니다. '진짜 비행할 수 있는 걸까?'하고 설레이던 찰나 저편에서 동생의 비명이 들렸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날아오른 동생이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새였어요. 

놀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동생은 안전한 건지 파일럿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고, 네 동생의 파일럿은 우리 중 가장 베테랑이고 안전할 거라고 답했어요.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인데다, 여전히 두터운 구름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 말을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급격히 마음이 불안해지던 중 다행히 무전기를 통해 동생의 파일럿이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봉우리만 벗어나면 하늘이 아주 깨끗하다고요. 동생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도 들렸습니다. 걱정이 확 풀어지던 순간이었어요. 무전이 온 후 바로 저 또한 파일럿의 인도에 맞춰 언덕 아래를 달려 내려갔고,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구름 사이로 난생처음으로 날아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늘 위로 날아올랐지만 여전히 시야엔 흰 구름 뿐이었습니다. 짙은 안개처럼 깔린 구름 사이로 가까운 곳의 산줄기가 이따금씩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어요. 코가 빨갛게 얼도록 차갑고 촉촉한 구름 사이를 한동안 날아가는 동안 천천히 흰색 구름이 옅어지고, 저 멀리 수평선과 함께 맑은 하늘과 햇살, 욀뤼데니즈의 블루 라군이 한가득 펼쳐졌습니다. 둥근 지구의 수평선을 두 눈 가득 담은 순간 엄청난 해방감이 느껴졌어요. 바람이 눈이 시리도록 거세게 불어왔지만, 그 아름다운 지구의 푸르름이 발 아래 사방으로 펼쳐지니 환호성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짜릿한 첫 비행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늘 위로 풍덩 (종이 위에 수채, 2019)
하늘 위로 풍덩 (종이 위에 수채, 2019)

마치 하늘에 몸을 던진 것처럼 마음속 가득 해방감이 차올랐어요. 내가 정말 얇은 천에 줄을 매달고 하늘을 날고 있다니! 비현실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비행의 순간에 푹 빠져 정신없이 즐기는 모습에 짝궁 파일럿도 함께 신이 났습니다. 한동안 활강을 한 뒤엔 재미있는 비행 기술을 잔뜩 보여주었어요. 큰 원을 그리며 둥글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그네를 타듯 앞뒤로 흔들어 주기도 했어요. 나름대로 비행에 적응했을 때쯤엔 직접 방향키를 쥐어주고 짧게나마 직접 비행하게도 해주었습니다. 그는 정말 좋은 파일럿이었습니다. 그렇게 비행을 즐기는 동안 풍경 속의 작은 부분이었던 페티예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어요.

비행을 시작했을 때처럼, 파일럿의 신호에 맞춰 해변에 착륙하고 벌떡 일어나 모래사장 위를 달렸습니다. 아까 해변에 착륙하던 사람들처럼 저도 성공적으로 첫 비행을 마친 거예요! 파일럿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모래사장을 펄쩍펄쩍 뛰어다녔습니다. 너무나 신이 나는 경험이었어요. 

참 신기한 일은 그 다음 날에 일어났습니다. 또 한 번의 예정된 비행을 위해 같은 회사를 찾아가니, 오늘은 비행을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예요. 나가보니 정말 어제보다 더 크고 어두운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어제 정말 패러글라이딩하길 잘했다며 동생과 이야기하는 동안 어제의 모든 결정에 행운이 따랐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인생에 몇 없을 행운 가득한 날이었다는 것도요!   

늘 어떤 일을 하던 자연스레 계획부터 짜고, 그 계획을 따르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처음의 계획만 고집하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해요. 모든 게 계획대로 풀리기에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또 만약 마냥 계획대로만 된다면 놀랄 일도 없을 거예요. 어제의 완벽한 계획보다 오늘의 뜻 밖의 충동을 따르는 게 더 많은 행운을 허락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페티예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요. 

구독자님의 여행 중엔 어떤 행운이 있었나요? 오랜만에 그날의 기억을 펼치고 행운의 순간을 차근차근 다시 걸어보세요. 어쩌면 오늘의 하루에도 그날의 행운이 찾아올지도 몰라요.

페티예의 행운을 담아, 가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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